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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안의 민가들.
ⓒ 이철영
성(城)은 장벽이다. 대포가 발명되어 성벽(城壁)을 무력화 시키기 이전까지 성은 국가, 민족, 지배와 피지배, 야만과 문명의 경계였다. 카프카의 작품 <성>에서 주인공 K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의 주변을 배회하지만 끝내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남도석성을 대하는 느낌도 마찬가지다. 위압적인 돌의 무게, 세월의 무게가 시공을 짓누르며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 성 앞에 서면 어디가 입구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한 번 들어 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할 미궁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일어난다. 하지만 죽음 아니면 아무것도 확정되어 있지 않는 삶에서,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것은 '불확실성'뿐 아니던가.

ⓒ 이철영
성문도 없이, 기묘하게 휘어진 길을 흔들리며 걸어가 본다. 그리고 아주 잠깐 시간은 멈춘다. 그 안에서 갑자기 바닷속 아틀란티스처럼 마을이 솟아 오른다. 21세기, 성의 내부에는 실크로드의 유적처럼, 무너진 성의 잔해이거나 사막 정도가 있어야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데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라니…. 그것도 생생한 연기가 피어 오르는, 살아 있는 굴뚝의 풍경은 되려 생경하다.

낙안읍성 류의 인위적인 민속촌 같다면 모를까, 오히려 비현실적인 분위기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나타나는 아늑한 이미지 때문에 남쪽의 도원경(桃園景)–남도석성(南桃石城)이라 불렀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성내(城內)의 풍경에서 권력, 배타, 지배의 분위기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성안에 숨어 배타하며 지켜야 할 권력도, 막아야 할 왜구도 없어, 웅혼하고 강인한 성(城)의 의미와 정체성은 상실되었다. 사람들은 다만 추운 바람을 막아 주는 비닐하우스 속 같은 안락함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었다.

▲ '남쪽의 도원경' 남도 석성 안에는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이철영
성 안에서 만난 강남석(72)씨는 겨울에 쓸 땔감을 부지런히 쪼개고 있었다. 본인이 나무둥치를 갖다 대면 아들인지 동생인지 모를 사람이 도끼질을 했다. 동네의 옛날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하자 대뜸 자기 집 불난 이야기를 했다. 본인이 살던 집이 전기누전으로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고 했다.

그 뒤 타다 남은 대들보를 경운기에 싣고 농약통 받침으로 썼는데, 비를 맞아 숨어 있던 글씨가 나타났다고 했다. 건륭 39년 청마백양(靑馬白羊)(5월 21일), 곧 영조 50년(1774년)에 씌어진 조선 수군 남도포진(南桃浦鎭) 객사의 상량문이었다. 그는 300년이나 된 유물인 것을 알고서는 농약통 받침으로의 사용을 중지하고 창고에 고이 모셔 놓고 있었다.

▲ 남도석성에서 8대째 살고 있는 강남석씨 옛집에서는 영조 50년(1774년)에 세운 남도포진(南桃浦鎭) 객사의 상량문이 발견됐다.
ⓒ 이철영
남도석성은 조선 세종 20년(1438년) 남도만호(南桃萬戶)가 설치된 뒤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1863년 이곳에 만호로 부임해 왔던 유숙(劉淑)의 부임도(赴任圖) 기록에 의거해 고려 때 쌓은 성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성을 쌓고 여몽연합군에 항전하다 산화해 갔다는 주장이다. 삼국시대부터 여러 마을을 이루고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성의 축조시기는 그 이전으로 소급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서남쪽 바다를 향해 세운 남도석성 남문.
ⓒ 이철영
그러나 그것보다도 진도 사람들에게 배중손 장군의 의미는 작지 않다. 진도 사람들에게는 삼별초의 진도 패전이 그 뒤 오랜 세월에 걸친 유랑과 고통의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삼별초군이 패한 뒤 몽골군은 진도민들을 삼별초 부역자로 몰아 포로와 노예로 잡아 갔다. 그 뒤 고려 조정의 노력으로 일부 사람들이 돌아오기는 했으나 몽골의 말이나 키우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는 1350년 몽골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고려 조정 또한 군사력이 없어 왜구가 번성하게 되자 진도사람들은 정부의 공도정책(空島政策)에 따라 섬을 비우고 영암군 시종으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1409년 영암으로 피난 간 뒤에는 59년 만에 해남으로 옮겼고 다시 28년 뒤 1437년에야 진도사람들은 87년의 기나긴 유랑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 이철영
그들은 3세대가 넘는 오랜 방랑 생활 속에서도 집단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였다. 그리고 오랜 이주의 역사 속에서 경험한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진도'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서, 문화의 보고를 만들어 냈다. 남도석성의 남도만호진은 그 이후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진도민들의 안위를 지키는 든든한 보루로 1894년까지 존속했다.

▲ 남도석성 서문 앞에는 이곳을 거쳐간 만호들을 기려 세운 불망비, 선정비가 남아 있다.
ⓒ 이철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12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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