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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미국(美國)'이라는 이름이 좀 '기막힌 말'이라고 딴지를 걸었다. 중국말 '메이꿔(美國)'를 들여다가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에 불과한 태생이 좀 어줍잖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대신 한국어 음운론 특성에 맞는 '메국'이라는 새 이름을 제안했다.

많은 분들이 '메국 이름 바꾸기' 취지에 동의해주셨고, 새로운 대안과 제안도 많았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유에스에이(U.S.A.)'의 약식이름을 '아메리카'로 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메국을 '아메리카'로 부른다.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가는 것은 곧 메국행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부터 굳어진 관행이다.

메국 사람들도 제 나라를 가리킬 때 주로 '유에스에이(U.S.A.)' '유에스(U.S.)', 혹은 그냥 '스테이츠(States)'라는 말을 쓰지만 때로 '아메리카'라는 이름도 쓴다. 예컨대 지난해 9월의 비행기 테러 이후 메국에서 줄기차게 애창되는 노래인 '갇 블레스 아메리카'(God Bless America)의 '아메리카'는 바로 메국을 가리킨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아메리카'는 메국을 가리키기에 썩 좋은 이름이 아니다. 우선 '아메리카'가 나라 이름이 아니라 대륙 이름이라는 점은 이미 다른 분이 지적했다. 타당한 이유라고 본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아메리카'는 'America'의 일본식 음차어이기 때문이다. 1858년 일본이 메·일수호통상조약을 통해 메국과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일본은 메국의 정식이름 'United States of America'를 "아메리카 가슈고꾸(アメリカ合衆國 혹은 亞米利加合衆國)"라고 정착시켰다. '아메리카(アメリカ)'는 'America'의 음차어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America'의 첫 음절 'A-'의 발음이 영국식 영어로든 미국식 영어로든 '아'가 아니라 '어'라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약하고 짧은 '어' 소리이다. 그런데 어째서 일본 사람들은 이를 '아'메리카라고 음차한 것일까?

그건 일본어의 특성 때문이다. 알다시피 일본어의 기본 모음은 '아에이오우'의 다섯 개밖에 없다. 모음에 '어' 발음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면 일본 사람들이 '어메리카'라는 말을 만들 수 없었던 이유가 명확해 진다. 일본말로는 '어메리카'라는 말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중 가깝게 보이는 '아메리카(アメリカ)'를 채택한 것이다.

일본어 음차어 아메리카(アメリカ)가 원음에서 멀어지게 되는 또 한 가지 원인은 마지막 음절 '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말의 'カ'는 평음 '가'와 경음 '까' 그리고 격음 '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대개 'カ'는 첫 음절이나 중간 음절에서는 주로 평음인 '가'로, 마지막 음절에서는 경음인 '까'로 발음된다. 그래서 일본 사람이 'アメリカ'를 발음하는 것을 들으면 '아메리까'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한국어로는 '아메리까' 보다 훨씬 원음에 가까운 음차어를 만들 수 있다. '어메리카'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말과는 달리 한국말에는 '어'라는 모음이 따로 있는데다가 격음 '카'를 확실히 구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식 음차어 '어메리카'는 중국식 음차어 '메이리지안(美利堅)'은 물론, 일본식 음차어 '아메리까(アメリカ)'보다 훨씬 원음에 가깝다.

사실 한국어는 에프(f)와 브이(v), 지(z)와 티에이치(th)와 알(r) 등의 일부 자음의 문제만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서양어를 아주 근사하게 음차해 낼 수 있다. 특히 한국말의 모음체계는 대단히 포괄적이다. 그래서 개화기 조선의 신식 지식인들은 이런 한국말의 특성을 이용해서 서양어 음차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한가지 예가 '우라키'라는 잡지 이름이다. 유길준 등의 초기 메국 유학생들이 만든 동호인 잡지 '우라키'는 영어 낱말 'Rocky'의 음차어이다. 요즘이야 '로키'라고 하는 게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만 당시의 메국 유학생들은 원음에 가깝게 하려고 '우라키'라고 했다. 첫 두 음절 '우라'를 빨리 발음해서 '롸키'처럼 읽으면 메국인들의 'Rocky' 발음과 차이가 없다.

서양어를 제대로 음차하려는 이런 노력은 일제 강점기에 사그러든 것 같다. 일제치하의 지식인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일본식 번역어와 음차어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메리까'가 한국에 들어와 '아메리카'로 정착된 것도 아마 이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나마 '까'가 '카'로 고쳐진 것은 한국말에서 그 두 발음 차이가 워낙 분명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 발음을 '어'로 되돌려놓지 못한 것은 당시 지식인들이 한국어의 특성을 살리는 일에나 원음에 가까운 외래어를 만들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해야 했던 일제 강점기에는 그런 노력이 쉽지 않았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 국어학자들과 언중이 힘을 합쳐 추진한 일본말 청산운동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가 살아남았다는 점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표준 외래어 표기법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만 해도 '아메리카'라고 쓰면 틀림없다며 아무 경고도 주지 않지만, '어메리카'라고 쓰면 가차없이 빨간 줄을 그어 버린다. 물론, 그게 프로그램의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 외래어 표기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메국의 햄버거 체인점 'McDonald's'을 번역하면서 일본식 음차어 'マクドナルド'를 들여다가 '마꾸도나르도'라고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미국식 발음으로라면 '맥다널즈' 정도가 될 것이니 그걸 '마꾸도나르도'라고 하면 알아들을 메국인들이 전혀 없다. 그러나 모음 '애'가 없고 자음을 연달아 사용할 수 없는 (즉, 받침이 없는) 일본말로서는 그 정도가 가장 원음에 가까운 음차어다.

한국말의 특징을 살리면 원음에 가까운 '맥다널즈'를 만들 수가 있다. 강세와 장단음만 표시할 수 있다면 완벽하게 원음 재생이 가능하다. 요즘 표준어로 통용되는 '맥도널즈'만 해도 한국어 특성을 잘 고려한 것일뿐 아니라 원음에도 충분히 가깝다.

그러나 '아메리카'라는 말은 일본식으로 살아남았고 표준어로까지 지정되어 있다. '맥도널즈'를 버리고 '마꾸도나르도'를 선택한 꼴이나 다름없다. '어메리카'라고 하면 오히려 "너무 '빠다'('버터'가 아니라) 냄새 내지 말라"는 핀잔거리가 되기도 한다. 원음에 가까울수록 바람직한 것이 음차어의 특성인데도 말이다.

물론 '쓰메끼리'를 '손톱깎기'로, '마꾸도나르도'를 '맥도널즈'로 바꾸는 일이 좀더 시급해 보였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어메리카'로 바꾸는 일은 문제거리로조차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얼른 보기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뭐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따지느냐"는 빈정거림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아메리카'와 '어메리카'가 바로 그 경우다. 두 낱말의 차이는 첫 음절 '아'와 '어'밖에 없다. 그러나 그 차이는 원음에 가까운 정도를 나타내줄 뿐 아니라, '무작정 베낌'과 '슬기로운 창의' '사대주의'와 '주체성'을 갈라주는 중요한 차이이다.

'미국(美國)'이 중화(中華) 사대주의의 찌꺼기이라면, '아메리카'는 일제의 잔재가 짙게 밴 말이다. 이미 익숙해져서 편안한 말일지라도 적지 않은 문제를 가진 말들임에 틀림없다.

그런 말들을 우리가 앞으로도 써야 할까? 우리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 할까? 몰랐을 때에는 그랬다고 치지만, 알게된 이상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국은 '메국'으로, 아메리카는 '어메리카'로, 꼭 제자리를 찾아주자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덧붙이는 글 | 우연한 기회에 메국의 한 주립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 필자는 요즘 한국말과 개념의 중요성을 새록새록 깨닫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도 많은 논평이 있으시면 좋겠다.  이 글들은 출처와 필자를 밝히는 한 얼마든지 옮겨도 된다(광고를 클릭해 주신 분들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  생각지도 않게 책값에 보탬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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