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는 말을 살펴보면 기가 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강준만 교수가 '급진'이니 '좌파'같은 말의 '이념적 인플레이션'을 지적하면서 한국일보에 쓴 칼럼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국의 '본격 합리주의자'로 평가하고 싶은 분답게 아주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그런데 사실 한국 사회에서 유통되는 말들의 '기막힘'은 이념적 인플레이션을 겪는 말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냥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도 '기막힌 말'이 아주 많다. 첫 글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미국(美國)'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딴지 좀 걸어 보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너나없이 '유에스에이(U.S.A.)'를 '미국'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한자까지 괄호에 넣어서 '미국(美國)'이라고 쓰는가 하면, 그냥 한자로만 '美'라고 쓰고 그것을 '미국'이라고 알아먹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건 참 낯뜨거운 일이다. '상식'과 '합리'와 '객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려는 사람들, 게다가 '주체성을 좀 살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그런 이름을 버젓이 쓰고 있다는 것은 남부끄러운 일이다. 왜 그런 이름을 쓰게 됐는지 잠시만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왜 한국 사람들은 '유에스에이'를 '미국'이라고 부르는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중국말을 베꼈기 때문이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는 중국말로 '메이리지안 헤쫑꿔'(美利堅合衆國)로 번역된다. 헤쫑꿔(合衆國)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united states)'의 뜻을 옮긴 말이고 메이리지안(美利堅)은 '어메리칸(American)'의 소리를 빌려온 말이다. '美利堅'을 사성과 함께 중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중국말치고는 '어메리칸'에 비교적 근사해진다.

'메이리지안(美利堅)'이라는 중국식 음차어에는 어메리칸(American)'의 '어(A-)'에 해당하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그건 큰 문제가 안 된다. 'American'의 'A-'는 강한 발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있는 둥 마는 둥 살짝 붙여주는 약하고 짧은 모음이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어메리카'를 음차할 때 아예 'A'를 빼버렸다.

'A-' 발음을 빼도 음차어를 만드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그 다음 소리 '미음(엠(m))'이 양순음이기 때문이다. '메이(美[mei])'를 발음하려면 두 입술을 붙였다가 짧은 동안이나마 '엄'하는 소리를 내게 된다. 이 순간적인 '엄'소리 때문에 '메이리지안(美利堅)'만 가지고도 'American'을 비교적 원음에 가깝게 음차할 수 있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의 줄인 이름 '유에스에이'는 중국말로 '메이꿔(美國)로 번역됐다. '메이리지안헤쫑꿔'(美利堅合衆國)의 첫 글자 '메이(美)'와 마지막 글자 '꿔(國)'를 딴 말이다. 이게 바로 중국 사람들이 '유에스에이'를 '美國'이라고 쓰고 '메이꿔'라고 읽는 사연이다.

내친 김에 일본 사람들은 어째서 '유에스에이'를 米國이라고 쓰고 '베이고꾸'라고 읽는지도 한번 살펴보자.

일본 사람들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어메리카'(United States of America)를 카다카나와 한자를 섞어서 'アメリカ合衆國'라고 번역하거나, 아니면 한자로만 '亞米利加合衆國'이라고 쓴다. 어느 경우나 발음은 '아메리카 가슈우고꾸'이다. 일본사람들은 중국사람들과 달리 'アメリカ(亞米利加)'의 첫 음절인 약모음 'ア(亞)'를 음차에 집어넣었다.

일본 사람들도 '아메리카 가슈우고쿠'의 줄임말을 만들었다. '유에스에이'는 일본말로 米國이라고 쓰고 '베이고꾸'라고 읽힌다. 끝 글자 '고꾸(國)'를 뽑은 것은 중국과 같다. 그런데 중국과는 달리 두 번째 글자 '메(メ, 米)'를 뽑았다.

어째서 두 번째 글자인가? 아무래도 약모음인 'A-' 발음을 대표소리 값으로 쓰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게다가, 첫 글자 아(亞)를 고집했다면 혼동을 주었을 것이다. 아(亞)는 아시아(Asia)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국(亞國)'이라고 하면 '아시아의 나라'가 되어 버린다. 서양 나라인 '유에스에이'를 가리키기에는 적절하지가 않다.

그게 바로 일본 사람들이 유에스에이를 '米國'이라고 쓰고 '베이고꾸'라고 읽는 사연이다.('메'가 '베이'로 발음이 바뀌는 현상에 대한 설명은 이 글과 직접 관계가 없으므로 생략한다.)

중국과 일본의 '유에스에이' 번역어와 그 발음은 사뭇 다르지만 그런 번역어를 만들어낸 과정에 공통점이 있다. 제 나라 말의 음운론과 어휘론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서 음차와 번역의 방법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그럼 한국 사람들이 '유에스에이'를 '미국'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미국'이라는 말을 만드는 데에도 한국말과 글의 특성이 잘 고려되었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중국식 번역어 '美國'을 들여다가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었을 뿐이다.

중국 사람들이 '아름다울 미(美)'자를 쓴 것은 'America'의 '메'소리를 음차하기 위해서다. 일본 사람들이 '쌀 미(米)'자를 쓴 이유도 그것이 '메'라는 발음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미(美)자를 쓰게 된 데에는 아무런 국어학적인 이유가 없다.

사실 한국어는 정확한 음차어를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표음문자라는 점에서 중국어보다 낫고, 모음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일본어보다 더 낫다. 실제로 '어메리카'라는 한국식 음차어는 'アメリカ'라는 일본식 음차어나 '美利堅'이라는 중국식 음차어보다 훨씬 더 원음에 가깝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한국말과 글의 특성을 살린 번역어를 만들기보다는 그냥 중국 사람들이 만든 음차어를 들여다가 제 식으로 읽는 데에 만족하고 있다. 마치 고도리에 오광에 양단에 피박까지 씌울 수 있는 패를 들고서 그저 면피용으로만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몰랐을 때에는 그랬다고 치자. 이젠 좀 고쳤으면 좋겠다. 아니, 반드시 고쳐야 한다.

'유에스에이'가 올림픽 금메달 한두 개를 채갔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나라 정부가 억지로 고물 비행기를 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홧김에 해보는 말만도 아니다. 이건 제 나라 말과 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느냐의 문제, 얼마나 주체성을 가지고서 남을 대하느냐의 문제이다.

미국(美國)이라는 말을 여전히 쓰고 있다는 점에서는 말글살이에 주체성이 없기는 남한이나 북조선이나 매한가지이다. '주체성'에 대해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북한 동포들마저 '미제(美帝)'라는 말을 아직도 쓰지 않는가. 한국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힌 중화 사대주의의 잔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제 '미국(美國)'이라는 말 좀 그만 쓰자고 제안한다. 그대신 한국말 특성에 맞는 적절한 이름을 새로 만들어 쓰도록 하자.

강준만 교수도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말들은 "오른쪽으로 한두 칸씩 옮겨 주어야"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과 함께 실천이 아주 중요하다는 지적일 것이다.

먼저 말 꺼낸 사람으로서 '유에스에이'의 새 번역어로 '메국'을 제안한다.

'America'의 가장 근사한 한국어 음차어가 '어메리카'이다. 어차피 '국(國)'은 '나라'라는 말이니 뜻을 옮긴 말로 그냥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유에스에이'는 '어국', '메국', 또는 '엄국'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어국'은 '어메리카'의 약모음 '어'를 과장한 말이고, '메국'은 '어메리카'의 약모음 '어'를 죽인 말이다. '엄국'은 약모음 '어'도 살리고 첫 자음 '미음'도 살려서 받침으로 삼은 말이다.

음운론적으로는 '엄국'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름에 받침, 특히 미음 받침이 있으면 부르기가 쉽지가 않다. 게다가 기존의 관행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간 '미국'이라고 써왔던 것과의 연속성을 생각한다면 '메국'이 가장 적절한 새 이름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때 '메'자는 한국말 음차어 '어메리카'의 둘째 음절을 딴 말이다. 그게 한자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제 그것은 고유 한국어 음절이다.

'미국'을 '메국'으로 고쳐 쓰면서 메국과 우리와의 관계도 다시 한번 찬찬히 곱씹어 보도록 하자. 말이 바뀌면 생각의 방법과 방향도 많이 바뀌는 법이다.

친메... 반메... 용메... 극메...
메제국주의... 메패권주의... 메지상주의... 메중심주의...
한메교역... 북메대화...
메국 대통령... 주한 메군... 주한 메대사 등등... 바꿔 쓸 말이 굉장히 많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질지 모르나 결국은 국어학자들과 정부도 찬성하리라고 믿는다. 명분의 면에서라면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는 문제보다 '미국'을 '메국'으로 바꾸는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분간 '메국'이름 바꾸기의 선도적인 역할은 아무래도 네티즌이 맡아야 할 것 같다. 숫자도 엄청날 뿐 아니라 아주 적극적이고 열린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선 인터넷 글쓰기에서부터 '메국'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하자.

한국의 네티즌들은 정말 바쁘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정치 혁명도 일으켜야 하고, 고물 비행기 들여오는 것도 막아야 하고, 갈팡질팡하는 학교와 교육정책에도 참견해야 한다. 거기다가 이제 한국말 제대로 쓰기와 주체성 세우기에도 나서달라고 해야 하니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정작 그런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몰라서 못하거나 싫어서 안 하고 있으니, 바쁜 네티즌들이라도 또 발벗고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