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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주 화요일(4일)은 장모님 80회 생신이셨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장모님 생일상을 차려드려야 한다고 서울로 떠나고 저만 혼자 집에 남았습니다. 저녁 무렵 장모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맛난 거 많이 잡수셨어요?"
"그래, 많이 먹었네. 박 서방은 저녁밥 먹었는가?"


▲ 나의 장모님, 권채봉 여사
ⓒ 박철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장모님 목소리는 평상시와 똑같았습니다. 늦은 밤 교회 청년들이 찾아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내가 다급해서 뭐라고 외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터진 모양입니다. 내가 몇 번이고 진정하라고 하자 아내가 울먹거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큰일 났어요. 엄마가 지금 쓰러지셔서 혼수상태에요. 어떻게 하면 좋지?"
"집에 누가 있는데?"
"언니네 식구가 와 있어요."
"구급차는 불렀나?"
"예, 엄마 위해서 빨리 기도 좀 해줘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수화기에 대고 우리 어머니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아내는 몇 번이고 "우리 엄마 괜찮겠지?" 라는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열차도 끊겨서 서울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몇 시간 전만해도 음식도 잘 잡숫고 기분 좋게 얘기도 하시던 분이 갑자기 쓰러지시다니, 마음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장모님은 한밤중 119구급차에 실려 K병원 응급실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뇌출혈이 일어나서 쓰러지게 된 것입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고 다음 날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고속철도편으로 서울을 올라갔습니다. 아내로부터 아침에 중환자실에 계신 장모님을 면회했는데 의식이 돌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전화를 열차에서 받고 조금 안심이 되었습니다.

20여 년 전 아내와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 잠실에서 전세방을 얻어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내는 된장찌개 하나 제대로 끓일 줄 모르는 풋내기 가정주부였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로 티격태격 부부싸움이 잦았는데, 나중에는 싸움이 커져서 아내가 처음으로 가방을 들고 친정으로 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날 장모님이 아내와 함께 집으로 오셨습니다.


"박 서방, 내가 자네를 믿고 내 딸을 주었는데 이제 보니 형편없는 사람이구만. 그럴 거라면 일찌감치 갈라서게. 그렇게 하는 것이 두 사람을 위해 좋을 걸세."


나는 장모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두 번 다시 싸우지 않고 잘 살겠다고 너그럽게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장모님은 그제야 안심이 되셨던지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기운이 없으셨던지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싫다고 하시는 장모님을 내 등에 업었습니다. 새털처럼 가벼웠습니다. 당시 장모님은 당신의 막내아들 김의기(80년 5월 광주의 학살극을 목격하고 서울 시민들에게 광주학살의 만행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투신함. 당시 서강대 무역학과 4학년 재학 중)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몸무게가 고작 30kg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장모님을 등에 업고 가면서 속으로 두 번 다시 장모님 속을 썩혀드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 처남 김의기 추모제에서 문익환 목사님과 함께. 서강대학교.
ⓒ 박철
열차는 이내 서울역에 도착했고, 택시를 타고 K병원으로 행했습니다. 중환자실에 계신 장모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까지 말도 하셨다는 장모님은 전혀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담당의사가 하는 말이 갑자기 악화된 듯하니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장모님의 병명은 '지주막하출혈'로 출혈이 일어난 곳이 뇌의 가장 중앙, 깊은 곳이라고 합니다. 의사는 매우 위험한 수술임을 자세히 설명해 주면서 가족들에게 수술동의서를 받았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시는 장모님 머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수술실 앞 복도에는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밤 12시가 넘어 수술이 끝났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수술실에서 나오신 장모님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는데 앞으로 생존여부도 불투명하고 여러 차례 고비가 있는데 장모님은 워낙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기실지 그것이 관건이라고 합니다.

수술 다음날 아침, 중환자실로 장모님 면회를 했는데 장모님의 양손 양발은 결박된 채였습니다. 눈을 뜨셨는데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고, 고통스러운지 온몸을 비트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괴로워했습니다.

벌써 장모님이 수술을 받으신지 5일 째입니다. 아직 큰 차도가 없으십니다. 장모님께 기적 같은 일이 생겨서 다시 의식이 돌아오고 침상에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오늘 아침 아내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여보, 엄마 돌아가시면 나는 누굴 의지하고 살지? 여보, 나 죽으면 땅에 묻지 말고 하장해서 당신이 좋아하는 산에다 뿌려줘요."

장모님의 부재가 아내에게 얼마나 큰 자리인지를 알 것 같습니다.
"자꾸 마음 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지금 나도 마음이 짠해서 견딜 수가 없는데…. 이제 그만 장모님을 하나님께 보내드립시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지난주 새로 나온 저의 산문집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뜨인돌)에 "멍군이요! 그 목소리 다시 듣고 싶습니다"를 장모님께 읽어 드리려고 했는데, 올 봄 작은 집을 구해서 장모님을 부산으로 모셔 오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단 몇 달이라도 우리와 같이 살다가 하나님나라 가셨으면 좋겠는데, 그게 부질없는 욕심일까요?

▲ 광주 민주화 운동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망월동에서.
ⓒ 박철
어젯밤, 아내가 우리 느릿느릿 이야기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엄마, 붕대로 머리를 감고 온통 반창고와 여러 종류의 줄을 주렁주렁 달고 누우신 엄마, 눈을 뜨고 소리가 나면 얼굴을 돌리시지만 알아보시지는 못하시는 엄마, 어디가 불편한지 쉬지 않고 움직여서 머리에 붕대를 앞으로 밀어내시는 엄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 난 아까 부산에 왔어요. 엄마가 정신이 들어 나를 부를 때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하며 울며 울며 내려왔어요. 엄마! 엄마는 강하잖아요. 엄마는 해낼 수 있어요. 꼭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엄마, 힘내세요. 하나님이 엄마와 함께 계시잖아요. 엄마, 힘내세요!"


아내의 간절한 기도대로 장모님이 힘내시고 얼른 일어났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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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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