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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작품 <지옥의 링>이 드라마로 만들어질 계획이라고 한다. 1987년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이 작품은 주된 테마인 복싱이 시대에 맞게 종합격투기 K-1으로 바뀌며, 작품의 사실감 등을 위해 일본 K-1의 정상급 파이터가 직접 출연할 거라고도 한다.

이 당시 만화들은 로망이 있었다. 요즘 만화는 그런 로망은 사라지고 자극적인 것만이 남아 안타깝다.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는 지옥의 링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날 수 있어 재미가 있다.

인생에 라이벌이 없으면 얼마나 심심할까. 이현세 만화 하면 전통적인 라이벌인 오혜성과 마동탁이 있지만 이 작품에선 한층 다양한 라이벌들이 등장한다. 혜성과 국상, 엄지와 미애, 동탁과 한수, 노 관장과 채 관장 등이 엮어 가는 이야기들이 흥미를 더해준다.

한 지방 보육원에서 자란 혜성과 엄지는 서로에 대한 정이 각별하다. 그러다 엄지가 양부모를 만나 보육원을 떠나게 되고 소식이 끊긴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된 혜성은 서울로 가 엄지를 찾아내지만 그 옛날 순수했던 엄지가 아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러나 혜성에게 남은 것이라곤 달랑 몸뚱이뿐이다.

그런 그가 빨리 성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권투로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다는 노세체육관 노 관장을 만나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혜성은 권투에 대한 어떠한 소질도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맞아도 버티는 맷집왕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한다.

엄지는 재벌 2세들인 마동탁과 김한수를 오가며 철저하게 성공만을 꿈꾼다. 요즘말로 하면 엄지는 전형적인 된장녀다.

화성그룹 외동딸 미애는 그런 엄지가 못마땅하다. 재산 규모로 보면 보잘 것 없는 엄지가 굴지의 재벌 아들인 마동탁과 사귀는 것도 모자라 남현그룹 한수의 마음까지 빼앗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 미애는 엄지를 질투하며 애써 무시하려 노력한다. 그럴 수록 엄지는 기필코 높은 곳에 올라 미애처럼 자신을 깔보는 사람들을 향해 웃어 주고자 애쓴다.

오강그룹 후계자인 마동탁은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다. 학창시절부터 늘 자신을 앞서 왔던 남현그룹 한수가 그에겐 라이벌이다. 그런 한수가 엄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부터 동탁은 엄지에게 적극적이다. 그에겐 사랑보다 라이벌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강했던 것이다.

노세체육관 노 관장이 배도협, 하국상, 오혜성 등 열심히 선수를 발굴해 놓으면 대왕체육관 채 관장은 낚아채듯 데려가 그들을 챔피언으로 만들어 단물을 빼먹는 야비한 인간으로 나온다. 현실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많다.

혜성의 라이벌은 하국상이다. 혜성이 처음 권투를 배울 때 같이 있었던 국상은 연습을 별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뛰어난 소질을 가졌지만 인간성은 별로다. 그에 비해 혜성은 소질은 없지만 노력파다. 그 둘이 국상의 재기전에서 맞붙는다. 둘은 결코 물러설 수 없다. 이 경기에서 국상은 뛰어난 예전 실력을 선보이며 혜성을 몰아 부치지만 혜성의 집념을 당하지 못한다.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탐욕으로 똘똘 뭉쳐 있다. 노 관장은 자신이 애써 키운 선수들을 라이벌 채 관장에게 빼앗기면서 챔피언을 키운 관장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 소원일 정도로 욕망의 화신으로 변해간다.

“내 손으로 널 챔피언으로 키워 보고 싶은 거지. 나도 챔피언을 키운 관장소리 한 번 듣고 싶었던 거지.”

떠나려는 혜성의 뺨을 때리며 노 관장은 그렇게 소리친다. 노 관장을 배신한 다른 선수들처럼 되지는 않겠다고 약속한 혜성이지만 세계 챔피언이 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사랑하는 엄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는 챔피언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혜성은 눈물을 보이며 이렇게 말한다.

“관장님께서는 절 위해서 모든 걸 바치겠다는 것처럼 누누이 강조해왔지만 결국은 관장님 자신을 위한 노력이었던 겁니다. 이래서 전 조금은 맘을 편히 갖고 떠날 수 있는 겁니다.”

혜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엄지, 네가 기뻐해야 할 사실 하나는 요즘 내가 조금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 내가 그토록 경멸하던 부(富)에….’

엄지는 그토록 열망하던 재벌가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 혜성도 이번 한고비만 넘기면 성공의 길로 들어서지만 그만 지고 만다. 죽어가면서 엄지에게 자신은 남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맷집왕이 아니라 한대씩 맞을 때마다 죽고 싶도록 심한 고통을 느꼈다며 링은 자신에게 있어 지옥이었다는 말을 한다. 엄지는 그런 걸 왜 한다고 덤볐느냐며 울부짖는다. 그 물음에 혜성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엄지는 진짜로 혜성이 왜 그랬는지 몰랐을까?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뺏기는커녕 멀리 차이기만 했다. 처음부터 무모한 것에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작은 행복은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혜성에게 지옥은 그가 싸운 링이었다. 그럼 우리에게 있어 지옥은 어디일까. 무리한 성공만을 쫓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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