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7 15:26최종 업데이트 24.06.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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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 김영사

 
"서구 국가들이 재래식 무기로 그들과 같은 수준에 다다르려 했다면, 아마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을 철회하고 영구적 전시 상태에 놓인 전체주의 국가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핵무기였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 담은 구절이다. 여기서 '그들'은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의미한다. '그들'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재래식 군사력의 격차가 얼마나 났었고 핵무기가 이를 얼마나 상쇄해주었기에 하라리는 이런 진단을 내린 것일까?
 
냉전이 절정기에 달했던 1984년 나토가 작성한 문서를 보면, 정규군은 600만 명 대 400만 명, 전차는 6만 1000 대 2만 5000, 군용기는 1만 3000 대 1만 1200 등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냉전 초기에 비해 나토가 그나마 따라잡은 수준이 이 정도였다.

하라리의 진단은 나토가 이러한 재래식 군사력의 열세를 미국, 영국, 프랑스의 핵무기와 '상호확증파괴(MAD)' 전략으로 만회할 수 있었고, 그래서 "서구인들이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뿐만 아니라 섹스, 마약, 로큰롤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라리의 해석에 대한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실제로 여러 나라들은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의 '양립'을 핵무기에서 찾으려고 했다. '안보의 경제성'을 강조했던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New Look)', 중국 개혁개방의 기수인 덩샤오핑의 양탄일성((两弹一星)론, 자주국방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추구했던 박정희의 비밀 핵개발 시도 등이 대표적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졸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참조).
 
이는 색안경을 벗고 봐야 '북핵의 정치경제학'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하라리의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우리식 사회주이를 구원해 줄 것은 핵무기'라는 신념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핵무력을 '국체(國體)'로 삼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 이러한 선택의 성적표는 어떨까?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도하에 초대형방사포를 동원한 핵반격가상종합전술훈련을 실시했다고 4월 23일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핵방아쇠'라 부르는 국가 핵무기 종합관리체계 내에서 초대형방사포를 운용하는 훈련을 진행했다며 "적들에게 보내는 분명한 경고 신호"라고 이날 보도했다. ⓒ 연합뉴스


우선 군사안보 차원이다.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하나는 한반도의 군사력 균형에 북핵이 본격적으로 가세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 파이어파워'가 분석한 2017년과 2024년 핵무기를 제외한 남북한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남한은 12위에서 5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북한은 18위에서 36위로 크게 떨어졌다.

여기에 한국의 동맹인 미국, 본격적으로 재무장에 나선 일본, 10여 개의 유엔사 전력공여국을 고려하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이를 만회하려는 북한의 선택은 냉전 시대의 나토와 너무나도 닮았다. 무리하게 재래식 군사력을 증강하기보다는 핵무력 고도화와 '상호확증파괴' 전략으로 열세를 상쇄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론이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반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미국은 "모든 옵션은 테이블 위에 있다"며, 북한의 핵무장 저지를 위해서는 무력 사용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었다. 그런데 2018〜2019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시기뿐만 아니라 북한이 핵 고도화에 본격적으로 나선 2020년 이후에는 이런 입장이 쑥 들어갔다.

대북 억제력 강화는 강조하면서도 대북 선제공격론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해 북한과 조건 없는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쪽에 방점이 찍히고 있다.
 
식량과 경제 사정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먹고 사는 문제도 좋아져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초에 식량 생산과 경제성장이 목표치를 초과했다고 발표했는데, 필자가 3월에 만난 중국의 전문가들도 북한이 식량난과 경제난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북한의 국가전략의 핵심은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은 병진이 불가능하다고 봤지만, 실상은 다르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에 집중하면서도 재래식 군사력의 비중을 줄여 인민 생활과 경제발전에 투입해 왔다.

최근 여러 곳의 공군 비행장을 채소 농장으로 전환했고, 군수공장에서 트랙터를 생산해 농촌 현장에 보급했으며, '지방발전 20×10'에 조선인민군을 대거 투입하고 있는 것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만만치 않은 성과 내고 있는 김정은 정권
 

북한은 지난 2일 청년중앙회관에서 '품종 확대, 질제고, 경쟁력'을 주제로 한 전국수출품전시회-2024가 개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3일 보도했다. 전시회에는 국가과학원, 경공업성, 보건성 등 110여 개 단위에서 출품한 1만 4천여 점의 제품들이 전시됐고 가치있는 과학연구성과 자료들이 제출됐다. ⓒ 연합뉴스

 
대외 관계도 주목할 만하다. 한미일이 북한에 대화를 요구하는데, 북한이 고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부터 과거와는 달라진 풍경이다. 아쉬운 것도, 기대할 것도 별로 없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북중·북러 관계는 1990년 이래 최고 수준이다. 특히 북러 관계 밀착이 눈에 띈다.

이는 북한의 "새로운 길"이 미중 전략경쟁 격화 및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린 탓이 크다. 과거엔 '핵비확산'을 중시했던 중국과 러시아가 서방과의 '세력 균형'의 관점에서 북핵을 용인하기로 한 것이다. 이 와중에 윤석열 정부가 미일동맹에 '다 걸기'를 하면서 북·중·러와의 관계 관리에 실패한 것도 이들 세 나라의 밀착에 하나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북중·북러 관계가 강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종속적인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로 이동하고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우선 자체적인 핵무장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에 안보를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3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체 핵우산을 가지고 있다"며, 러시아가 북한에 핵우산을 제공할 필요도, 북한이 이를 요청하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자력갱생 및 자급자족을 통해 자립 경제를 도모해 왔고 이것이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면서 중러의 지원에 의존할 필요도 크게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대신 대등한 교역과 교류 협력을 추구하고 있다.
 
이렇듯 김정은 정권은 핵을 안보, 경제, 외교를 아우르는 국가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고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 '가난하고 고립된 핵개발국'에서 '가난과 고립을 탈피하는 핵보유국'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편한 현실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크게 달라지고 있는 북한'을 직시해야 할 필요성도 커진 셈이다.
 
동시에 김정은 정권이 유념해야 할 속담이 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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