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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노숙자들의 대부로 불리는, 시대의 아웃사이더가 있다.

부산 부활의 집과 도시빈민사회복지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김홍술(49) 목사이다. 지난 14일 부산 동구 수정동 홈리스 사회복지관에서 그를 세 번째 만났다. 겉 인상은 무뚝뚝해 보이고 달변은 아닌데 막힘이나 꾸밈이 없다. 그의 삶은 숱한 우여곡절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한줌의 가식이나 위선을 용인하지 못할 만큼 옹골지고 직설적이다. 서너 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하면서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 따뜻한 밥 한 그릇에 담겨 있는 사랑을 아는가.
ⓒ 박철
"저는 16세 때 개척교회 부흥회에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길로 종교적 신비에 심취하게 되었어요. 한 마디로 열광주의자가 된 것이지요. 당시 미술학도로서 촉망을 받았었는데 미대를 진학하지 않고 신학교에 입문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결심과 기대와는 신학교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더군요.

결국 1년만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 프랜시스의 전기를 읽고 감화를 받아 신약성경만 달랑 들고 세상의 어떤 교회와 성직자의 길도 선택하지 않고 오로지 프랜시스와 같이 예수의 길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족과 교회, 모든 관계를 끊고 전국을 걸어 다니고 탁발 노숙하며 2년 동안을 지냈어요."

청년 시절, 그는 철저한 자기모색의 시련기를 겪는다. 그의 기이한 행적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두 번이나 연기된 입영을 받아들였지만 군대생활도 채우지 못한다. 그는 같은 민족을 주적으로 삼는 대한민국의 법체계에 도저히 동의 할 수 없었다.

1985년 가까스로 신학과정을 마친 그는 이동식 '리어카 집'을 만들어 끌고 서울 평창동을 출발, 11일간의 고행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그는 20대의 방황을 마치고 삶의 현장에 복귀하게 된다. 어떤 동기로 노숙자들과 공동체(부활의 집) 그리고 도시빈민선교를 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 따뜻한 국 국물에 노숙자들의 눈물이 녹아 있다.
ⓒ 박철
"저는 1985년 삼각산을 정리하고 내려올 때, 평생의 배필을 만난다면 나와 동일한 생각과 삶을 살 수 있는 여인이어야 한다고 하던 생각을 떨치게 되었어요. 다만 한 여인의 사랑과 생을 바칠만한 내 모습이 준비되어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었지요. 어떤 직업이나 재산이 아닌 책임적 존재로서 응답할 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에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1986년 봄 벚꽃 필 무렵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알몸 하나 밖에 없는 내게 한 여인이 나타났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해 가을에 결실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말이 은혜이지 인간적으로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인 거죠. 그래도 결과적으로 됐으니 지금 와서 해석하고 고백컨대, 은혜요 도우심이요 인도라는 거지요."

그의 신혼생활은 비참했다. 아내는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요원한 교사 발령 대기 중이었고, 그는 막노동으로 날품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작은 교회를 하나를 개척했다. 낮에는 공사현장을, 밤에는 교회당을 찾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술 취한 부랑인들이 찾아와 예배당에서 묵기 시작한 것이다. 하는 수없이 그들을 위해 작은 거처를 만들어 주었는데 아예 여럿이 떼로 몰려오면서 부터 그 일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부산빈민선교회'라는 간판을 달아 구체적으로 빈민선교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셋방으로 시작했다가 1993년에는 전셋집을 얻어 '부활의 집'이라는 지금의 공동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96년에는 무료급식소를 개소하고 그 이듬해 그간의 사업성과를 인정받아 부산광역시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취득, 법인 사무실로 두게 되었다. 1988년 IMF 한파로 정부가 노숙자 사업을 시행하면서 여러 노숙자 시설들이 들어섰지만, 김홍술 목사가 이끄는 '도시빈민 사회복지선교회'만 정부의 지원 없이 제 길을 걸어왔다. 그간에 약간의 어려움과 시련도 있었지만 '부산홈리스 사회복지관'을 개관하고 '부활의 집'도 매입하게 되었다.

'부활의 집'은 현재 정원이 20명으로 제한되는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으며, '부산홈리스 사회복지관'은 매주 평균 이용 인원이 300∼350명 정도 된다. 그리고 매년 8월 부활의 집 수련회, 10월 노숙자와 합동 추모제, 12월 성탄일은 노숙자와 함께하는 성탄 만찬회 등의 행사와 토론회나 세미나, 성명발표나 기자회견, 노숙자 및 빈민 관련단체와의 연대활동도 틈틈이 같이하고 있다.

ⓒ 박철
김홍술 목사는 타종교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편이다. 이런 그의 행동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사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철저하게 삶의 실천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가 역력하다. 기독교 목사로서 종교의 경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물었다.

"제가 처음 열광적으로 신앙에 사로잡혀 오직 기도와 성령 충만 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때였어요. 주일성수(예를 들어 음식을 사먹지 않거나 탁구장 오락실 출입도 금했음)와 제사음식 등은 철저히 금했지요.

성경 외에 어떤 신학적 이론도 파하고,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 등은 아예 말을 붙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혹 사찰을 구경 할 때면 입구의 '사천왕' 모습이나 대웅전 내의 향내가 어찌나 역하고 거부감이 생기는지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어요.

그런데 1976년 그즈음 신학교에서 마음이 떴고 금정산 골짜기를 자주 찾아 몰래 혼자 금식과 눈물로 보내던 시절이었나 봅니다. 아마 성 프랜시스 전기에 가히 절대적 영향을 받았던 이후로 기억됩니다. 기도하고 내려오다 골짜기 바위틈에 굿하고 남긴 과일, 떡 등을 자연스럽게 먹기 시작했어요.

아무것도 거리낄 수 없는 행동과 생각의 자유로움이 생겨났지요. 어느 누구가 가르쳐 준 것도 배운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그 이후론 유유 자자하게 성당출입(미사참여)이나 법당출입이 자연스러워 졌어요. 어떤 이론이나 근거로 먼저 무장한 것도 아닌 태도의 변화와 만남과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종교에 대한 공부를 한 바는 없어요. 다만 그간 제가 예수를 믿고 따르고 그의 제자가 된 목사 입장에서 예수 이후의 종교화 된 기독교를 말할 수는 있어요. 기본적으로 다른 종교도 기독교의 그것처럼 그 교조를 믿고 따르고 한 이후 종교화의 과정을 겪었다고 봅니다.

ⓒ 박철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그 교조를 통해서 위의 과정을 전수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이 종교사에서 형성된 교리와 교권, 그리고 왜곡된 전통과 전승이라고 보지요. 이러한 가려진 장벽을 걷으면 서로 통하는 '진리의 일체감'을 가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진리체계나 경험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오직 자신만의 유일성을 주장한다면, 가치체계간의 충돌이 불가피 할 것이며 이는 예수나 다른 종교의 교조들도 바라지 않는 바라고 생각합니다. 가치체계간의 경쟁(우월)은 상대를 공격하고 짓누르고 자신만을 높이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고 존경하는 자세와 관계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참된 가치가 승리함(우월 됨)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래 들어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의 여러 가지 추태(?)로 한국 교회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특히 젊은 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한국 교회가 지난 30년 동안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여,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은 소홀히 한 채, 개체교회 성장제일주의라는 자폐증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성을 잃게 된 것은, 기복적이며 내세 지향적인 신앙으로 인해 개인의 영혼구원이 치중함으로써 이 세상의 책임과 공동체적 의무가 약화된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목사의 답변을 들어 보았다.

"크고 어려운 주제이지요. 맘몬주의, 기복주의, 축복주의, 성장주의라고 할까요?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죠. 예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셨잖습니까? 한국 교회의 초대, 아니 제가 처음 믿음의 길에 들어서던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어요. 그때는 부흥물결이 전국에 퍼지고 있을 때였는데, 부흥사들이 맹렬한 설교를 하던 중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하고 청중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하면, 청중은 일심일성으로 '아멘!'하고 화답하곤 했지요.

▲ 2004년 10월 길거리에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영혼을 추모하는 제1회 나자로 추모제
ⓒ 도시빈민선교회
하지만 설교의 주류는 종말론적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희망과 성공보다, (죽어서)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 영광에 목표를 두었지요. 그래서 헌금은 물론 귀금속이나 시계 등을 아낌없이 바치는 일은 저 천국에 누릴 상을 위한 것이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은 전혀 달라졌잖습니까? 오늘 이생에서 복 받고 성공하는 믿음체계로 전환되었지요. 물론 영혼구원은 예수 믿는다는 '입으로의 시인'에 거의 머물고, 대부분의 중심축이 축복과 건강으로 옮겨졌습니다. 전자도 문제지만 후자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성장주의, 규모의 논리, 성공주의인 이 맘몬(돈)이 가증스럽게도 거룩한 곳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여기에서는 이기주의의 온상이 될 뿐 이타주의나 자기 헌신과 희생의 논리는 자리 잡기 어려운 구조가 있습니다. 특히 고난과 자기 비움의 문제는 아예 신앙의 구조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교리주의, 교조주의, 근본주의, 일방주의입니다. 아시다시피 신앙은 주관적 경험이요, 체험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하나 되는 신비의 일체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하지요. 이 경험에서 자신의 생명과 같은 '고백'이 나오고, 이 고백은 경험자가 모두 같지 아니한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결국 이 고백들이 교회라는 공동체 사회에서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합의되어 공동의 고백으로 발전되지요. 많은 시간과 절차가 소요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식적인 고백들은 더 발전되어 교조(교회의 신조)와 교리체계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리와 교조는 신비적 경험의 신앙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교리와 교조가 신앙의 근본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교리주의, 교조주의는 본말이 전도된 논리입니다. 이른바 신앙의 검증은 '하나님 경험'이라는 영적 관계를 동시적으로 포함한 교리체계로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결과물인 교리나 교조로 무장된 교회의 신앙체계는 예수께서 지적한 대로 외식이요, 율법이요, 죽은 것이고, 이것은 근본주의를 낳고 일방주의를 낳지요. 그래서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고, 타자에 대해 판단과 정죄에 밝고, 공격적이고 정복적이에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의 잘못됨을 바꾸려하며, 더 배우려는 자세가 없고 가르치려고만 하며,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며, 상호 눈높이를 맞추려 않고 우월적 권위에 사로잡혀 있어요. 한국교회에는 생명이 충만한 유기체적 신앙, 하나님의 영과 하나 되는 영적 경험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메마른 고목처럼 화석처럼 교리주의와 근본주의만 가득한 형편입니다.

▲ 나자로 추모제에서 김홍술 목사. 부산 역에서.
ⓒ 도시빈민선교회
저는 공동체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게 없어요. 그냥 가정 공동체를 생각해 봅니다. 자본의 논리, 경쟁능력의 논리, 약육강식의 논리가 힘을 쓰지 못하는 공동체 말입니다. 형제 중 국회의원이 있고 세차장 직원이 있다고 해서 가정에서 '의원님'으로 통하겠습니까? 또 500만원 월 수입자 동생이 월 100만원 봉급자 형님을 '형님'이라 존대하지 않으면 가정이 견디겠습니까? 잘 모르지만 공동체란 '개인이 여럿 속에 하나라는 일체감으로 사는 방식이요, 체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양한 개인이 존중받고 존중하는 가운데, 서로 나누고 서로 섬기는 '함께 살이'이에요. 능력에 따라 성실히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간소하게 쓰며 사는 것이지요. 공동체는 고상한 지식이나 의식수준이 있는 자만이 이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거지사회에서도 가능한 일이지요. 마음으로 바탕 한 생활의 문제이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가 좌우하지 않습니다. 저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3년간 가족과 함께 한 지붕 아래서 생활도 해 봤어요. 공동체 생활은 딱히 어떤 유형으로 잡히지 않는 유기체적 삶이라 할 것입니다.

저는 부활의 집 공동체 생활에서 큰 깨달음과 은혜를 느끼고 있어요. 제가 이 분들을 모시고 섬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분들이 제게 구원의 은인으로 와 계신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그 분들에게 제가 은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신앙적 안목으로 보면 그 분들은 살아 함께 사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극히 작은 자로 제게 찾아와 함께 동고동락 해주시는 그분의 은혜가 망극할 따름이지요. 그 분들로 인해 저는 더 깊이 더 생생히 주님을 섬기고 나누게 되었으며, 이 시대의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예수'를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괴로웠던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잘 지내다 간혹 술독에 빠져 온갖 추태와 행패를 부리며 괴롭힐 때라고 생각되는 줄 아십니까? 아님 후원금이 줄어들어 바닥을 긁는 생활로 기약 없이 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니에요. 평소에 못 느끼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비참한 주검으로 내 앞에 나타나, '나를 아버지의 나라에 보내 주세요'하고 황망히 떠나는 날입니다. 끝없는 후회와 가슴 저밈으로 괴로워 밤을 새웁니다. 교회로 영구를 모실 때면 관 옆에서 함께 밤을 지내며 조금이라도 제 스스로가 위로 받고 싶어 합니다.

▲ 2003년 12월 노숙자 성탄 만찬
ⓒ 도시빈민선교회
보람된 일을 묻는 질문에도 그렇습니다. 자립 자활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거나 은혜가 감사하다고 답례로 인사하는 일이 있다고 보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또 이른바 예수 잘 믿고 구원받은 자가 많아서 보람이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구원됨이 유치하게 '믿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나 외관상 열심 있는 '교인됨'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요.

하나님이 당신의 한없는 사랑과 주권의 품에 안으시는 것을 무슨 알량한 기준으로 구원 운운한단 말입니까? 제겐 오히려 우리 형제들이나 후원자들이나 막론하고 진정 하나 됨(일체감)을 맛보는 일이지요. 진정 서로의 자리를 이해하고 받아주고 아픔과 희망도 함께하는 '사랑의 관계'가 설정되는 일이 진정한 보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 보람이 성취될 것을 희망하며 믿고 기다릴 뿐입니다."

그의 말은 막힘이나 거침이 없다. 그의 삶과 내면에서 나오는 자기 고백이다. 김홍술 목사의 수행방법은 독특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고행적 수행방법을 목말라 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더욱 비참하고 비천한데 몰아넣어 그곳에서 견디고 싶어 했던 것이다. 옛날 수행자들처럼 말이다. 그는 1999년부터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고난주간 금식을 그만두고 한 주 동안 노숙자 걸식을 한다. 집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아우성이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을 맨손으로 탁발여행을 보내셨던 이유를 몸으로 경험한다.

"그 집중적인 한 주 동안이 제게 있어 1년을 버틸 수 있는 영적 충전시간인지도 모르지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힘을 얻는 것은 저만의 주님과 동행하는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장시간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가족관계가 궁금했다.

▲ 김홍술 목사. 입을 궂게 다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박철
"가족이라면 아내와 딸 아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고 딸은 고교 2년 아들은 중학 2년입니다. 셋이 가족이지 저는 가족에 끼어주는 정도입니다. 글쎄요,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릴 적엔 뜻 모르고 따라 살았지만 지금쯤은 머리가 커져가기 때문에 생각이 있을 터인데 물어본 적은 없고,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아내로부터 아이들이 (특히 딸이) '아빠는 불쌍하다'는 말을 했다나요. 저는 오히려 공부는 쉬면서 하라고 엄하게 하니까 '우리 아빤 다른 친구들 아빠와 너무 다르다'고 한답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나 종교 등 어떤 가치에 대해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부부애와 신뢰, 존경, 생활태도 등에서나 가치관, 신앙심, 헌신 희생정신 등을 바라보고 영향도 받으며 스스로 창조적으로 형성되어간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저도 아내에게 아이들을 믿어주고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 주자고 권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내는 현실적이어서 공부와 진학에 관심이 있죠. 제 눈치를 보면서 말입니다.

아내가 저를 보는 입장 말입니까? 아내에게 100점 받는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시죠. 아마 50점만 받아도 좋은 남편이 아닐까요? 많은 경우가 그렇듯 결혼 초기에는 두어 번 싸운 적도 있습니다. 아니 저의 일방적인 폭행이었죠. 10여년 지나면서 크게 반성을 했습니다. 점차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서로 그대로 봐 준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아내는 저의 인격은 신뢰해도 성격에 대해선 늘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끝내 해결하고 지나는 성격, 장애물을 보고 돌아가지 못하는 성격, 저돌적이고, 잘 부딪히고, 너무 드러내놓고, 원칙에 너무 밝고, 때로는 안 본 척 못 본 척 눈 감아주지 못하는 성격 등 이루 말로 열거할 수 없군요. 그러나 통장이나 계획적 살림살이는 제게 맡기죠. 자주 못 만나도 정한 용돈만 잘 주면 해결되니까요. 아내는 제가 교회서 받는 30만원의 사례비를 아주 소중하게 여겨줍니다. 아주 가난한 교우들의 헌금에서 받는 것이니 만큼, 자신이 받는 월급을 자신이 스스로 벌었다고 생각조차 못한답니다."


▲ 김 목사가 올 고난주간 노숙여행 중. 부산역을 볼펜으로 그린 것이다.
ⓒ 박철
한해 막바지, 성탄절도 며칠 남지 않았다. 아기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계절이다. 마지막으로 성탄절을 맞아 하고 싶은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무너져가는 교회의 목사 중 한사람으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세상으로부터 돌팔매질이나 안 받는 교회로 세워놔야 할 말이 있겠는데 말입니다. 세상의 빛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닌 정말 거치는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몸인데 말입니다. 죽은 몸, 무덤 속에 있는 몸인가 봅니다. 부활한 몸이 아닌가 봅니다. 부활한 주님의 몸을 찾으려면 갈릴리로 가라 했는데, 갈릴리로 가면 교회는 살아나는데 말입니다. 계획이라고 특별히 있겠습니까마는 더 비우며 낮은 곳으로 작고 가난하게 일하는 법을 배우고 이 배움을 나누고 싶습니다."


노숙자 급식이 시작되었다. 식당 안은 갑자기 왁자한 소리로 가득하다. 김 목사는 사람들을 일일이 확인한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오시는 분들 이름을 하나하나 적는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당신의 나라에 올 사람들을 적는 심정으로 사람 이름을 적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목사이기 전에 내가 만난 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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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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