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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다보면 가끔씩 뜬구름 같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베트남인 완씨는 그런 느낌을 주는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완씨는 아무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궁금해질 정도로 소식이 없다가 가물가물 잊혀질만하면 뜬금 없이 나타나 싱긋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매 주말마다 만나 짧게나마 이 얘기 저 얘기 전하면서 늘 연락이 닿는 사람들보다 더 정이 듬뿍 가는 시골 총각 같은 사람입니다.

▲ 베트남인 완씨(왼쪽)와 아이들을 안고 있는 필자
ⓒ 고기복
완씨를 처음 만났던 것은 저희 집에서 걸어서 10여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공장 근처에서 입니다. 이사한 지 얼마 안됐던 봄날 늦은 저녁 시간에 산책을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눈인사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곳은 공장 바로 옆에 가건물로 지어진 숙소였는데, 비좁은 공간에 완씨와 다른 베트남인 세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숙소 안에는 매일 예불을 드리는지 벽면 모서리에 설치된 받침대 위엔 향불이 있었고, 환풍이 되지 않는 방안은 쾨쾨한 냄새가 배어 있었습니다.

완씨의 말에 의하면 2년 동안 그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기들 방에 놀러 온 한국인은 제가 처음이라 했습니다. 그날 헤어지면서 완씨는 저의 집 약도를 그려주면 놀러온다고 하길래 무심코 약도를 그려주곤 바쁜 일상 속에서 그를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 때, 완씨와 그 친구들이 저희 집을 박카스 한 박스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아서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밀린 월급이 있는데, 나중에 준다고 사장님이 약속했다고 했습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에 한 명만 완씨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뿔뿔이 헤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잊고 지낼만한 여름 어느 날, 운전을 하던 중에 완씨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하는 것 같은데, 뭔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을 묻고 나서야 그가 병원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화를 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저는 일단 경찰에 모 병원에서 베트남 사람이 지갑을 분실했다고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신고를 하였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한 후, 사무실에 돌아와 일을 하고 있는데 숨을 헐떡이며 달려 온 완씨는 지갑을 분실했던 상황에 대해 급한 마음에 몸짓 언어를 섞어가며 설명하다 답답했던지 제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결국 완씨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가서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었습니다. 접수 창구에 있던 간호사가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던 완씨를 부르자, 완씨는 잠깐 지갑을 자신이 앉았던 의자에 놓고 일어섰는데 그 사이 지갑이 없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완씨의 옆자리엔 30대 한국인 남자 한 명만 자리하고 있었는데, 완씨는 그 사람을 지목하며 검사해 달라고 했습니다.

경찰에 전화로 신고한 지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경찰은 그때까지 오지 않았고, 저는 완씨 옆에 있던 한국 사람에게 완씨의 의견을 전했다가, 면박만 당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조사하려면 경찰을 부르라고 큰소리로 저희에게 삿대질을 해댔습니다.

할 수 없이 경찰에 한 시간 전에 전화를 했던 사람임을 밝히고, 빨리 출동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0여분이 지나서 나타난 경찰은 상황에 대해 묻기에 앞서 완씨가 불법체류자인지, 합법체류자인지부터 확인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완씨는 지갑 속에 외국인등록증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 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출동한 경찰이 안면이 있는 터라, 완씨가 합법체류자임을 제가 보장한다고 하자, 그제야 사건 정황을 받아 적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의 조사는 금방 성의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피해자의 말만 믿고 병원에 있는 모든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여 조사할 수도 없고, 특별히 지목된 젊은 사람도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병원 원장이 나서더니, ‘환자들이 불안해 하니 나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한 시간 넘게 지갑을 잃어버린 사실을 병원에서 여러 사람에게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을 때,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던 병원장의 그 말에 완씨는 그만 기가 죽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상황 속에서 저 역시 완씨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경찰에 완씨의 지갑 속에 있던 물품 내역을 분실 신고를 하며 전해준 것뿐이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완씨는 지갑 속에 들어 있던 돈뿐만 아니라, 한국에 와 있던 친구들 연락처,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이주노동자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해외(인도네시아, 필리핀)에서 생활할 때나, 외국인이주노동자 관련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내외국인간의 다툼 혹은 오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이주노동자들과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의 근거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류의 기사를 쓰고 싶습니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 이야기뿐만 아니라,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인 이민자 혹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합니다.

국내 이주노동자 기사는 그동안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며 다뤘던 상담사례들 가운데 문화적 차이로 인해 생겼던 부분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문화 충격과 향수에 대해서도 다루면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가족을 가진 이방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인 이주노동자가 겪는 어려움이나 문화충격에 관해서는 제가 살았던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중심으로 기사를 쓰고자 합니다.

나아가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실무자들이 겪은 이야기도 실어보고 싶습니다. / 고기복 기자
그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연락이 없던 완씨가 올 봄 저희 집에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갖고 왔습니다. 집사람이 입어보니, 맞춘 옷처럼 딱 맞았습니다.

완씨는 저희 집사람의 옷 치수를 예전에 알아둔 적이 있는데, 저희 집사람과 자신의 누이가 같은 치수의 옷을 입는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전하는 완씨의 눈에 물기가 고여 있어 저는 어색함을 감추려 고개를 돌려야 했습니다. 완씨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 가족들이 생각날 때면 저희 집을 찾았나 봅니다.

그날 완씨를 다시 만났을 때, 지갑을 잃어버렸던 일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인지 예전에 억울했던 일은 다 잊었다고 했습니다. 임금체불을 당하며 직장을 옮겨야 했던 일, 지갑을 잃어버리고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던 일 등, 결코 유쾌한 기억들이 아니었을 텐데, 다 잊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완씨의 모습에서 완씨가 지갑을 잃어버렸던 날 읽었던 신문기사에서 본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떠올랐습니다.

이 땅에 외국인이주노동자로 와 있는 완씨와 같은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난쟁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저의 뇌리에 완씨의 말이 떠오릅니다. “베트남하고 한국하고 좋아요. 가까워요!”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난쟁이, 완씨가 앞으로 좋은 기억들을 갖고 한국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 난쟁이-우리 시대의
이주노동자 완씨의 눈물

그곳에서
난쟁이를 보았다.

그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버벅대는 그의 말이 답답했지만,
그가 뭘 전하려고 했는지 달리 신경쓰지 않았다.

숨넘어갈듯 사무실로 달려 온 그는
이 의자 저 의자 두드리며
몸짓 소리하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병원에서
그는 지갑을 잃어 버렸던 것이었다.
그는 외국인이라 그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은
그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 뿐이었다고 했다.

지갑에는
현금 46만원, 베트남 등록증, 외국인 등록증,
그리고 친구들 연락처가 있었다고 했다.

경찰을 불렀지만,
한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았다. 외국인이라고 말하지나 마는 건데...
느그적 거리며 나타난 경찰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면서 곧 가 버렸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원장이라는 사람은
환자들 불안해 하니 나가달라고 했다.

나만 쳐다보며
멀뚱거리는 그의 눈 속에 난쟁이의 울음이 있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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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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