메뉴 건너뛰기

close

▲ 세고비아의 수도교
ⓒ 한길사
앞서 쓴 두 편의 글에서 필자는 세계제국 로마를 지탱한 원동력으로 그들의 인간중심 사고와 현실중시의 가치관을 꼽았다. 그것을 밑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로마체제를 필자는 로마사회의 근대성이라 감히 결론지었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세계제국 로마를 떠받친 두 기둥은 네트워크와 시스템이라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로마가도 등의 인프라 구축, 신속한 정보전달을 위한 공공우편제도와 역참의 정비, 퇴역군인을 주축으로 시행된 식민도시의 건설과 본국 또는 식민도시 간의 유기적 연결, 속주와 동맹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긴밀한 협조체제와 비상시의 병력분담을 통한 동맹의 유지 등이 로마의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제정되고 손질된 법체계, 상승로마군단의 신화를 가능케 한 전술교리와 교범의 완성, 화재 등의 자연재해에 대비한 공적부조체제의 구축과 시행, 경쟁력을 고려한 자작농 육성정책과 농업재건책, 무산자에 대한 빈민구제, 기축통화의 발행을 통한 단일경제권의 형성 등 오늘날의 시스템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시스템의 근대성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필자가 감히 '모든 길은 로마에서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도 위와 같은 로마사회의 근대성에서 기인한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거쳐 티베리우스 시대에 거의 정비된 시스템은 이후의 로마사회를 지탱하는 등뼈로서 기능하기에 충분하였다. 이 말은 이후의 혼란과 불안은 시스템의 부재나 미비라기보다는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의 실패, 통치자의 실정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가 과거의 시간을 복원하는 데 그치면 그것은 진정한 역사가 아니다. 그 복원된 시간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듣고 현재의 반면교사로 되살리는 것이 진정한 역사다. 그렇다면 두 달간 필자를 로마인으로 살게 해준 <로마인이야기>를 통해 필자가 발견한 역사는 무엇일까? 그것은 필자에게도, 또한 당대에게도 유용한 로마인의 길이었다.

문민지배의 신념으로 다져진 길

▲ 마르켈루스 극장
ⓒ 한길사
무적의 로마군단이 길을 열었을 때 로마는 세계가 되었고 그 길을 따라 카이사르가 돌아왔을 때 세계의 여명은 동텄다. 그 길에 서서 필자는 군정일치가 불가피한 고대사회에서 카이사르를 거쳐 티베리우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보여준 문민지배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경외지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원로원체제의 타파를 위해 루비콘강을 건넌 카이사르였지만 그의 치세는 군사적인 수단에 의한 체제의 전복이 아니었다. 정적의 편마저 용서하는 포용과 화해의 정치가 카이사르의 정치였다. 저자가 '교묘한 속임수'라 누차 강조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역시 그의 정신이 그대로 계승되었음은 물론이다.

자신의 최측근인 근위대장 세야누스까지 숙청하며 정치군인의 출현을 경계한 티베리우스의 사후, 칼리굴라에서 비텔리우스 시대까지 정치군인들이 권력의 정점으로 등장하면서 벌어진 내전과 위기의 시대는 문민지배의 전통이 나라의 안정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실증해준다.

능력에 따른 인재발탁과 경영으로 제국의 초석을 다진 '티베리우스의 문하생'들이 없었다면 그의 사후 혼란과 위기는 어쩌면 제국의 붕괴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군사쿠데타로 집권하여 정치군인들로 인의 장막을 친 채 권력의 사유화를 꾀했던 박정희 이후의 우리 현대사는 그대로 비극의 현장이었다.

근위대장에게 죽임을 당한 칼리굴라의 운명이 박정희의 운명이 되었고, 박정희의 문하생이라 부를 수 있는 자들에 의해 광주학살은 일어났다. 황제를 참칭하며 제국의 방위선(라인강)을 떠난 비텔리우스 군단은 더 이상 충성스런 군대가 아니었다. 마치 서울에 입성한 박정희의 공수부대처럼, 노태우의 9사단처럼. 그러나 로마인의 문민지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그들의 천하를 용인하지 않는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되기 전)옥타비아누스는 왜 게르만 용병을 자신들의 경호원으로 삼았을까? 물론 그들의 용맹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스런 로마 군인들을 물리친 이유로는 부족하다. 측근에서 경호하는 그들이 로마의 유력자 혹은 자신의 족벌과 결탁하여 잠재적인 정치 불안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에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티베리우스 사후 우려는 현실이 되었으니 그저 상상이랄 수만도 없다.

식량위기까지 감수하며 선택한 포용의 경제, 통합의 길

▲ 아피아가도
ⓒ 한길사
경제란 곧 효용이고 무역이란 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가치 이전이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두 축으로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는 바로 이런 경제원칙이 지배하는 사회다. 세계제국 로마는 기원 전 이미 자본주의의 각축장이었다. 기후와 토양에서 유리한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서 대량 생산된 밀의 가격경쟁력과 품질은 이탈리아반도의 밀이 경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마인은 이 때 과감히 본국의 밀 생산을 포기한다. 식량자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서 행한 선택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황제의 책무는 식량 확보와 안전보장이라 누차 강조하듯이 자급할 수 없는 식량대책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그럼에도 경쟁력을 잃은 밀 생산에 비용을 낭비하기보다는 올리브 포도 등을 본국 농업으로 육성함으로써 실리를 취한다.

카이사르의 농지법에 의한 자작농 육성정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주곡인 밀 생산의 속주(시칠리아 북아프리카 등)의존을 식량이 무기가 되는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 로마인의 지혜가 있다. 밀의 수입의존은 경쟁력을 중시한 측면보다는 밀 생산이 중심인 속주의 경제여건을 감안한 세계화 전략이란 측면이 강하다. 즉 그들의 안정된 경제를 보장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 로마인의 포용적 경제관의 산물이다.

상품과 용역의 가치이전을 자유롭게 하자는 (한미)FTA가 자국민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는 것은 무엇보다 경쟁력 없는 산업의 궤멸을 불러올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농업 등의 피폐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저항이다. 대세는 거스를 수 없지만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획기적인 전환정책이 먼저다. 로마인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경구를 우리는 오늘 되새겨야 한다.

경제가 커지면서 생겨나는 실업과 환경의 문제는 늘 골칫거리가 된다. 로마군이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 바뀐 것은 실업대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청년실업의 해소책으로 특정 분야의 유급 지원병제를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는 로마인의 혜안을 입증한다. 상하수도와 공공시설의 건설, 가도의 유지보수 등 로마인의 인프라 건설은 곧 실업의 해소와 경기의 진작, 나아가 쾌적한 환경까지를 고려한 경제정책이었다.

기축통화를 발행함으로써 로마를 중심으로 한 단일경제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로마는 소소한 거래에 쓰이는 동전의 발행은 속주와 자치단체에 허용하여 경제활동의 안정을 꾀한다. 고리대금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자율을 12%로 제한하거나 자국 금융과 산업의 공동화를 막기 위해 투자금의 일정부분을 반드시 본국에 투자하게 하는 등의 정책은 오늘의 우리가 그대로 따라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오늘날의 메세나 운동으로 발전한 부의 사회 환원이나 위정자나 원로원 계급에 의한 시민들에 대한 재산의 유증과 공적 기여의 관행 등에서 편법 증여와 증자를 통해 부를 대물림하는 오늘의 우리 기업가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무산자(프로레타리)에 대한 밀의 무상배급과 병역의 면제, 센서스(인구 총조사)에 의한 데이터의 구축, 그 통계를 근거로 한 자원의 배분과 예산의 집행, 속주민일지라도 교사와 의사에게는 바로 시민권을 주어 그 질을 높인 교육과 의료서비스 체계의 정비 등 로마의 시스템과 그 근대성을 모두 예시하자면 저자처럼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하다.

로마에게 길을 묻다

전선에서 무려 30여년 가까이 고단한 군역을 마친 로마 군인들 중에서 람보와 같은 사회 부적응자는 나오지 않았다. 왜일까? 거기에 로마의 탁월한 세계통치전략이 숨어 있다. 퇴역군인을 주축으로 건설된 식민도시는 로마의 현지화 전략이기도 하였지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전투 밖에 모르는 군인들의 본국 유입을 차단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람보 같은 자들이 정국의 혼미를 틈타 쿠데타 세력의 행동대가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 결과는 로마의 파국을 불러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상상은 끝이 없어서, 로마사회로부터 극심한 박해와 순교를 당한 기독교가 사실은 로마제국의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닐까. 로마가 곧 세계였고 세계는 바로 로마였던 시대에 로마사회에 대한 포교와 공인의 쟁취는 바로 세계의 그리스도화를 달성한 결과로 나타났고 후세 유럽문명을 지배하게 된 것은 아닌지.

로마의 국경으로 고착된 라인강 도나우강 방위선이 20세기 냉전의 시대에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경계선과 거의 일치하는 것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했던 로마경제공동체로의 편입 유무가 후세인들의 정서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게르만에 대한 지배를 포기한 티베리우스의 방위선이 결국에는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진 역사를 훗날의 아우구스투스는 저승에서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았을까.

▲ 하드리아누스 방벽 부근의 요새 유적
ⓒ 한길사
로마보다 훨씬 먼저 문명화를 이루고 선진해양기술과 상재로 로마사회의 경제를 좌우했던 그리스인들은 왜 세계제국의 패자가 되지 못했을까. 그런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로마 경제를 반분했던 유대인은 왜 지금도 아라비아의 변방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의 지적처럼 그들의 이산경향, 디아스포라의 숙명을 타고난 때문일까. 혹시 지적 우월감을 과신한 그리스인의 편협함, 자신 밖에 인정할 줄 모르는 유대인의 선민사상 때문은 아닐까. 상상은 끝이 없고 물음은 그칠 줄 모른다.

국내문제의 해결을 위해 어떤 경우에도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은 로마인과 달리, 당을 끌어들인 신라나 외세에 의존해 나라를 바꾸려 했던 구한말의 근대가 그들과 우리의 역사와 운명을 가른 것은 아닌지. 같은 반도인이면서 로마인이 세계제국을 건설한 반면, 한반도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전쟁터가 되어 참혹한 수난을 당한 것은 일찍이 바다를 발견한 로마인과 이를 알지 못한 차이 때문은 아닐까.

필자는 로마인의 길에 서서 그들에게 길을 묻는다. 여전히 외세에 의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나마 동서로 다시 쪼개져 갈등과 분열의 피를 흘리고 있는 내 조국의 길을 묻는다. 통합은 정치적 구호로만 시끄럽고 외세에 기대려는 망국병은 치유할 길이 요원하다. 허무한 이념은 평화로 둔갑하여 우리의 자주를 가로막고 희생과 살신으로 지켜낸 이순신의 바다는 동북아 긴장의 파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출렁인다.

로마에게 다시 길을 묻는다. 가는 사람은 다를지 몰라도 길은 늘 거기에 있다. 모든 길은 로마에서 끝이 났지만 그 길을 다시 가는 것이 우리의 역사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글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인이야기, #시스템, #네트워크, #근대성, #시오노나나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