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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준 할아버지와 백순기 할머니는 6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면서 지금도 여전히 낮에는 논밭 일을, 밤에는 춘포를 짜오고 있다.
ⓒ 송성영
'콩밭 매는 아낙네'로 유명한 충남 청양, 청양 운곡면 후덕골에 가면 그 이름에 걸맞게 후덕해 뵈는 집이 한 채 있다. 마당 넓고 앞면이 탁 트여 멀리 산자락이 삼삼하게 그려져 있는 이 집 주인은 이상준(77) 할아버지와 백순기(77) 할머니.

어미 소와 함께 갓 태어난 송아지가 살고 있는 외양간 앞에는 민속 박물관에서의 그것들처럼 물레며 베틀이며 길쌈에 필요한 온갖 옛도구들로 가득하다.

이씨 할아버지의 어머니의 어머니 때부터 사용해왔던 도구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순한 전시품이 아니다. 이 모든 도구들을 이 집 안주인과 둘째 며느리가 대를 이어 100년 넘게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그 이름도 생소한 춘포를 짜오고 있다.

흔히 들어 알고 있는 모시도 삼베도 아닌 춘포. 다들 모시나 삼베는 잘 알아도 춘포는 낯설다. 그렇다면 삼베와 모시, 그리고 춘포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수의용이나 행주, 생선을 건조할 때 삼베포로 덮어 사용하기도 하는 삼베. 삼은 대마초로 악용되는 폐단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1976년에 대마 관리법으로 엄격히 규제되고 있다. 따라서 일부 특산지를 제외하고는 그 재배면적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안동 보성 남해 순창 등지의 삼베가 유명하다.

모시는 순백색이고 비단 같은 광택이 나며 여름철 옷감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충청남도 한산은 모시의 주요 재배지. 세모시로 유명한 이곳의 모시를 '한산모시'라 하여 특산품으로 치고 있다.

모시는 껍질을 벗겨내 가늘게 짼 뒤, 이것을 삼아 베틀에 걸고 짜면 되지만 춘포는 여기에 누에고치에 실을 뽑아 모시와 함께 짜는 과정이 더 추가된다. 모시를 씨실로 하고 누에고치에서 뽑아내는 명주실을 날실로 하여 짜는 것이다.

흔히들 춘포를 '여름비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모시옷보다 더 시원하고 가볍고 고우며 질기기까지 하다고 한다.

▲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왕채, 4대째 100년 넘게 사용해 오고 있다.
ⓒ 송성영
한때 이곳 후덕골 온 동네가 물레를 돌리고 베틀 위에 앉아 길쌈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들 고소득이 보장되는 춘포를 짰다. 헌데 지금은 이씨 할아버지네처럼 누에를 기르고 생모시를 직접 재배해 춘포를 제대로 짜는 집안은 거의 없다.

후덕골 춘포는 70년대 이후 값싼 화학섬유의 대량 유통과 청양의 그 유명한 구기자의 유명세에 밀려났다. 구기자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농약 치는 것이 필수처럼 되어 있다. 사람들은 구기자 밭은 물론이고 뽕밭, 모시밭 갈릴 것 없이 죄다 농약을 쳤다.

그런데 뽕이나 모시에게 농약은 독약이었다. 80년대 초반까지 천 평 넘게 구기자 농사를 지었다는 이상준 할아버지는 후덕골에서 춘포가 점차 사라지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로 구기자 농사를 꼽고 있을 정도이다.

춘포는 예나 지금이나 공급이 달려 모시나 삼베보다 비싸다. 예전에는 춘포를 짠다고 하면 금융기관에서 담보 없이 돈을 빌려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침략기에만 해도 춘포 한 필에 쌀 열 말 정도를 받았지만 지금은 백만 원 이상을 받고 있다.

백만 원이면 일반 서민들로서는 엄두도 못낼 아주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다 그만한 값어치를 하고 있다. 춘포 짜는 과정은 모시나 삼베와 크게 다를 바 없어 짜는 시간은 엇비슷하다. 하지만 재료가 모시와 명주 두 가지가 들어가 그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다.

먼저 뽕잎을 따다가 누에를 키워 명주실을 뽑고, 또 모시 껍질을 벗겨 째고, 삼고, 착색하고 무릎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가는 모시를 이어나간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며칠 밤낮을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짜기까지 모든 과정이 완전 수공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그 수고로움에 비하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다(한 사람이 짜는 분량은 1년에 서너필 정도).

ⓒ 송성영
열아홉에 시집와 지금까지 6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오로지 춘포를 짜오고 있는 백순기 할머니. 백씨 할머니는 시집오던 그 해, 남편이 징병에 끌려갔을 때에도 지금처럼 춘포를 짜기 위해 모시를 삼았고 누에를 길러 명주실을 뽑았다.

"시집왔을 때 시댁 살림이 어려웠지유. 점심을 못 먹을 정도로 힘들었시유. 시어머니의 춘포 짜는 솜씨는 정평이 나 근동에서 춘포 잘 짜는 집으로 통했을 정도였는디, 그런 시어머니와 함께 낮에는 농사일을 했고 밤이면 호롱불에 촛불을 밝히고 베틀 앞에 앉았지유."

시어머니는 지난 1998년, 95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베틀 앞을 떠나지 않으셨다. 백순기 할머니 역시 시어머니처럼 그렇게 평생을 춘포를 짜고 있는 것이다.

한창 때, 손발이 척척 잘 맞았던 시어머니와 사나흘이면 춘포 한 필을 거뜬히 짰던 백순기 할머니였지만 지금은 몸이 편치 않아 일년에 서너 필 정도 짜고 있다.

"인저 헛깨비가 다 됐슈, 맴이야 열아홉 청춘이라지만 몸땡이는 파리 근력보다도 못혀유."

백순기 할머니는 몇 해 전 중풍을 앓아 한쪽 팔다리가 거의 마비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의와 한의를 번갈아다니면서 온갖 농사일에 춘포를 짜고 있다. 무엇이 백순기 할머니로 하여금 일손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한 돈벌이 때문일까? 하루 세끼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그 시절에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전통의 맥을 잇고자하는 사명감 때문일까? 이것 또한 아니었다. 아니, 이 모든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시어머니의 시어머니 적부터 춘포를 짜서 하루 세 끼 밥을 먹었고 자식들을 키워 공부시켰고 또 논마지기까지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후덕골에서 가장 잘 사는 부잣집 할머니 소리를 듣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겨운 노동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백순기 할머니에게 있어서 춘포짜기는 딱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먹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생활의 전부가 아닐까?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고단한 삶이 그래왔듯이….

▲ 모시와 명주실을 감는 물레
ⓒ 송성영
춘포짜기뿐만 아니라 천오백 평의 밭에, 열세 마지기의 논농사를 짓고 있는 백순기 할머니 내외는 요즘도 역시 눈코뜰 사이 없이 바쁘다. 세상이 좋아지다보니 이제 어지간한 농사일은 기계가 다 알아서 해준다고는 하지만 일흔 일곱 노부부에겐 분명 벅찬 일이다.

농촌사정 모르는 사람은 일손을 구하면 되질 않는가 하지만 다들 먹고 살 만해서 그런지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다.

"밥 한끼 얻어먹겠다고 몇날 며칠 날품을 팔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는디, 시방은 일손 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녀유. 예나 지금이나 다들 밥 먹고 살기 힘들다며 죽겠다 죽겠다 허는디, 일손을 구할 수 없으니 뭔 조화 속인가 모르겠시유, 사람살이가 살만해진 것인지 세상살이가 더 힘들게 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세상이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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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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