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는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분석과 대안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매주 2차례에 걸쳐 [대안칼럼]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대안연대회의 소속 국내외 학계와 연구소 전문가 18명이 칼럼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4.15 총선과 함께 이라크 내부는 제2의 전쟁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통과된 파병안을 놓고 여야가 또 다시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북대 송기도 교수(중남미 정치)는 이라크 파병을 감행했던 스페인 우파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폭탄테러로 총선에서 패배해 몰락한 사실과 민주주의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스페인의 현주소를 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3월 11일 마드리드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아토차역에서 연쇄폭탄테러로 200여 명의 사망자와 17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후 이를 바스크 분리주의자(ETA)의 소행으로 밀고나가려던 집권여당인 '민중당'(PP)은 사흘 후 있은 총선에서 낙승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회노동당'(PSOE)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선거일 직전 이번 테러의 배후가 알카에다 소행임이 밝혀지고 정부가 사건 정보를 완전히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민심이 급변한 것이다.

왜 스페인군이 이라크에서 살해되어야 하고, 또 스페인 내에서 수백 명의 스페인인이 테러에 희생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정부는 이 사실을 왜 솔직하게 공개하지 못하는지, 스페인 국민들은 쉽게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한 이라크 파병을 강행한 우파 민중당 정권은 그렇게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4월 2일 8년만에 '사회노동당 정부'가 다시 들어섰다.

이라크 파병 강행한 스페인 우파의 몰락

2003년 세계은행 통계에 의하면 국가별 국내총생산(GDP)에서 스페인은 이탈리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 9위를 차지했다. 놀랄 만한 일이다. 1975년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유럽은 피레네(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산맥)에서 끝났다"라는 조롱을 받았던 국가였다.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스페인은 유럽이 아닌 제3세계 국가였다. 포르투갈, 그리스와 함께 유럽 최후진국이었던 스페인이었다. 그런데 파시스트주의자인 프랑코가 죽은 지 30년도 채 안돼 세계 9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음했으며,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다원적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짧은 기간에 스페인이 정치·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될 수 있었을까? 프랑코 총통 사후 스페인의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왜 스페인이 선진국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75년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수아레스 수상의 폭넓고 신속한 정치개혁에 의해 과거와 다른 스페인으로 바뀌어갔다.

특히 과거 프랑코 체제하에서 철저히 탄압 받았던 공산당을 인정하고 선거를 치렀으며,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까딸루냐 지방과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자치를 과감히 인정해주었다.

이에 반발해 국방부 고위관료를 포함한 군 고위 장성들이 사표를 냈다. 그럼에도 정치와 지역에서 '다양성'을 최대한 인정한 신헌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스페인을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바스크의 독립을 주장하는 테러리스트(ETA)들에 의한 테러가 발생하기도 했다.

공산당의 존재나 지방 분권을 국가 분열과 해체로 생각했던 극우세력들은 이러한 변화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982년 2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임 수상 선출투표를 하고 있던 의회를 급습해 의회와 정부 주요요인들을 인질로 잡고, 발레시아와 사라고사 등 주요도시를 점령하고 새로운 강력한 군사정부가 들어섰음을 알렸다.

군부 쿠테타를 막은 스페인 국왕과 언론

스페인은 물론 세계가 경악했다. 40년 동안 지속된 프랑코 총통의 독재가 끝나고 스페인의 봄이 오나 했는데, 다시 겨울로 되돌아가버린 것이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쿠데타라는 돌부리에 채어 넘어져 버렸다.

위기 순간에 스페인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것은 프랑코의 후계자라고 간주됐던 국왕과 언론이었다. 선거를 통한 국민의 동의에 의하지 않은 그 어떤 정부도 인정할 수 없다는 국왕의 강력한 의지천명과 민주 스페인을 옹호하는 <엘빠이스>(El Pais)지 등 언론의 독재권력 저항의지는 쿠데타군의 사기를 꺾어버렸다.

쿠데타 직후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된 국왕의 단호한 태도와 언론인들의 민주주의 수호 저항의지는 풍전등화의 스페인을 구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다. 쿠데타군에 가담했던 군인들은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고, 결국 하루만에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연말에 시행된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350석의 의석 중 202석을 차지한 것이다. 프랑코가 죽은 지 7년만의 일이었다. 아직은 집권하기 이르다는 모든 예상에도 불구하고 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이는 우익 쿠데타에 자극받은 국민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사회노동당에 표를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선 미친 사람 빼고 쿠테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후 사회노동당은 14년 동안 집권했으며 그동안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공고화됐고 정치안정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제 스페인에서는 미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더 이상 폭력에 의한 정권탈취, 즉 쿠데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국가흥망의 갈림길에서 스페인 국민들은 선택을 했고, 그것이 옳은 것이었다는 것을 이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프랑코 총통은 40년간 철권을 휘두르며 '하나의 스페인'을 강조하며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스페인은 분열되어 갔다.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이념과 각 지방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프랑코가 그렇게 원했던 '하나의 스페인'이 만들어졌다.

▲ 송기도 교수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길을 걸으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분출되고 부딪히고 있다. 그리고 이를 두고, 각 집단들은 서로 다른 다양한 해석들을 하고 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선거 승리와 함께 더욱 표면화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우리는 민주적인 국가건설을 위한 정치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쿠데타'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면 이번 4월 총선이 지금까지 우리가 미뤄왔던 결정을 내려야 할 중요한 시간인지도 모른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