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동단 총재 김가진
 대동단 총재 김가진
ⓒ 석탑출판

관련사진보기

 
김가진은 "대한제국 고관을 지낸 사람 가운데 독립운동에 투신한 유일한 인물"(한홍구) 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는 고종의 다섯 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임시정부 망명을 추진하여 복벽주의자 또는 보황주의자라는 평이 따르기도 했지만, 임시정부를 세계 각국에 각인시키고 국민적 활력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동농에 대해 특별히 대접하여 모두들 정성을 쏟기는 했으나, 살림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와 법무총장 예관 신규식 두 분이 크게 도와주었다. 이 두 사람은 동농이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장으로 있을 때 관계를 맺었던 분이다.

며느리가 와서 살림을 꾸려 나가자 손님들도 찾아들기 시작하였다. 이시영(1868~1953), 이동녕(1869~1940) 같은 분들의 방문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차 한 잔이라도 대접할 여유가 있다는 것이 동농으로는 자랑스러웠다. 또 남들이 감히 생각 못하는 만리타국까지 찾아와 준 마음이 고마워, 손님들에게 며느리 자랑을 늘어놓기도 하였다.

그때 임정 요인들과 상하이에서 살고 있는 지사들의 살림이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정황을 보고 있노라니 도저히 그렇게 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 정정화였다. (주석 7)

김가진은 1920년 1월 1일 임시정부 참여 두 해를 맞아 <축 대한민국 2년 원조(元朝)>라는 시를 지었다.

 내가 새 대한민국에 의탁한지 제2년을 맞아
 이른 새벽 잔 들어서 하늘에 축원하기를
 형언키 어려운 악을 쓸어내고
 산하의 자주권을 회복케 해주소서라고.
 대각(臺閣)의 여러 각료들은 모두가 준걸하고
 전장제도는 백 퍼센트 완전하네.
 한양성의 봄 좋은 날에
 태극기 바람에 휘날리며 다 같이 개선하세.
(주석 8)

김가진은 국내에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다짐했던 대동단 단원들이 일제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22년(대한민국 4) 3월 1일 <4회 독립선언일>이라는 시를 지었다.

 독립 선언한 것이 어제 같은데 오늘 아침 또다시 4주년을 맞네. 
 거친 곳에 숨어서 어찌 모두 살아남기를 바라랴.
 옥에서 나와 깨부수지 못한 것이 부끄럽네.
 원수를 잠시 잊었으나 끝내는 다시 그 생각이 살아나서
 세상이 어려워지면 스스로 돌아오기를 강력히 촉구할 것이다.
 원컨대 우리 민족이 더욱 단결하여
 하루빨리 전쟁에서 벗어난 산하를 보게 되기를.
(주석 9)

김가진은 1921년 북간도 독립군의 무장투쟁 조직인 군정서로부터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계기로 만주로 건너가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자 했으나 건강이 따르지 않아 미루고 있었다. 

그런 사이 건강이 악화되었다. 망명할 때의 고초와 부실한 식생활, 여기에 대동단 동지들의 수난 소식은 정신적으로 기력을 빼앗는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김가진 선생의 장례행렬
 상하이에서 김가진 선생의 장례행렬
ⓒ 김자동

관련사진보기

 
손자 김자동이 네 살이던 1922년 7월 4일 할아버지 김가진은 영면하였다. 77세, 망명 3년째이고, 마침 알뜰이 보살펴주던 며느리는 독립기금 마련 차 귀국 중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 박은식·이동녕·이시영·홍진·김인전·김철 등의 명의로 부고를 내고 요인 대부분이 문상을 하고, 상하이 대한교민단장 김철은 부고 통지서를 교민들에게 보내어 슬픔을 나누었다. 장례식에는 임시정부 수석 홍진과 안창호 등이 추도사를 하였다. 국내에도 서거 소식이 알려져 유림연합대회 주관으로 서울 적선동에서 추모집회가 열렸다 

유해는 상하이 홍차오로 만국공묘에 안장되고, 10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이역에 묻혀 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김가진 선생 별세 보도이다.

동농 김가진선생 서세(逝世, 별세)

동농 선생 김가진씨는 우리 구한시대의 대관으로 내정개혁과 외교직임에 경력이 이미 많고 3.1독립운동이 발생하는 일에 다수 지사를 연락하여 찬조함이 있고 우리 독립당의 임시정부가 ○○에서 설립된 후에 씨가 광복사업에 잔명(殘命)을 공헌할 사상으로 민국원년 8월에 아들 의한을 이끌고 상해에 도착함은 우리 일반사회가 성심환영한 바이라. 해외풍상(海外風霜)에 많아 고난을 경과하든 말미에 노환으로 신음하는 일이 많아 의술이 무효하여 본월 4일 10시에 장서(長逝)하였는데, 향수는 77세라 씨가 확삭(矍鑠)한 의지와 기개로 조국독립의 희망을  품고 해외에 힘을 다하다가 중도에 별세함은 무궁한 유감이라 할지며 우리 사회의 통도 애모함은 실로 형언키 어려운 바로다.
(주석 10) 


주석
7> 김위현, 앞의 책, 336~337쪽.
8> 앞의 책, 345~346쪽.
9> 앞의 책, 350~351쪽.
10> <독립신문>, 1992년 7월 8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자동, #김자동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