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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상림공원 내에 있는 연암 박지원 선생 흉상
ⓒ 이영철
200년 전인 1805년 음력 10월20일(양력 11월21일), 이날 조선후기의 대문장가이자 사상가인 연암 박지원(1737∼1805) 선생이 6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는 풍부하고 활달한 필치로 철학과 사상, 과학과 음악, 실용과 논리를 뛰어 넘은 사상서로, 당대의 현실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새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는 진보의 열망을 담았다.

조선 500년 이래 최고의 문장

<열하일기>는 1780년 가을부터 1783년까지 썼다고 짐작되어지는데 당대 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어, 이 책은 1783년에 탈고한 후 100년 동안 금기가 되어야 했다.

연암은 18세기 조선 사회가 겪고 있는 균열과 양반 사대부들의 위선,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간절함을 다양한 문체를 구사해 비판했고, 때로는 우언과 해학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오늘날에도 많은 지혜와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열하일기>에 수록된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서'는 김택영이 "조선 5000년래 최고의 문장"이라고 극찬한 사회에 편견과 금기가 없는 연암의 자유로운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연암은 1786년(정조 10년) 50세 때 처음 벼슬하여 선공감역을 지냈고, 1792년부터 1796년까지 5년 동안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놓았다.

안의삼동을 중심으로 저작하고, 실천에 옮겨

▲ 경남 함양군 안의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 서거 200주년인 10월 21일 오전 국화꽃 한다발만이 쓸쓸히 선생을 기리고 있다.
ⓒ 이영철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초등학교 교정에는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연암이 서울 서소문 근처 야동에서 태어나고, 계동에서 한때 살았지만 그곳에 그의 자취가 없다. 그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장단 송서면도 가볼 수가 없다.

연암은 평생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안의삼동(안의에서 산수가 수려한 곳 명소를 말하는 것으로 경남 함양군 안의면 화림동 계곡과 용추계곡의 심진동, 그리고 지금은 거창군 위천면에 속한 원학동을 말한다)을 중심으로 실천에 옮겨볼 수 있었으며 대표적인 저작의 대부분을 이때에 이뤄 놓았다. 이곳은 한때 우리나라의 정치와 실학, 사상의 중심지여서 많은 문인들이 오고갔다. 연암 선생의 사적비가 이곳에 있는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연암 선생의 서거 200주년(음력 10월20일)인 21일 기자는 연암 선생의 사적비가 있는 안의초등학교 교정을 찾아보았다. 드넓은 하늘아래 쓸쓸히 국화꽃 한다발만 외롭게 선생의 곁에서 가을볕을 쬐고 있었다.

정치적 혼란 속에 개혁과 진보의 꿈이 무뎌지고, 사상이 실종된 오늘날 개혁의 꿈을 '백탑'에 쌓고 간 연암 선생이 마냥 그리워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다시 연암 선생을 꿈꾼다.

덧붙이는 글 | 굿모닝지리산(www.goodj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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