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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농사지은 볏짚으로 새끼줄을 꼬아 곶감도 몇 개 깎아 널었다.
ⓒ 송성영
엊그제 떠난 거 같은데, 네가 미국에 들어 간 지 벌써 두 달이 넘었구나. 건강은 잘 챙기고 있겠지. 네가 거주 하고 있는 일리노이 주립대학 부근에는 한국인들이 꽤 많이들 산다고 하니 걱정은 없다.

9년 넘게 타고 다닌 제 자동차 번호도 여태 못 외우고 있는 우둔한 형은 네가 거기서 뭘 연구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다. 출국 전에 수차례 얘기 해줬던 것 같은데 말이다. 다만 네 전공인 토양미생물에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요즘 나는 눈코 뜰 사이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주 올려야 하는 <오마이뉴스> 연재 기사도 못 올릴 정도였다. 내게 있어서는 올해가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한 원년이고 또 추수철이 아니더냐. 고구마는 몇 줄 남기고 수확했고 들깨에, 한 말도 채 안 되는 쥐눈이콩, 검정콩, 콩나물 콩을 거둬들였고 마늘이며 양파를 심고 요즘은 메주콩 타작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난생 처음 손으로 직접 심은 벼까지 수확했다. 어우리 농사를 지어 겨우 네 가마니를 수확했지만 사랑방 앞에 쌓아둔 쌀가마니를 보고 있노라면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이 절로 실감이 간다.

▲ 사랑방 앞에 쌓아 둔 볏가마
ⓒ 송성영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가 벼 말리는 것을 보고는 오히려 우리보다 더 신기해하는 눈치더라. 저것도 지은 농사라고 혀를 차는 소리도 들리긴 하지만 대체로 기특해들 하시는 것 같더라.

요즘 쌀 수매 문제로 걱정거리를 태산처럼 쌓아 놓고 있는 분들이 듣게 되면 아주 싸가지 없는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철없는 아이처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좋기만 하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수확의 즐거움은 즐거움 아니더냐. 모든 작물을 화학비료나 농약 한 방울 뿌리지 않고 특히 밭작물들은 전혀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몸으로 직접 일군 녀석들이라서 그런가 보다.

저녁 열시가 조금 넘으면 저절로 눈이 감기고 여명이 밝아 올 무렵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시간 나는 대로 지게 지고 산에 올라가 낑낑거리며 부엽토를 끌어 모아 쌀겨와 버무려 섞어 띄움 비료를 만들고, 또 쌀겨와 톱밥, 거기에 효소를 첨가해 따로 닭 사료를 만들고 내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예전에 아버지께서 그러셨듯이 대나무를 이용해 비닐하우스를 한 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미련곰탱이처럼 혼자 하려니 개갈 안 난다. 올 겨울 눈 더미를 견뎌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이 일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 요즘 대나무를 이용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 송성영
너에게 공개편지를 쓰는 이유는 농생물학 박사인 너와 같거나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는 모든 농업 관련 연구가들에게 진즉에 하고픈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씨앗 때문에 올해 배추 농사를 깡그리 망쳤다. 밭도 넉넉하게 생겨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겠다고 4백포기 이상을 심었는데 김장을 담글 만한 배추는 40포기 정도 밖에 나오지 않았다. 배추씨를 직접 받아 심었던 게 큰 화근이던 것 같다.

모종이 자랄 때까지는 별 이상이 없었다. 배추 잎이 점차 커 가면서 배추 아닌 배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녀석들은 잎이 무 줄기처럼 솟아났고 또 어떤 녀석들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더라. 거름은 직접 만든 썩어띄움비료를 사용했고 벌레가 먹기 시작할 무렵에는 농약 대신 천연녹즙 효소를 사용했다. 온갖 쭉정이 배추들 틈에서도 온전하게 잘 자라고 있는 녀석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선 문제는 거름이나 효소에 있는 게 아닌 듯싶다.

결국 문제는 씨앗에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씨를 직접 받아서 심을 때 주변에서 만류했다. 종묘상에서 특수 처리한 배추씨를 심어야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직접 씨를 받아서 심게 되면 수확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었지. 그 충고를 무시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반타작은 하겠지 싶었는데, 사백 포기에 사십 포기 정도라니,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쭉정이가 무성한 배추 밭에서 자본주의의 현실을 엿보기도 한다. 더 이상 씨를 받아 재배할 수 없는 씨앗들은 자본의 희생물이라고 본다. 자본에 거슬리게 되면 온전하게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쭉정이들로 가득한 배추밭처럼 끔찍한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미국과 국제 사회의 관계처럼 말이다.

우리 동네에서 배추 씨앗을 받아 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종묘상을 통해 나온 배추씨를 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 해보았는데 씨앗을 직접 받아서 심는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강원도 어딘가에 토종 배추 씨앗을 파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그냥 뜬소문으로 들었던 얘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씨를 받아 심어왔던 조선 배추 씨는 도대체 조선 팔도 어디에 있는 것일까?

쭉정이 가득한 배추 밭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된다. 정치 경제 생활 문화 전반에 걸쳐 거대 자본, 미국에 잠식당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보고 있는 것만 같더라. 배추도 아니고 무도 아닌 온갖 쭉정이 배추에 잠식당한 나의 배추밭.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본에 잠식당한 한국의 현주소 말이다.

배추씨뿐만 아니라 대부분 씨앗들이 다시 씨를 받아 재차 심을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이 자본이라는 '흉측한 씨앗'에 종속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너도 잘 알겠지만 대한민국의 농업은 거대 자본에 잠식당한 지 이미 오래다. 노인들이 대부분인 농촌. 더 이상 대대손손 씨앗을 받아 생명을 살리는 그런 농업이 아니다. 소규모 농사로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 생명을 살리는 자연농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는 하나 그건 여전히 특별한 경우에 불과할 따름이다.

따지고 보면 내 배추밭을 엉망으로 만들고 우리 농업을 만신창이로 만든 것은 미국이라고 본다. 미국에서 공부한 많은 지식인들이 거기에 편승해 알게 모르게 우리 농업을 망치는데 앞장서 왔다고 본다.

언젠가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농업의 쇠퇴와 지식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터넷에서 '녹색평론 홈페이지'를 찾아가 보니 그 글이 실려 있더구나. 그 글 중 일부를 옮겨 본다.

나는 김종철 선생의 글에 동조하면서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의 이용물인 '조작된 씨앗'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미국에 의해 '조작된 씨앗', 지식인들은 천하의 근본이었던 한국의 농업을 쭉정이로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 겨울 먹을거리 준비 중에 빠질 수 없는 게 말린 애호박이다.
ⓒ 송성영
내가 자급자족의 깃발을 내걸고 미련스럽게 돈도 안 돼는 자연농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는 먹고 먹히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이 아니라 자연에 의지하여 먹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다. 내 가족과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엄격히 따지고 보면 자본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배추 농사나 제대로 하라구? 망쳐도 상관없다.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지 못해 섭섭하지만 우리 식구 겨우내 먹을 만치는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쭉정이 씨앗들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씨앗을 조작한 인간들이 문제지. 비록 쭉정이 씨앗들이지만 녀석들 나름대로 제 역할을 다 했다고 본다.

자본의 관점에서 보면 쭉정이는 그냥 버려야 할 쭉정이에 불과하지만 사실 내겐 쭉정이도 쓸모가 있다. 일찌감치 김장김치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쭉정이들은 배추 국에 배추무침으로 특별대우를 받아가며 요즘 우리 식탁에 자주 오른다.

또 배추도 무도 아닌 것은 닭들에게 환대를 받고 있다. 그것들은 질 좋은 계란으로 변신하고 계분이 되어 마찬가지로 질 좋은 거름이 되고 있다. 우리가 먹을거리로 착취하게 될 땅의 양분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 쭉정이 투성인 배추밭
ⓒ 송성영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생각하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자본은 노름판처럼 끝판에 가서는 한 곳으로 쏠리기 마련이지만 자연 상태에서는 골고루 분배된다.

얼른 내년 배추 심을 시기가 돌아 왔으면 싶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배추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겠느냐. 내년에 풍성하게 자랄 배추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부모 형제나 사회에서 늘 쭉정이처럼 살아온 형에 비하면 너는 분명 든든한 종자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실험실을 애인삼아 밤낮으로 붙어 앉아 가난한 부모 형제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석·박사 모두 이뤄내지 않았더냐. 이번 미국행도 국가에서 보낸 것이니, 이만하면 좋은 종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종자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라고 본다.

미국에서 생활 하는 동안 부디 미국의 자본에 물들지 않았으면 한다. 미국에서는 분명 선진 지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형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부를 축적하는 선진농업기술보다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본래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농법, 그런 연구에 전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너에게서 나는 그걸 배우고 싶다.

<시민의 신문> 연재 김종철 에세이
'농업의 쇠퇴와 지식인' 중에서 일부 발췌

1945년 해방과 함께 식민지의 수탈체제로부터 벗어나서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시된 비교적 성공적인 토지개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대농업이 절름발이가 되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6.25 사변 이후 미국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온 대규모의 식량원조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미국 공법(PL) 480조에 의해서 1955년부터 10여년간 계속된 식량원조는 따져보면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를 위한 효과적인 방식이었지만, 이로 인해서 한국의 자립적 농업기반이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히 훼손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더욱 중대한 문제는 이러한 미국 잉여농산물의 처리방식 속에 사실상 한국과 같은 '종속국'에 대한 미국의 항구적인 지배를 위한 교묘한 정치적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미 공법 480조는, 밀을 비롯한 미국 잉여농산물의 한국 내에서의 판매 수입금 중 80 내지 90%를 한국정부가 이용하게 하였지만, 그것은 거의 전부 국방비, 다시 말해서 미국산 무기를 도입하는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정부는 가만히 앉아서 잉여농산물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군수산업을 보호, 확대하는 손쉬운 방식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더욱이 주목할 것은, 잉여농산물의 판매 수입 중 미국정부가 가져간 10 내지 20%의 수입금은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미국유학 출신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미국유학으로 상징되는 서구 백인 중심의 근대적 교육, 학문, 문화의 세례를 받아온 한국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략 속에서 깊게 세뇌되어왔다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재앙의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농업경시, 농민천시라는 오늘날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한 정신적, 심리적 경향도 그러한 세뇌작용 가운데서 길러졌을 것이라는 것은 그다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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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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