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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을 지나 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하고 있거나 격렬한 구호문이 붙어있지 않을까 생각한 교문 앞은 너무나 조용했다. 바시르의 처남인 우마르 바라자(Umar Baraja)씨로부터 소개를 받아왔지만, 내심 어떻게 학교와 접촉해야 할 지 걱정이 됐다. 자카르타에서 이미 충분히 딱딱한 분위기를 여기저기서 느끼고 온 탓이리라.

거부감을 줄까 하여 교문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웃거리고 있으니 다행히 학생 하나가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취재를 왔다며 관계자를 불러줄 것을 부탁했다. 그 학생이 사무실로 갔다가 나오는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외부인 접견실에 들어와 기다리시라 한다.

학부모나 외부인이 학교를 방문했을 때 대기하는 곳으로 보이는 그곳에서 학생들 몇이 신기한 듯 지나가다 기웃거렸다. 탁자 위에는 호나우두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스포츠 잡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걸 보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이 곳 애들도 별다를 게 없는 인니 청소년들이구나 싶어서다.

다행히 사무실에서 만나보겠다는 사인이 떨어졌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제지를 당했다. 그런 차림으로 왔냐는 물음이었다. 아연 긴장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긴 바지도 입고 왔고, 소매가 있는 반 팔 셔츠를 입었는데.. 혹시 긴 팔 셔츠를 입어야 했던 것일까? 조금 뒤 내게 "질밥(Jilbab)" 안들고 왔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그러고 보니 교문 앞에 '이곳은 질밥 의무착용 지역임'이라는 안내가 붙어있던 게 생각났다.

순간 난감했다. 질밥이란 차도르 또는 부르카로 한국에 알려진 이슬람 여성의 머리덮개를 말하는 인니어다. 이런 경우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질밥 때문에 취재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 빌려주면 쓰겠다고 말했더니 빌릴 만한 데는 없고 학교 앞에 파는 곳이 있으니 사서 착용하라고 한다. 다행이다 싶어 얼른 뛰어갔다.

그곳에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후덕한 스타일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긴 옷으로 덮은 그녀는 내게 질밥을 골라주며 아주 잘 어울린다고 한다. 그 옆에 있던 어린아이는 질밥을 쓴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본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내가 봐도 이상하다. 아주머니가 한마디 덧붙인다.

"아주 좋지 않아요? 그 질밥 앞으로도 계속 해서 쓰고 다니세요. 정말 잘 어울려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소수의 이슬람 여성이 쓰는 질밥을 나더러 계속해서 쓰라고 하다니 역시 신실한 스타일이라고0 생각했다.

다행히 취재허가가 떨어졌고 학교에 관한 이런 저런 설명을 들었다. 알 무크민 학교는 바시르가 1972년에 다른 동료 선생들과 세운 종교학교이다. 이 학교는 총체적인 교육을 통해 이슬람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종교 학교이지만, 공식 교육기관으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영어, 수학, 생물 등의 일반 교육과목도 가르치고 있다.

학교 안에서도 두 계열로 갈라지는데, 종교전문가를 양성하는 과정과 일반 교육을 하는 과정으로 나누어진다. 각 과정은 종교와 일반과목의 비율이 70:30 과 40:60 정도로 학업이 진행된다. 이 학교는 유치원에서부터 아카데미라 할 수 있는 대학과정까지 있지만, 대학 과정은 고등학교에 부설되어 종교선생을 배출하기 위한 목표로 규모가 작고 실질적으로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에 중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원칙으로 하며 하루 24시간 수업뿐만 아니라 과외활동, 종교 특강 등 촘촘히 짜여진 스케줄대로 생활하게 되어있다. 이상과 같은 알 무크민 학교의 특징은 인도네시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교학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규모가 크고 컴퓨터 교육시설까지 갖춘 괜찮은 사설학교 정도이다.

이 학교에는 남학생들뿐만 아니라 여학생들도 다수 수학하고 있으며, 수업과 기숙사 생활은 분리되어 있다. 학생부 활동도 규범에 따라 정해져 있어서 학교 관계자들이 지명해준 학생이나 선생님들이 취재를 도와주었다. 학생들의 분위기는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었고,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는 아주 명랑해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교실 안을 취재하거나 인터뷰에 관해 양해를 구할 때 일반 과목 선생님들은 조금 부드러웠지만, 종교 선생님들의 경우는 수업시간은 공부하는 시간이라며 원칙을 고수해 아주 엄격한 교육을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정숙한 분위기의 종교 학교라는 정도였다.

운동장 한 켠 벽에는 다양한 운동활동 그림과 더불어 도복을 입은 학생의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우리나라 70년대의 조금은 우스꽝스런 계몽벽화 스타일의 그림이었다.

한때 바시르와 더불어 알 무크민 학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때, 바시르가 테러리스트를 양성하는 학교인 듯한 어조로 알 무크민 학교를 언급한 기사들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학교의 내부를 구석구석 묘사해 놓지 않은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이곳이 무슨 테러리스트의 훈련장이라도 갖춘 학교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학교는 너무나 평범한 외관을 갖춘 곳이다.

이 학교를 특징짓게 하는 것은 학교의 교육이념과 곳곳에 씌어 있는 구호들이다. 이 학교의 교육이념은 이슬람 근본을 추구하며 그를 위해 헌신하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이런 원리적인 말이야 이슬람을 경건히 추구해야할 종교학교로서 당연한 것이지도 모르지만, 곳곳에 붙어있는 구호를 보고 있노라면 그 헌신의 실천이란 게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 곳곳에서 발견되는 구호들은 대부분 지하드에 관한 것이다. 사실 지하드라는 말을 우리는 성전이라고만 이해하고 있지만, 그것이 꼭 무력을 동반하는 성전만은 아니라고 한다. 지하드는 어쩌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상에서 온갖 죄악과 유혹과 싸워 이기자는 말과 다를 게 없을 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본인이 이슬람에 정통한 것은 아닌 관계로 무슬림들에게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 취합해서 이해해 본 결과이다.

무슬림들의 생활을 보면 이런 저런 일들에 전투와 승리가 중요한 단어로 보인다. 그게 영적인 전쟁이든, 물적인 전쟁이든 말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옹호자, 혹은 전사라는 뜻의 무자히드들이 모인 단체란 무자히딘 협의회가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단체가 되는 것이다. 즉 지하드라든가 무자히드라는 단어들이 꼭 전쟁시에만 등장할 수 있는 단어들은 아닌 게 되겠다. 언제고 이슬람의 종교적 교리에 어긋나는 것들과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무슬림의 자세를 갖춘 것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그런 의미로 이해하고 보더라도 곳곳에 걸린 지하드의 구호는 너무나 많았고, 그 내용은 암시적이고 은유적이었지만 다분히 과격해 보였다.

"Jihad is our way. Death in the way of Allah is our highest aspiration"과 같은 구호들은 이해의 시각으로 접근한다고 해도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알라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가야할 길이고 그 길을 가는 동안의 희생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내용의 구호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지하드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여학교에서 발견한 대자보 형식의 각종 글들에서도 보여진다. 학생들이 각 반에서 지하드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분히 학문적일 수도 있고, 실질적인 관심일 수도 있는 형태로 수필, 인터넷에 발견한 관련 내용, 단편 소설 등을 써서 게시판을 꾸며 놓았다. 이 곳의 학생들은 지하드를 중요한 화두로 두고서 다양한 공부와 사고를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남학생보다는 여학생들의 경우가 훨씬 밝고 솔직했는데, 머리부터 발까지 덮는 이슬람 복식을 하고도 돈을 많이 버는 장사꾼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둥, 신앙의 전파자(들어본 내용상 기독교의 선교사쯤 되는 것으로 보였다)가 되겠다는 수줍은 친구를 가리키며 "쟤 인터뷰하세요" 하는 것이 맹랑하기도 하고 절로 미소가 고이게 하는 해맑고 밝은 모습이었다.

장난삼아 선물은 어딨냐고 쫓아왔다가 쥐어진 한국 돈에는 너무 신기해하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고 깔깔거리며 돌아서는 것이 한국의 소녀들과도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밝은 아이들도 바시르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는 서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의 다른 활동에 대한 편안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다시 한번 물어보았더니 한 아이가 대답을 한다.

"그분은 너무나 다정한 분이에요."

그제서야 아이들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항상 자상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작은 일 하나하나에 신경 써주고 챙겨주는 바시르에 대해서 아이들은 너도나도 '얼마나 좋은 분인데요' 라는 말을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네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맑았고, 정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감흥에 젖어 선생님에 대한 제자들의 애정을 보여주었다. 그 표정들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문득 바시르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카르타에서 그의 지지자들에게 들은 것처럼, 그의 측근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 좋고 인정 많은 종교선생일 뿐일까? 아니면 그 뒤에 무서운 본색을 감추고 있는 테러리스트일까?

알 무크민 학교를 다녀온 뒤 나는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학교에 무시무시한 구호가 여기저기 붙어있다고 해서 그 학교를 테러리스트 양성학교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것은 80년대 각종 과격한 데모 구호가 붙어있는 우리의 대학교 교정을 보고 정부 전복을 꾀하는 국가 보안 위해자들로 몰아붙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알 무크민 학교의 이런 저런 일반적인 학교 풍경을 더불어 말하지 않고 이 학교의 자극적인 구호들만 인용한다면 사람들은 그 구호에 맞춰 나름대로의 상상을 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경향들이 상당수의 무슬림들이 세계의 언론 보도에 반발하고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한다. 여러 언론 보도를 읽으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결정하고, 그 필요에 의해 알 무크민 학교를 인용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증거로 그 구호를 들이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이러한 경향은 지양되어야 한다. 적어도 알 무크민 학교에서 공개적이거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어떠한 테러 세력 양성이나 훈련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바시르가 테러리스트의 수뇌로 의심을 받을 만한 근거가 전혀 없지도 않다. 모든 말과 구호는 그 사상을 토대로 해서 나오기 마련이다. 우리 운동권과는 또 다른 점, 이슬람 경전과 교리를 원리대로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지향하는가? 그 속에 깔려있는 사상은 무엇인가?

나는 그곳의 여학생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당황스러운 말을 들었다. 그것은 질밥을 팔던 아주머니와 똑같은 말이었다.

"질밥을 쓰니 얼마나 좋아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꼭 쓰세요. 아셨죠?"

명랑하고 밝은 한 평범한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나는 그들의 문화와 규율을 존중하는 뜻에서 그 질밥을 착용한 것이다. 결코 그것이 옳다거나 권장할 만한 일이라는 가치판단을 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어떤 종교를 가졌건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질밥을 쓰는 일은 옳은 일, 앞으로 점점 더 확장되어야 할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학교 운영책임자에게 물어보았다. 질밥은 이슬람 여성들만이 쓰는 게 아니었냐고. 그의 대답은 이슬람 여성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써도 되고 쓰면 좋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런 말을 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그러면서 그가 한 말은
"우리는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들, 상처 주는 사람들에게만 그 고통을 되돌려 준다. 글로 마음을 상하게 하면 글로, 말로 상하게 하면 말로, 물리적으로 상하게 하면 물리적으로, 이것은 음.... 전쟁의 경우까지 확대될 수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예전 하숙집 친구가 생각났다. 금식월을 맞아 금식을 하는 친구들을 배려하는 뜻에서 내 방에서 조용히 식사를 했는데, 이슬람에 신실한 친구가 와서 내게 항의를 했다. 너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단다. 무슨 짓?

"너 돼지고기 햄 먹었지?"
"응."
"그건 우리가 금하는 음식이고 그걸 접하면 우리에게는 죄를 짓게 하는 거야."
"난 너보고 먹으라고 안한다. 혼자서 먹었는데?"
"공용으로 쓰는 접시에 담아 먹었지?"
"그래, 하지만 깨끗이 씻어놨어."
"깨끗이 씻었다고 해도 그 접시는 돼지고기를 접했던 접시야. 우리가 그 접시를 사용하는 건 죄를 짓게 되는 거야."

그녀의 어처구니 없는 주장에 웬만하면 조용히 해결하려 했던 내가 한판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슬람과 관련해 취재를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공통적으로 그들이 한 말은 술 취하는 것 안 좋은 것이고, 이런저런 것 안 좋은 것이니 그 안 좋은 것을 응징하거나 없애기 위해 조처를 취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 조처를 당하는 사람의 종교나 가치관이나 생활관은 그 과정 중에 고려되지 않는다.

모든 종교 분쟁이 그렇겠지만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 게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무엇을 실천하며 사는 지는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생활하는 방식이 가장 옳은 것으로 보고 궁극적으로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적 신념을 실천하는데 거슬리는 행동은 자신들의 신앙행위를 위해하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상처대로 돌려주려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종교와 신념이 그들의 종교와 신념에 교집합이 되는 부분은 어느 정도일까? 결코 완전히 일치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바라보는 세상만이 완전무결하고 궁극적으로 지향할 것이며, 이를 완수하기 위한 죽음을 불사한 희생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배우며 새긴 이들은 어떠한 사람이 될까?

바시르가 테러훈련을 시키거나 배후조종을 안 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인도네시아에서 그런 증거는 발견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전파하고 가르쳐온 종교 교육의 내용이나 신념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게 굳건한 사상적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위험한 불씨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각종 테러와 테러조직과 관련해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바시르. 지금 밝혀지고 있는 대로 바시르의 영향을 받은 암로지나 그의 형제들, 친구들이 발리테러의 범인이 사실이라면 폭탄테러 장소로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남녀가 비정상적인 성관계나 애정행각의 근원지가 된 나이트 클럽이 선택된 것도 우연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종교의 가르침에 벗어나 있는 것들을 없애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들에게는 그 테러가 옳은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바시르와 관련된 취재를 마치면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생각났다. 바시르가 테러 배후라는 명확한 증거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바시르가 결백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해답이 없는 화두를 안은 채 알 무크민 학교를 빠져나왔다. 3시간이 넘게 뒤집어쓰고 있던 질밥을 벗자 머리가 온통 후끈거리며 두통이 왔다. 더위가 두통을 가져온 것일까? 아니면, 답이 없는 질문이 두통을 가져온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동시 송고합니다.


이번의 두 연재 기사는 KBS "세계는 지금"의 발리 테러 이후 한달의 취재를 도우면서 얻게 된 정보들로 작성한 것입니다. 본인의 정신없음과 게으름으로 인해서 사진기를 챙겨가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해당프로를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취재를 시작할 때 세계 언론의 이슬람에 대한 편파적 시각에서 좀 벗어나 접근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편파적 시각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취재 시작 때보다 훨씬 회의적인 시각으로 이슬람 급진주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급진주의의 발달에 미국이나 동조세력들의 잘못도 없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슬람 급진주의 만큼이나 위험한 유대교의 시오니즘,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아집등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슬람에 대해 개탄하다가 나중에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다를 거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는 중동땅의 유일신 신앙이란 것이 결국 나와는 다른 '타자'를 배척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차라리 힌두교나 불교가 낫겠다라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얼마전 카스트가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사람을 죽이고 박해하는 인도사정에 관한 기사를 읽었을 때, 원래 불교에서는 신이란 없다고 했다는데(어느 분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국의 불교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잡음과 신앙행태를 볼 때 결국은 어느 종교 탓할 게 아니라 그걸 믿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어디까지가 신의 계시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의 자의적 해석일까요?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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