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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불이는 잠시 담천의를 바라보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맞네. 나는 자네에게 이 술을 주기 싫네. 이 술은 오직 나만이 마셔야 하는 것이지.”

“그리도 특별한 술이오? 황제라도 되어야 마실 수 있는 술인 모양이오.”

담천의는 말투는 빈정거림이 섞여있었다. 허나 손불이의 눈가에 잠시 잔 경련이 일었을 뿐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했다.

“그거 괜찮은 말이군. 만약 황제가 내 앞에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이 술을 주었을 것이네. 그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에게 먹기를 권했을 것이네. 먹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억지로 처먹였을 걸세.”

“이미 황제라도 된 분 같소.”

더욱 노골적인 비아냥에 갑작스럽게 손불이의 얼굴이 굳어들었다. 일순 전신에서 무세운 기세가 뿜어지며 황촉불이 꺼질 듯 일렁거렸다. 일대종사의 기세를 능가하는 위엄이 전신을 덮고 있었다. 담천의마저도 일순 위축될만한 기세였다.

“나는 지금껏 자네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왔네. 하지만 이제 자네에게 갚을 빚은 없어. 자네는 내 아들을 죽였네.”

빚이란 아마 자신의 부친을 죽인 일을 말하는 것일 게다. 빚이란 무엇일까? 특히 목숨의 빚이란 과연 어떻게 갚아야 옳은 것일까? 부친을 죽인 원수를 아들이 복수한다 해서 빚을 받은 것일까? 사실 목숨의 빚은 갚을 방법이 없다.

“정당한 승부였소.”

“정당한 승부였다고....? 직접 그 아이와 마주쳐 본 자네마저도 그것이 진정으로 정당한 승부였다고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나는 정말 자네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군.”

무슨 말인가? 담천의는 숨이 막혔다. 그 역시 내심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 아이를 능가할 인물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아니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기습을 하더라도 그 아이를 죽일 자는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네.”

손불이는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흥분한 듯 음성이 점차 올라갔지만 그렇다고 냉정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담천의는 반박할 수 없었다. 방백린은 분명 자신보다 위였다. 돌발적인 변화가 없었다면 죽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왜 결정적인 그 순간에 칼날들이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을까? 왜 자신의 검로를 막던 그 염화심력은 별안간 사라져 버렸을까? 어째서 자신의 온몸을 그물처럼 칭칭 감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만들었던 그 기운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귀곡의 그 늙은이가 그런 준비까지 했는지 몰랐지. 백가촌 만으로 끝낸 줄 알았어. 곧 무덤에 들어갈 그 늙은이가 끝까지 내 앞길을 막아선 것이야.”

놀랍게도 손불이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 아이가 죽은 거야. 모두 내 탓이지, 아니... 아니야......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어차피 품에 안을 수 없었던 중원이었다면 그 아이는 평생 쫓기며 살았을 테니까..... 그래서 천하는 하늘이 낸 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반드시 담천의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아마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손불이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누군가 나를 도왔소?”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손가장으로 와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분명 손불이가 말하는 것은 귀곡의 귀진자를 일컬음이다. 귀진자가 자신을 도운 것일까?

“이미 끝난 일이네. 마시게.”

손불이는 죽통에 든 죽엽청주를 담천의 앞에 놓인 잔에 따랐다. 호박색의 술 빛이 찰랑거렸다. 손불이는 죽통을 놓아두고 자신의 잔에는 자기병의 술을 따랐다. 물과 같이 투명한 색이었는데 독한 것인지 주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자네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네. 이 잔은 죽은 내 아들을 위해 마시세.”

손불이는 술잔을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그것은 단숨에 한 잔을 들이키자는 의미. 담천의는 자신이 누구의 도움으로 방백린을 죽였다는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얼떨결에 그 역시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마셔버렸다.

손불이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또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여전히 담천의에게는 죽엽청주요, 자신은 자기병에 든 술이었다.

“두 번째 잔은 죽은 자네의 부친을 위해 마시세. 인간적으로는 나 역시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이었네.”

당신이 죽이고도 그러느냐 따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곧 그 기회는 올 것이었다. 그 역시 아무 말 하지 않고 두 잔 째 비웠다. 잔을 탁자에 놓자마자 또 다시 술을 따랐다.

“세 번째 잔은 자네와 나를 위해서 마시세.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 것이니 이 세상 모든 번뇌를 벗어 던지는 죽음을 위해 마시세나..... 아니 오히려 죽는 자가 아닌 곧 태어날 자네의 아이를 위해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

손불이의 말에 담천의는 급히 물었다. 손불이의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소?”

“그녀는 아주 잘 있네. 이 자리에 불렀으면 좋았겠지만 배속에 든 아이나 산모에게 아주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아 부르지 않았네. 이 자리가 파하면 자네는 물론 그녀를 만날 수 있네.”

“그녀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다면....”

“자넨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려 드는군. 나는 그리 비겁한 사람은 아니네. 그녀가 본 장에 있는 한 그녀는 안전하네. 이미 말했지 않는가? 나는 자네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고 있지 않다고.....”

손불이는 꾸짖듯 말을 뱉으며 다시 잔을 들어 담천의에게 보이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두 사람 간 세 번째 잔이다. 하지만 손가장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손불이의 말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장주가 마시는 술은 주지 않을 요량이오?”

이미 석 잔을 마셨다. 하지만 여전히 손불이의 내심을 알기 어려웠다. 어쩌자는 것인가? 도대체 손불이와 자신은 적인가 아니면 친구인가? 하지만 분명 친구는 아니었다. 그 때였다. 방문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는가?”

담천의에게도 매우 낯익은 목소리였다. 바로 손불이의 친구이자 갈인규의 부친인 괴의 갈유다. 이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일까?

“자네라면 이 친구도 반겨할 것이네.”

문이 열리고 갈유가 들어섰다. 담천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자신의 형제인 갈인규의 부친이다. 부모를 대하듯 공손한 인사에 갈유 역시 정중하게 예를 취한다.

“영주의 과례는 언제나 노부를 당혹해 하는구려. 인규와 같이 있었다고 들었소만....?”

괴의도 역시 가장 궁금한 것은 자식일인 모양이었다.

“의원으로서의 본문을 지키며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소생 역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대인께 입은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고약한 이 친구만큼 영주도 노부 부자와 전생에 악연이 많은 모양이오.”

무슨 의미일까? 갈유가 처연한 눈빛으로 손불이를 바라보자, 손불이가 껄껄 웃었다.

“그만 이 못난 친구를 탓하고 자리에 앉게나. 헌데 이 친구가 부득불 이 술병에 든 술을 마시겠다고 하는구먼.... 핫핫.....”

손불이는 자신의 손에 들린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보기와는 달리 자기병에 든 술은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았다. 그 말에 자리에 앉으면서 갈유가 탄식을 터트렸다.

“영주는 저 술을 마시면 안 되오. 아내를 찾기 위해 만든 독으로 노부의 유일한 친구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영주까지 죽이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소.”

단심(丹心). 갈유가 죽기 전에 아내를 되찾고자 만든 독이었다. 당가에 가서 가주와 승부를 겨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만든 독. 무색무미무취(無色無味無臭)의 해약도 없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허나 갈유는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대신 손불이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들이 왔네. 곧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네.”

“섭장천 말인가?”

“자네 동생 모용화궁도 있네. 아마 구파일방의 떨거지들도 한 시진 이내로 이곳에 당도할 것이네.”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네. 자네가 잠시 지체시켜 주겠나? 구파일방 떨거지들은 어차피 만나지도 못할 테니 상관은 없네.”

“자네는 항상 어려운 일만 시키는군. 정말 고약한 친구야.”

“나는 항상 자네에게 미안했네. 끝까지 자네에게 신세만 지게 되는군.”

“자네의 오장육부는 이미 모두 녹아버렸겠군.”

“아직 견딜 만 하네.”

언뜻 시선이 허공에 엉켜드는 갈유와 손불이의 노안에 물기가 촉촉이 어리는 듯 했다. 갈유는 갑자기 죽엽청주를 자신의 잔에 따라 쭉 들이키더니 밖으로 나갔다. 친구의 죽음을 지켜보기 싫었거나 마지막까지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기 위함인지는 그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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