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는 우리 어머니를 존경한다. 내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는 장사를 하는 외할머니 아래서 맏딸로 동생들을 챙기며 자랐다. 우리 어머니가 영재가 아니기는 했지만, 남녀차별이 심했던 외할머니는 아들들은 어떻게든 대학을 보내도 어머니까지 애써 대학을 보내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결혼해서는 수시로 각종 사업을 벌이는 아버지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잘 사는 친정의 눈총을 받았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우리 어머니에게 특별히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저렇게 살지 않는다.'

나는 기질적으로 노는 걸 좋아하고, 인생을 편히 사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어머니는 공부를 못하는 것에는 화를 내지 않았으나, 내가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어놓는 건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항상 생존능력과 사회성을 강조하셨는데, 그래야 살면서 여자라고 치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용돈을 좀 많이 달라고 떼를 썼다가, "왜 내가 너한테 돈을 줘야만 하는데? 나는 너한테 돈줘야만 한다고 법조문에 실려 있냐?"라는 소리를 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야만 했다.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라 나는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고 여러 보살핌을 받는 대신에 그에 응당한 노력과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가차없는 제재 조치가 무서운 나는 눈치껏 어머니에게 은총을 부탁해야 했다.

나에게는 가혹하면서 아버지는 상대적으로 풀어주는 어머니에게 너무나 화가 나 따진 적이 있었다. 왜 그런 뻔히 돈 들이붓는 데다 돈 쓰는 걸 내버려 두냐고.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 왈, "내 돈 가지고 내가 쓰겠다는데 니가 웬 상관이냐?"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어머니가 번 돈이지. 각자 선택은 자유고, 그 선택은 각자가 책임질 일이다. 내가 자식이라고 감놔라 배놔라 할 권리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 어머니가 가혹한 사람이기만 했냐면, 아니다. 나에게 해준 것이 안 해준 것보다 훨씬 많았다. 다만, 우리 어머니가 강조한 것은 당연히 해주어야 하는 일이라서 해준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경계선이 분명해서 그렇지, 우리 어머니는 날 많이 챙겨주는 분이었다.

내가 대학에 갈 때, 사실 나는 타향에서의 재수생활로 지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고향의 웬만한 대학에 가서 나중에 취직자리 어렵지 않은 과를 선택해 다니고 싶었다. 나는 내심 놀기에도 딱 좋은 위치고, 분위기도 좋은 학교를 찍어놓고 원서를 쓰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나는 정말 쉬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봐도 니가 고향에 가서 학교를 다니면, 할머니가 널 잘 돌봐 줄 거고, 고생도 안 할 거고, 편하기도 할 게다. 나도 니 걱정을 좀 덜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이다. 니가 그렇게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면, 너는 아마 넓은 세상을 볼 기회가 없을 거다. 아마 그냥 흔히 그러듯 편히 살 수야 있을지 몰라도. 아직은 니 미래에 대해 좀더 생각해야 하지 않겠니?" 결국 나는 어머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어머니는 과를 선택할 때도 주의할 점을 가르쳐주셨다. "넌 여자고 네가 가는 학교도 일류는 아니니까. 가능하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과로 골라라. 뭐든지 처음 시작하는 것은 경쟁이 덜한 법이다. 그리고, 남들이 안하는 걸 해야 앞으로 진출하기가 쉽다. 또 향후 발전가능성을 생각해라." 그런 점들을 고려해 나는 인도네시아를 선택했다.

어머니의 선택은 옳았다. 인도네시아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어서 심한 경쟁이나 차별에 시달리지 않았고, 지역학도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데다 시작인 편이라 좀더 유리하게 발을 뻗어나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는 충분한 가능성의 나라였다.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인도네시아로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그것도 어머니의 선택이었다. 당시는 어학연수 다녀온 아이들이 많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왕에 어학연수를 다녀오면 더 많은 기회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셨다. 그것도 옳았다. 나는 연수를 다녀와서 통역 같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고, 모든 기회에 응시할 수 있었던 바탕이 연수경험이었다.

다소 뜬구름 같은 학문인 지역학. 방향도, 진로도, 공부 범위도 막연한 이 공부를 하면서 고민도 많았다. 공부라는 걸 계속해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고민을 할 때, 어머니가 말했다.

"35살까지는 무엇이 되었든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좋다. 젊어서 꿈을 펴보지 못하고, 벌써부터 시들어 살 필요는 없다. 한번 해봐라. 하지만, 35살이 넘으면 이제 니 나머지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 35살 부터 한 40살까지 무엇이든 바닥부터 배우고 애써 노력하면 먹고 사는 데는 크게 문제 없다. 그 이후에 고단한 삶을 살면, 사람이 초라해 보인다. 그러니 35살까지는 니 꿈을 위해 살아보고, 안되면 무엇이든 열심히 해서 생활인이 되어라."

지역학을 공부하기 위한 본격적인 진학을 하기 전, 나는 한 달 정도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일했다. 거기서 일한 이유는 만약에 공부하다 아무 것도 안 되면 어떻게 살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한번 나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와 여름 해변에서 장사를 하거나 식당일을 도운 적은 있지만, 이미 오랫동안 힘든 일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면 만족할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였다.

그 한 달 간의 일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힘들긴 했지만, 나는 그렇게 일을 하는 것도 적성에 맞았다.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내가 그 일을 즐기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나는 정신적으로 시달리면, 백화점 판매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했다.

거기서 또 하나 얻은 것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에 대한 자극이었다. 한 달 동안 내 저녁시간들을 거의 모두 투자해 번 돈이 당시 통역으로 아르바이트 나가서 하루 일당으로 받는 돈과 큰 차이가 없었다. 세상에 돈번다는 게 참 쉽지 않구나. 시간당 받은 임금은 노동의 대가에 비해 참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애들은 대부분 고등학생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는 정말 이놈의 공부 때려치우고 말겠다는 생각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립을 해야 했던 나는 학원 선생 노릇을 해가며, 내 능력에 벅찬 수업을 듣기 위해 사흘밤낮을 새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던 그 생활이 끔찍했다. '힘들게 돈벌어 왜 대학원 생활에 다 퍼붓고 있나?'란 생각을 자주 했다. 기회가 되면 취직을 하겠다며, 돈없이 공부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대학원 첫학기부터 지쳐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또 어머니의 말이 들어맞는 일이 생겼다. 우리 어머니는 '놀아도 도서관에서 놀아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도서관에서 놀다보면 책 들여다볼 때가 있다나? 그러다 보면 공부도 하게 된다는. 학교에서 우연히 국비유학생 모집공고를 보고 응시했다가 놀랍게도 정말 선발이 된 것이다. 국제화의 바람 덕분이기도 했지만, 내가 대학원에 다녔으니 그런 기회도 잡은 것이다.

이제 이곳 유학생활도 마무리해야 하는 지금, 지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내 나름대로 길을 만들어보겠다고 난리를 치다가 나가떨어져 버린 것이 대충 1년 전이다. 이런저런 잡다한 고민거리들과 더불어 내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지역학이라는 이 불투명한 학문을 가지고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이제라도 다른 진로를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굳히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여태 한 것이 너무 아깝다. 한번 나름대로 뚫어보자. 아직도 첩첩산중의 장애물들과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 35살까지만. 그때까지는 여하간의 '성공'을 위해서 꿈을 가져보자. 그리고, 그때도 안된다면 미련없이 생활인으로 돌아가겠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아직도 계속 가고 있고, 어떻게 한번 잘해볼까 머리를 굴린다.

어머니는 나의 삶의 방향을 이렇게 이끌어주셨다. 우리 어머니는 똑똑한 사람이라기보다는 현명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내게 현명한 사람의 가치를 보여주셨다. 우리 어머니도 물론 모든 걸 다 잘 하시진 않는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존경스럽다.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처럼 살지 않도록 해주셨다. 내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 딸을 위해 어머니처럼 노력할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