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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학교에 다니는 아내를 뒤로 하고, 쓸쓸히 역에 가서 목적지인 옌안으로 가는 길의 중간역인 시안(西安)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

하지만 시안까지 가는 차도 없어 중간 지역인 정저우(鄭州)행 표를 끊는다. 그것도 빈약한 주머니와 달리 비싼 루완워표다. 하지만 마음은 곧 초연해진다. 언제든 돌아오면 되는 길, 그도 안 되면 구걸이라도 하면 되는 길, 연연하지 말자 하고.

기차를 기다린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다. 길에서 만나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연약하기 그지 없다. 그들이 멀지 않아, 미국과 더불어 세계 양대 강국의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해 본다. 하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의 초반에 세계에서 자웅을 겨룰 나라가 미국과 중국 밖에 없다는 것에는 이제 상당한 함의가 모아진다.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 특히 한족(漢族)의 중국은 유약하기 그지 없는 나라였다. 중국의 영토를 넓히고, 세계에 중국을 알린 것은 한족이라기보다는 칭기즈칸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이끈 몽고족의 '원'(元)과 역시 중국의 현대 영토를 이끌어낸 전설적인 영웅 강희제가 이끈 '청'(淸)도 만주족의 국가였다.

그런 한족 국가가 중국을 통일한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일까. 다름 아니라 1934년 10월 16일 강시성 남부 위도우(雩都)에서 시작됐던 대장정이 아니었을까.

이미 그 출발지인 위도우를 비롯해, 홍군의 초반 근거지였던 징강산(井崗山) 등을 다녀왔지만 그다지 확신이 서기 어렵다. 그래서 선택해 보는 곳이 장정의 마지막 지점이자 10년 가량 홍군의 근거지로 있었던 중국 중서부의 도시 옌안이다. 그 길에 동행할 수 있는 책을 꼽으라면 자연스럽게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홍군이 막 바오안(保安)과 옌안에 자리를 잡을 때, 31살의 젊은 저널리스트는 당시는 절대적인 약세일 수밖에 없는 그들을 만나러 소개장을 들고, 길을 나선다. '붉은 비적(匪賊)'들을 만나 처음으로 인터뷰를 한 에드가 스노우의 기록 '중국의 붉은 별'(영어명 Red star over china)은 당시 중국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일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을 만든 근거를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한 저작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가볍게 길을 떠난 뒷세대의 어깨는 이 위대한 저작의 무게 때문에 조금은 무거워진다.

혁명 역사의 흔적으로 채워진 도시

기차는 다음날 아침 정저우에 서고, 다시 시안행 열차에 오른다. 앞에 앉는 이들은 중부의 교육도시인 시안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아들의 입학을 보러 가는 정저우에 사는 부부와 아들, 그리고 부인의 언니다. 정저우에 있는 대학에서 측량학을 가르친다는 아저씨는 장정에 대한 특별한 가치부여를 미루고, 오히려 "덩 샤오핑이 제 2의 장정을 이루었다"며 실용주의 노선을 통해 부유한 중국을 만든 그의 업적을 칭찬한다. 혁명의 성지인 옌안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도움이라고는 옌안이 아직도 많이 낙후된 도시라는 말 뿐이다.

그분의 세대는 문혁이라는 광기의 시대를 유년과 같이 보냈을 것이다. 그들에게 아직 혁명은 광기의 역사처럼 진행되는 문혁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역의 손님을 대하는 그들 가족의 모습은 절제되어 있고, 적절한 무게를 갖고 있다.

미리 인터넷에서 확인한 대로 시안에서 밤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옌안행 기차가 있고, 나도 그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정저우 아저씨의 말씀을 예증이라도 하듯이 기차는 너무도 낡아 있다. 퇴락한 고도(古都)로 가는 느낌이 절로 든다. 시간이 늦어서 자리에 오르자마자 급히 잠을 재촉한다.

에드가 스노우가 1936년 옌안으로 향한 지 64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 역시 그가 그곳에 첫 길을 들어섰던 나이가 서른 하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저 한낱 비적에 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을 것이다. 마음이 편안한 나에 비하면, 에드가는 펼쳐질 새로운 광경에 대한 불안감과, 홍군은 물론이고 국민당군의 총구에서 예외일 수 없는 안전 문제 때문에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그 어려운 길을 뚫고, 그가 도착한 곳은 얼마후 홍군의 주요기지가 된 옌안에서 지금 차편으로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바오안이다. 그곳에서 그는 마오쩌뚱을 비롯해 홍군의 전사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예리한 시각으로, 또한 솔직하고 담백한 시각으로 그들과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기를 4개월. 그는 36년 10월 그간의 기록을 들고, 그가 머물던 베이징 교외의 숙소로 돌아온다.

"내가 7년간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었다"는 의문형으로 시작된 이 저작은 그 의문을 풀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정확한 분석과 이후 중국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역사적인 저작으로 자리하게 된다.

스노우보다 64년 늦게 이곳에 도착한 한국 청년을 태운 기차는 아침 6시 30분에 아담한 역에 손님들을 내려 놓는다. 밖에 나오자 옌안을 하루 동안 여행하는 패키지를 가진 이들을 몇 사람이 맞이하고 있다.

이 패키지는 옌안을 대표하는 몇 명소와 홍군이 10여년 동안 머물며 공산화 혁명의 맹아를 키워가던 흔적을 돌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이 넓지 않아 옌안 여행은 하루를 잡으면 충분하고, 아침에 도착해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밤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시안행 침대열차를 타면 무리가 없는 여행이 될 수 있다.

나와 중국인 세 사람이 동행한 옌안여행사의 차는 차례로 장정을 마친 홍군들이 머물었던 흔적을 쫓아간다. 우선 안내되는 곳이 봉황산(鳳凰山) 산록에 위치한 혁명성지다. 이곳은 장정을 마친 홍군의 첫 번째 근거지가 된 곳이다.

37년 1월부터 이곳으로 근거리를 옮긴 중공중앙(中共中央)은 옌안의 중앙에 위치한 봉황산의 기슭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는 마오쩌둥은 물론이고 저우언라이(周恩來)나 주더(朱德) 등이 거주했던 곳이 유적지로 남아 있다. 마오의 구거 한쪽에는 당시에 옌안으로 들어와 헌신적인 인술을 펼쳤던 노먼 베쑨 박사의 기록이 있어, 중국인이 그를 잊지 않음을 보여준다.

봉황산록에서 홍군의 위치는 에드가 스노우가 방문했던 바오안 당시의 처지와 비슷했다. 봉황산은 산이 가까워서 안전하기는 하지만 협소했기 때문에 다음 해 1월에 비교적 넓은 왕지아핑(王家坪)과 양지아링(楊家)으로 근거지를 넓힌다. 여행 일정 역시 그 길을 따라간다. 왕지아핑은 중공중앙군사위원회, 팔로군총사령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양지아링은 군사회의나 예술공연이 벌어지던 중국대예당을 비롯해 중공중앙반공실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당시를 보고, 미래를 읽어내는 예리한 시각

목숨을 건 종군 취재길에 올랐던 에드가 스노우는 그곳에서 마오쩌둥을 비롯해 혁명전사들에게 중국소비에트 혁명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한다. 에드가의 기록이 놀라운 것은 단순히 홍군들의 구술과 그가 얻은 부대적인 지식을 통해서지만 당시의 중국 정세를 상당히 정확히 읽고 있는 것은 후세 사가들조차 놀라게 하는 힘이다. 또한 이 책의 힘은 마치 대하소설처럼 그가 만나는 홍군전사 한사람 한사람이 제대로 된 모습으로 살아나게 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같은 인물은 물론이고 그가 흔히 샤오꾸이(小鬼)라고 불리는 어린 소년병사들에게도 생명력을 부여한다. 스노우는 어린 샤오꾸이들을 보며, "그들을 보면 중국이 결코 희망 없는 나라가 아니며, 어떤 국가도 이런 젊은이들이 있으면 결코 절망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고 쓴다.

당시에 중국 전체 인구에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홍군병사를 보며, 그가 미국의 낙관적인 미래를 끌어낸 것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혜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샤오꾸이 외에도 훗날 문혁의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청년 장군 린피아오(林彪), 유격전술 등에 능하고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펑더후아이(彭德懷)의 모습 등 훗날 중국을 일으킨 대부분의 전사들이 하나하나 살아 있는 인물로 살아난다.

물론 4부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묘사되는 마오쩌둥의 비중은 가장 크다. 스노우의 마오쩌둥 묘사는 단순히 그의 현재 상황을 그리는데 머물지 않고, 그가 문화나 사상을 키워오던 과정을 정확히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그가 궁극적으로 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어림하게 한다.

마오는 몇 차례 봉기 이후에 눈에 띄게 약화된 공산주의자 1000명을 데리고 중국 남부에 있는 정강산에 오르고, 힘을 키우며 시대를 엿본다. 그리고 이어진 6000마일의 대장정을 수행함으로써 홍군은 한족뿐만 아니라 쿤밍이나 시장(西藏)의 이민족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다. 에드가는 그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그 역사를 상당 부분 재현해 내는데 성공한다.

물론 이 책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이지 중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극적인 계기가 된 '시안사변'을 훗날 보완 취재시에 확인해서 기록한다. 1936년 12월 7일 국민당의 수장 장쩨스(蔣介石)는 옌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이 지역의 중심지 시안에 도착한다. 공산당군과 협상을 통해 중국의 통일을 이루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는 12일 아침 6시 그는 믿었던 장쉐량(張學良)의 동북군에게 체포되어 공산당의 협상카드로 사용된다. 그로써 완전히 힘에 열세에 있었던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대등한 입장에 서게 된다. 이후 대일전쟁과 대국민당전쟁을 이끌며, 1949년 공산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본 책의 마지막에 스노우는 자신의 확실한 관점을 덧붙인다. "중국의 사회혁명은 패배나 일시적인 후퇴를 맛보기도 하고 한때는 쇠퇴하기도 했으며 당면한 필요성이나 목표에 적응하기 위해 전술을 크게 변화시키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모습을 감추고 지하로 잠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도 있었지만... 종국에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운동을 태동시킨 기본적인 여건들이 역동적인 승리의 필연성을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동양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서양인이라는 벽을 넘어 그는 쉽지 않은 예측을 할 수 있었고, 그 예측은 정확히 맞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명한 저널리스트들은 물론이고 중국 전문 사학자인 존 K 페어뱅크 조차 이 책을 '역사적인 기록'이라고 불렀다.

장지아링을 나온 차는 소비에트 시절을 상세히 기록한 옌안혁명기념관을 들른 후 44년부터 47년까지 중공중앙서기부와 마오 등 지도자들이 머물던 자오위앤(棗園)에 들른다. 옌안에서 차로 20분 가량의 거리인 자오위앤의 부근은 물론이고 옌안 전체에서 대추를 유난히 많이 볼 수 있다. 자오위앤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가을의 초입에 굵은 대추알들이 이국의 입맛을 유혹하고, 맑은 공기와 차분한 느낌이 한 닷새 머물다 가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이미 동행자들이 나를 부른다. 다시 옌안으로 들어와 옌안의 표지인 바오타(寶塔)와 완푸동(萬佛洞) 등 유적이 적지 않은 칭량산(淸凉山)에 들른다. 혁명기 칭량산의 동굴들은 당보를 비롯한 인쇄물을 만드는 장소였다. 지금 중국서점을 대표하는 신화서점이 처음 문을 연 곳도 칭량산에 있는 작은 동굴서점이다.

옌안 혁명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인 옌안은 근본적으로 도시발전이 어려운 곳이었다. 작은 도시의 중간을 흐르는 옌허(延河)가 그나마 생명력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옌안은 발전되지 않은 도시다. 하지만 현대중국을 태동시킨 성지라는 자존심을 가진 도시답게 당당하고, 의연한 도시라는 느낌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책소개 < 중국의 붉은 별>     
-85년 출간 후 10년만에 재 출간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신홍범 씨가 번역한 '중국의 붉은 별'은 오랫동안 중국연구자들이나 사회주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하나의 정전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책 가운데, 첫 번째 필독서인 이 책은 에드가 스노우가 바오안에 다녀온 다음해인 1937년 11월 런던의 빅터 골란츠 사에서 처음 출간됐고, 미국에서는 1938년 1월에 뉴욕의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서 간행됐다. 이후에 여러차례 개정이나 증보판을 방행했고, 최종본은 1971년에 출간됐다. 
저자 에드가 스노우는 한국인 김산을 소개한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의 남편이었다. 하지만 스노우는 웨일즈와 이혼하고 여배우 훨러와 재혼했으며, 만년을 제네바에서 보내다가 72년 서거했다. 
한국에서 이 책은 해직언론인 신홍범 씨의 번역으로 두레출판사에서 번역됐고, 95년에 다시 두권으로 나눠어서 재출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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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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