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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19일 아침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더군요. 집으로 가는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도착하는 즉시 잠자리에 빠져들었을 겁니다. 이미 한 일주일 이상 할 일 때문에 수면을 취하지도 못한 상태였지요. 하지만 잠은 얼씬도 못하더군요.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러가기 위해 외출준비를 했습니다. 집 밖으로 나가서 남편과 나는 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거긴 놀이터야" 그러더군요.

영화를 보러 가려면 차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야할텐데 놀이터 쪽을 향해 가니 이상하게 보였겠죠. 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꼭 해야할 일이 있었습니다. 놀이터 옆 건물에서 투표를 하는 것이었지요.

투표만을 하러 한국에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19일 아침에 맞춰 들어온 것은 가능한 투표일에 맞춘 것이 맞습니다. 그리 소문을 낸 것 같지도 않은데, 어머니며 아는 친구들이며 대번에 그러더군요.

"너 투표하러 왔지."

하기사 한국 들어간다고 연락하면서 남편에게 "자, 그럼 만나서 투표하자"라는 인삿말로 전화를 끊었으니, 나름대로의 디데이 였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감추고 아무일 없는 듯 영화표를 끊어놓고, 서점에서 아이의 책을 골라주다가 보니 훌쩍 저녁시간이 되었더군요. 5시경 우리는 각자 알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략의 출구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시켜놓은 밥은 내버려 둔 채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발표까지 확인한 다음에 우리는 식사를 했습니다.

안달을 하는 내게 친구가 고맙게도 한가지 제안을 해주더군요. 핸드폰을 조용한 모드로 해놓으면 자신이 문자 메시지를 넣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이사이 확인을 해보아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는데, 첫 뒤집기를 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승세가 굳어졌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지요.

기뻐하는 남편과 내 옆에서 다른 관객들이 어찌되었냐고 물어보고 다같이 기뻐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뭇 침착한 듯 있던 우리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요. 대통령 당선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했다고 남편이 그러더군요. (남편은 최근에 저와는 다른 한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남편이 대선 때문에 기도까지 했다니 정말 놀랍더군요.

올 한해의 일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지나가면서, 꺼져가는 힘을 되살리기 위해 나선 넥타이 부대들의 후원금 보내기 운동, 거기에 동참하며 가슴 벅찼던 일들, 마음 한편으로 어쩔 수 없이 무너진다 해도 결코 지지를 꺾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보니 꿈만 같더군요.

그런 흥분들이 이제 좀 가라앉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저는 비판적 지지자의 입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 모두의 힘이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대통령은 다행히 아주 좋은 여건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파나 유력 정치가들의 힘을 입지도 않았고, 연대를 통해 힘을 주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연대를 철회했으니 그 부담도 없을 것입니다. 여론이건 재력이건 무엇에서건 주류적인 경향을 물리치고 일어섰으니, 이전의 대통령들 보다 주변환경의 입김에서 해방된 편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대통령보다 국민에 대한 채무가 큰 대통령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대통령은 그야말로 국민이 뽑아준 것이니까요.

지금의 지지를 가지고 교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통한의 눈물을 삼켜야 했던 이회창 후보의 경우는 불행히도 아주 적절한 예입니다. 이제는 다들 잊었을 지 모르지만,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만든 것은 '대쪽'으로 불렸던 참신성과 도덕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온갖 의혹들과 구태의 정치에 대한 답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으로 얻은 중요한 소득이 또 있습니다. 우리 정치계의 주류로 불리던 사람들의 몰락과 주된 경향으로서 무시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구악적 정치 행태들의 붕괴입니다.

국민의 대표로 스스로를 일컫는 사람들이, 사실은 민심을 전혀 읽지도 못했다는 반성이 이제는 더이상 미룰 수 없는 현안이 된 것이죠. 이래야 정치판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현실적 타협론이 설득력을 잃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대선으로 우리 국민은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언론플레이나 일부 여론 주도층들이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대세의 향방을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의 숨은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국민투표의 묘미를 맛보았다고나 할까요?

소위 한국 사회에 뿌리깊이 박힌 가부장제가 경국대전으로 시작한다는 역사 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고래의 전통과 충돌하며 실제로 경국대전이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말기에서였다는 군요. 그만큼 한 사회와 제도가 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멀리가지 않고 우리 현대사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므로, 하루 아침에 새로운 세상이 올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저는 이번 대선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한 대통령의 힘이 아니라, 바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귀족주의를 거부하는 국민들의 힘, 변화를 갈구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의 힘, 그것이 새로운 세상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 시작을 한 것이지요.

이번 대선과 더불어 '오바'라 싶을 만큼 열정을 쏟았습니다. 이제 그 힘을 변해가는 세상에 쏟으렵니다. 더이상은 우리에게 미선이, 효순이와 같은 딸들이 나오지 않게, 더이상 고개숙이고 눈치보는 정부가 되지 않게, 우리의 군경이 국민을 위한 군경이 될 수 있도록 사회에 대한 관심의 끈을 항상 놓지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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