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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역행(務實力行)의 재등장

무실역행(務實力行)은 실사구시(實事求是) 못지 않게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표어'이자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뚜렷한 주목을 받아오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무실역행이라는 표어와 그 운동의 창시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과 무실역행 개념을 유지해 온 흥사단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아직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 도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흥사단 운동에의 참여가 활발해 지면 무실역행의 개념과 그 실천의 문제는 다시 한번 중요한 '현상'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봅니다. 이 글은 그런 새 현상을 예측하면서, 혹은 그 시기를 조금 더 앞당기고 싶어서 마련한 것이기도 합니다.

'무실역행'은 1913년 5월 13일 안창호 선생이 메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興士團)의 표어로 한국사의 전면에 재등장했습니다. '재등장'이라는 말을 쓴 것은 무실(務實)이라는 말을 쓴 것이 도산이 처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록에 관한 한 도산 이전에 그 표현을 쓴 것은 율곡 이이입니다. 37세 되던 해 율곡은 갓 스무살이 넘은 선조에게 치인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가(賜暇)를 얻어 당시 성동구 옥수동 강가에 마련된 독서당에서 쓴 책이었으므로 동호(東胡)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 성품은 착했지만 배움에 소극적이고 의사결정에는 우유부단했던 선조를 배려해서 묻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해서 문답(問答)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동호문답>의 일곱 번째 장(章)의 이름이 바로 "무실위수기지요(務實爲修己之要)"입니다. "무실(務實)로써 수기(修己)의 요체를 삼는다"는 뜻이겠습니다. 그 밖의 다른 문헌에는 무실(務實)이라는 표현이 다시 나오지 않다가 도산 선생의 흥사단 덕목에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물론 도산은 저술이나 연설을 통해 그가 율곡 선생의 표현을 빌어왔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율곡을 인용하거나 언급한 적조차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곡과 도산은 서로 독자적으로 무실(務實)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도산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점은 나중에 다시 보겠습니다.)

하지만 도산이 율곡의 책을 읽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1878년 생인 도산은 6세부터 가정에서 한문공부를 시작했고, 8세부터는 한문 서당에 다니면서 본격적인 한문공부를 했습니다. 그가 서울로 올라와 구세학당(救世學堂, 일명 언더우드학당 혹은 元杜宇學校)에서 본격적으로 서양식 공부를 시작한 16세까지 한문공부가 계속되었을 것으로 본다면 적어도 7-8년 이상 한문을 공부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천자문>과 <동몽선습>은 물론 <소학>과 <격몽요결> 정도는 반드시 공부했을 것인데, 우선 <격몽요결>이 바로 율곡이 지은 책입니다.

물론 <격몽요결>에는 무실(務實)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점에 관해서는 제가 애용하는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 실수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무실(務實)이라는 표현이 <격몽요결>에 처음 사용됐다고 했습니다만, <격몽요결>에는 그 구절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율곡의 다른 저서인 <동호문답>에 그 구절이 나옵니다. 신속한 교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격몽요결>에 이끌려 도산이 율곡의 다른 책들을 읽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동호문답>이 도산의 독서 목록에 끼었을 것이고, 율곡의 무실(務實)이라는 표현이 도산에게 좀 더 직접적인 형태로 전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책을 통해서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무실(務實)이라는 독립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처했던 시대 특성과 그에 능동적으로 대응했던 두 사람의 사상과 활동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율곡(栗谷)과 도산(島山)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율곡은 명문가문에서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되는 사임당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는 어린시절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이'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그의 별명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서 모두 장원급제를 했습니다. 아마 오늘날로 치면 치면 세 가지 고시(考試)에 수석합격을 한 것이지요. 그의 천재성은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이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학문 습득에만 탁월했던 것이 아니라 성격이 호방하고 언변이 좋았으며,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에도 솜씨가 좋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산의 출신 배경은 율곡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빈농 선비의 집에서 태어난 도산은 율곡에 비해 출신이 뛰어나지 못했고 가난했던 때문에 어려서 학문에 전념할 기회는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18세에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 조교로 발탁되어 학생을 가르친 일로 보아 그 역시 학문에 탁월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도산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의 활약을 보면 그의 활달한 성격과 능숙한 웅변술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도산이 19세이던 1897년 도산은 평양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발기해 모임을 주도했습니다. 그해 여름, 평양감사 조민희 등 수백명이 운집한 평양 쾌재정에서 행한 그의 만민공동회 연설은 평양은 물론 조선반도와 후일에는 만주와 미주지역에까지 유명해질 만큼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율곡은 자기가 살았던 시기를 중쇠기(中衰期)로 인식했습니다. 조선은 창업기(創業期)와 수성기(守成期)를 지나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라는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정치의 요체는 때를 아는 것(政貴知時)"이며 때를 놓치면 국난을 맞게 된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시기를 위기의 시기요 개혁의 시기라고 본 것은 도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6세의 나이에 조선 땅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제멋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면서 나라의 개혁이 절실함을 인식했고 일제의 강점을 전후로 해서는 주권국가를 수립하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율곡은 중쇠기를 맞은 조선을 경장시킬 주체로 '선비'를 꼽았습니다. 그는 <동호문답>에서 선비를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속유(俗儒)는 말 그대로 '속된 선비'로서 글을 배워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는 선비를 가리킵니다. 부유(腐儒)는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머무르지 않고 제 학식과 관직을 이용해서 백성에게 고통을 가하는 탐관오리들을 가리킨다고 보겠습니다.

반면에 '진짜 선비'인 진유(眞儒)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힘쓰는 선비라고 했습니다. 대학 서장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를 연상하게 하는 말입니다. 또 관직에 나아가서는 경세(經世)와 안민(安民)에 힘쓰고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진유의 할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진유(眞儒)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닦아야(修己)'하는데, 이러한 '수기'를 이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무실(務實)'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율곡이 자신의 저서 <동호문답>에서 "무실(務實)로써 수기(修己)의 요체를 삼아야 한다(務實爲修己之要)"고 강조했던 까닭입니다.

사회개혁에서 선비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도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1913년 메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국민운동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의 이름이 바로 흥사단(興士團)입니다. 그대로 풀면 '선비를 일으키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흥사단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정리돼 있습니다.

"본 단의 목적은 무실 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덕, 체, 지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

덕체지(德體智)의 삼육(三育)을 함께 닦아 나갈 이 새로운 형태의 '선비'들의 생명이 바로 무실역행(務實力行)이라고 했습니다.

도산이 '무실역행하는 선비' 양성에 역점을 둔 점은 흥사단(興士團)의 상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택한 데에도 잘 나타납니다. 머리를 위로 한 채 작은 꼬리날개를 쭈욱 펴고 두 큰 날개를 한껏 넓게 벌린 기러기의 모습은 영락없이 '선비 사(士)'와 꼭 같습니다.

출신과 배움의 양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던 율곡(栗谷)과 도산(島山)은 그들의 생애(生涯)를 통해서 적지 않은 공통점을 보였습니다. 전혀 다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 속에서 살았지만 두 사람은 자기 시대를 경장(更張)과 개혁(改革)의 시기라고 보았던 점에서 일치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장과 개혁을 위해서 선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제대로 된 선비가 갖추어야할 일차적인 조건으로 무실(務實)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공통됩니다.

다음 글에서는 주로 도산의 무실이 어떤 내용이었으며 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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