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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김익한 이병! 아니, 용상스님! 이제야 스님이라고 불러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스님과 저는 1982년 논산 훈련소를 거쳐 8주간의 주특기 훈련을 받을 때 만났습니다. 그 후로 편지 한 통,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한 채 2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불가에서는 찰라에 불과하겠지만요.

합천 해인사 출가. 법명은 용상(속명은 김익한). 아주 오래된 낡은 수첩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스님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바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입니다. 절집 행사에는 지장이 있었겠지만 오후부터 단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요 며칠 물꼬 걱정에 목마른 논두렁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풀들만 무성한 논바닥에 단물이 고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처가 식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는 바람에 늦은 밤이 돼서야 집 근처에 있는 계룡산 갑사에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갑사 가는 어둔 길목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 때문에 그런지 경내에는 연등만 힘 없이 걸려 있고 늦은 밤 탑돌이 하는 중생도 스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갑사에는 내원암이라는 작은 산내 암자가 있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과 셋이서 점점 굵어지는 빗속을 뚫고 내원암을 찾아갔는데 그곳 역시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도들은 모두 다 떠났고 스님 홀로 빈 절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스님이 내주는 과일을 먹고나서 덤으로 수박 한 통을 얻어 들고 다시 인적 없는 빗속을 뚫고 나오다가 불현듯 용상 스님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1982년 초여름, 이맘때였을 것입니다. 연병장에는 비가 질척질척 내렸습니다. 그 빗속에서 스님과 단 둘이서 오후 내내 그 너른 연병장 한가운데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아마 훈련이 없는 공휴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기를 잡는다는 목적으로 느닷없는 집합 명령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날도 역시 집합이 있었는데 우리 둘은 그 집합 명령에 고개를 돌리고 PX에서 빵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습니다. 부대가 발칵 뒤집혀 훈련병 동료들이 우리 둘을 찾아올 때 까지 말입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스님의 꾀임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솔직히 무척 두려웠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집합명령을 받고 아마 스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빵이나 먹자구, 지들끼리 집합하게."

그 군기 살벌한 점호 시간에도 스님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나를 비롯한 동료 훈련병들이 바싹 긴장된 표정으로 침상 끝에 부동자세로 정렬해 있을 때 스님은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가롭게 발가락을 후비고 있었으니까요. 구대장이 출입문으로 들어올 쯤에서야 엉거주춤 일어났으니까요. 그렇게 스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당당한 수행자였습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날 우리 둘의 훈련복은 온통 진흙투성이였습니다. 연병장을 안방 삼아 빗물과 땀으로 범벅된 몸뚱아리를 신나게 굴리고 있었습니다. 그 너른 연병장을 십여 바퀴 돌다가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에 구대장의 군홧발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진흙 묻은 얼굴을 마주보고 표 나지 않게 웃고 있었습니다.

합천 해인사에서 계를 받았다는 스님은 군종병을 거부하고 일반 사병으로 입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내 짧은 소견으로는 온몸으로 중생을 바로 보고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일반 사병, 중생의 길을 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수행자로서 중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가요?

우리는 8주의 지긋지긋한 훈련 기간을 보내며 짬짬이 현실 종교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녀님이 된 스님의 출가 전 애인 얘기를 해가며 서로 벽을 쌓고 있는 종교들에 대해 혈기왕성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나 역시 한때 입산수행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승복을 입는다는 것에 영 자신이 없었습니다. 공밥 먹고 제대로 중생 구제의 길을 걸어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홀연 단신 인도 행을 꿈꾸다가 인도 갈 여자를 만나 뒤늦게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지금은 시골에 들어와 글을 써가며 농사를 지어가며 평범한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잔머리를 굴려가며 글을 쓰고 생각 없이 농사일에 매달려 살아가며 가끔씩 스님들 흉을 보기도 합니다. 훈련소에서 스님과 대화를 나눴던 그런 얘기들 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님 말대로 부처님 말씀을 제대로 행하는 수행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 송성영
부처님 길 따라 진정한 보시 행을 걷고 있는 수행자다운 참수행자들도 많지만 부처님 말씀을 팔아 보시함을 채우는데 급급한 수행자 아닌 수행자들 역시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말하면서 부처님 머리 꼭대기에 앉아 부처와 중생을 둘로 갈라놓고 중생들을 내려다 보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고통 받는 중생들로 가득한데 그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신도들에게 탐.진.치(貪.瞋.痴)를 말하면서 불사를 앞세워 돈을 탐하고 자신들에 대해 조금만 이롭지 못한 말을 하면 벼락 같이 화를 내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입으로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말하고 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보시함만 탐내고 있는 수행자 아닌 수행자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이 어찌 수행자라 말할 수 있으며 불제자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지나쳤다면 그저 중생의 소견이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저 함부로 말을 내뱉는 어리석은 중생일 따름입니다. 새 둥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물까치처럼 앙칼스럽게 짖어대며 살아가는 그저 불쌍한 중생일 따름입니다.

1982년 그날, 연방장에서 뺑뺑이를 도는 순간에도 나는 연병장 한구석에 숨겨 놓았던 먹다만 빵과 아이스크림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온갖 것에 집착하고 살아갑니다. 스님은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시나요?

수 년 전 수소문 끝에 스님이 종종 머물다 간다는 팔봉산 동화사에 찾아 간 적이 있었습니다. 동화사에서 한 스님을 만났는데 용상스님의 사형이라 하더군요. 미처 법명을 알지 못한 그 스님 말로는 용상 스님은 티벳에 거처를 마련해 놓고 한국의 절집에 잠시 머물곤 한다더군요. 떠날 때는 어디로 간다 말없이 훌쩍 훌쩍 떠난다고 하더군요.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살벌했던 군대 훈련병 시절, '중생'들과 함께 하면서 점호시간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발가락을 후비고 있었던 스님의 두려움 없는 평상심을 말입니다. 젊디 젊은 가슴에 '두려움 없는 평상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깊이 새겨 주었던 스님이 보고 싶습니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나요? 중생들을 버리지는 않았겠지요.

태그:#군대, #뺑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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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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