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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天津)을 한글로 바꾸면 '하늘나루'다. 하늘에 들어가는 배를 정박하기 위한 나루터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하지만 톈진에 온 이들은 하늘의 흥취를 감상하기에 앞서 중국 3대 도시 중에 하나라는 위상에 맞지 않고, 도시의 곳곳에 펼쳐져 있는 남루와 무질서를 느껴야 한다.

이미 거대한 상업도시가 된 상하이와 최근들어 수없이 진행되는 공사와 그 결과로 생기는 각종 현대식 건물들이 그 자리를 메워가는 베이징과 달리 톈진은 정체되어 있는 거대한 고철덩어리 같은 도시다.

여름의 폭염과 겨울의 추위도 사람들이 살기에 그다지 좋은 조건이 아니다. 하지만 톈진에는 천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아간다. 우연하게도 기자의 눈에 들어온 톈진의 첫인상은 안개였다. 영화 십수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의 막바지나 40도 가까이까지 수은주를 올리는 폭염이 지나간 가을날의 톈진을 채우는 것은 안개다.

초저녁부터 사위에 짙게 내리기 시작한 톈진의 안개는 다음 날 태양이 내리쬐는 맑은 날에도 불구하고 정오까지 버티는 것은 다반사고, 심지어는 안개가 다시 새로운 안개로 덮이곤 한다. 그래서도 톈진여행에 동행할 만한 책을 찾으라면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을 꼽을 것 같다.


두드러지지 않은 음지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전후 한국문단의 문체에 있어서 미문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안을 준 소설이다. 부유한 제약회사의 딸과 결혼해 돈과 명예를 얻은 한 남자의 쓸쓸한 고향행을 담은 이 소설은 이미 고전에 속할 만큼 알려진 작품이다. 지명에 '나루'(津)라는 같은 글자가 있어서가 아니라도 톈진은 소설 속 무진과 유사점이 많다. 그 쓸쓸한 여행을 떠나 보자.

소설의 시작은 주인공 희중이 광주에서 고향마을이자 여행의 목적지인 무진으로 들어가는 버스에서의 몽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농촌 시찰원인 듯한 이로부터 들리는 무진에 특산이 없다는 말을 듣고 희중은 생각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 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안개속에서의 수련
중국의 공터는 아침마다 태극권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찬다. 짙은 안개속에서 태극권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
ⓒ 2001 조창완

톈진도 그다지 특산이 있는 도시는 아니다. 인구가 천만이나 살고, 가까운 곳에 항구가 있지만 톈진에서 항구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도시의 그것에 비해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다. 사방에 평야가 있지만 그다지 특징적인 것이 없다는 것도 톈진의 특징이다. 그래서 톈진의 특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안개라고 할 수 있다.

봄 가을이면 톈진은 온통 안개의 바다의 바다가 된다. 톈진이 안개가 많은 이유는 뭘까. 우선 전체적으로 고도차가 없는 평지에 바람이 그다지 않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 건너오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음(陰)이 강한 땅이라는 것도 안개가 많은 이유일 것이다. 톈진의 안개는 전체적으로 습한 기운에 톈진의 중앙을 흐르는 하이허(海河)와 수상공원 등 대체로 물이 많은 호수들이 시내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유난히 음의 기운이 강해선지 톈진에 살아가는 주재원이나 유학생 부부가 낳은 아이 중에는 딸이 많다고 하는 것도 진실을 빙자한 소문이고, 이곳에 오면 남자들은 살이 빠지는 반면 여자들은 살이 찐다는 확실히 믿기에 어려운 소문도 있다.

무진기행에서 희중은 참전을 기피하던 한국전쟁 시절에 숨어지내거나 폐병을 얻어, 요양을 위해 그곳에 와 있었을 때 등 가장 불안한 시절에 은거하던 무진에서의 날들을 기억한다. 그가 만나는 삶들 만큼이나 무력하기 그지없다. 작가를 꿈꾸는 후배 박은 그곳에 부임온 인숙에게 연정을 품지만 자신의 초라한 처지로 인해 말 한마디 부치지 못하는 이고, 서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무진에서 교편을 잡은 인숙은 아리아 대신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이곳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희중에게 항상 카인컴플렉스를 느끼던 조는 고등시험에 패스해 세무서장이 되었고,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데 열을 올린다. 무진에 사는 이들의 모습은 밖을 느끼기보다는 그 안개 짙은 도시속에서 자신의 자의식 속에만 속박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전부다. 그래서 이들의 묘사는 이럴 수밖에 없다.

"무진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은 모두 속물들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타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위(無爲)와 똑같은 무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장난이라고."


특별한 특징이 없는 도시

안개에 쌓인 누각
톈진대학의 중앙에 위치한 경업호의 중앙에 위치한 누각도 안개에 쌓여있다.
ⓒ 2001 조창완

톈진의 특징 중의 하나는 특별히 여행할 만한 관광지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 중에 하나다. 톈진 역에서 상인들이 건네주는 톈진의 여행지도를 보면 사실 특징적인 곳이 없다. 수상공원 등 그다지 특징적이지 않은 공원이나 대비선원(大悲禪院) 등에 지나지 않는다. 동려구 등 바다와 인접한 곳도 있지만 이곳 역시 아름다운 바다를 느끼기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어려움이 많다.

톈진의 역사는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청조 말엽에서부터 개항기에 두드러졌다. 북양시대를 이끌던 리홍장은 항구가 있는 톈진을 기점으로 교육과 군사를 일으켜 청조의 부활을 꿈꾸었다. 하지만 만주족의 청나라는 근대사회에서 전 중국을 이끌기에 명분에서나 역량에서 너무나 작았다.

그 시기 이미 톈진에는 일본, 독일, 미국 등 수많은 서양 열강의 조계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청조는 아래에서부터 밀려오는 한족(漢族) 독립의 기운을 꺾을 수 없었다. 리홍장은 지금의 톈진대학이 된 북양(北洋)대학 등을 남기고 쓰러져 가야 했다.

무진에서 희중이 느끼는 것은 희망형보다는 절망형이다. 고향에서 그가 출세했다는 근거로 내세우는 제약회사 전무라는 자리는 그저 처가의 도움으로 얻어진 허울 뿐이고, 거기에서 그는 무력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른한 몽상뿐이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海風)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 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地上)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 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될 것이다."

친구들과 만난 날 밤에 인숙을 바래다주는 희중은 자신과 동거를 하다가 문득 떠나버린 희(姬)를 떠올리고 그녀에게 새로운 연정의 희망을 본다. 인숙 역시 갑작스런 연정 때문인지 희중이 도시로 나가는 희망이라고 느껴선지 그의 과거로의 길에 동행해서 몸을 맡긴다. 하지만 그녀를 안았을 경우 다시 선택해야 할 경우 이전의 빈곤으로 돌아가야하는 희중이나 사실은 서울에서 역시 큰 희망형을 기대할 수 없는 인숙은 모두 혼돈 속에 있다. 그래서 그들이 안았을 때도 사랑보다는 서걱거리는 날 섬이 느껴진다.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방문을 열고 물결이 다소 거센 바다를 내어다보며 오랫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다. ...... 나는 <어떤 개인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하지만 그는 이전의 남루가 두려우며, 인숙 역시 무진에서 만들어낸 희중과의 앞날이 희망형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한다. 결국 급히 서울에서 전보가 오고 희중은 서울로 가는 차를 탄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톈진은 한국인들에게 여행지라기보다는 사업과 학업을 위한 도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때론 자신의 종적을 묻고 살아간다. 훗날 하늘나루를 떠나갈 때, 자신의 삶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안타까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톈진의 여행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책 소개
무진기행-소설계의 문체와 정신을 바꾼 문제작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1964년 10월 사상계 139호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김승옥의 대표작이자 한국문학의 문체형태에서 미문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일본 근현대 작가들의 미학주의에 모방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 소설이후에 한국 소설의 문체는 단순한 묘사가 아닌 사물과 정신의 형상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기 시작했다. 
내용에서 봤을 때, 무진(霧津)은 안개가 자욱하여 무엇하나 뚜렷한 것이 없는 공간으로 단순한 사물이 아닌 4.19의 좌절에서 오는 허무 의식과 세속적 출세주의를 암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1960년대, 아침이면 짙은 안개로 덮이는 무진이란 공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주인공이 일상의 삶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새로운 삶을 모색하려는 과정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형상화했다. 자기 세계의 확립을 위해 현실에서 끊임없이 탐색하는 모습과, 자아를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풍속의 차원에서 묘사한 이 작품은 두 세계를 한꺼번에 다룸으로써 그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진기행의 수록책은 수없이 많다. 한국문학전집에는 빠지지 않고 수록되어 있다. 지금 출간되는 책 중에 읽기에 좋은 판본은 99년 9월 가람기획에서 내놓은 '무진기행 : 한국 현대문학 100년, 단편소설 베스트 20'과 범우사의 '무진기행'이 좋다. 앞 책은 무진기행 뿐만 아니라 단편소설의 진수들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뒤의 책은 무진기행을 비롯해 야행, 서울. 1964년 겨울, 역사 등 김승옥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고, 작은 크기에 가격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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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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