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
가망서사
유독 장애가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실수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조심하는 경우가 있다. 함부로 도와줘서도, 외면해서도, 마주한 사람을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만 명명하지 않도록 골몰하다 보면 아뿔싸, 같이 웃고 슬퍼하는 감각에 자물쇠를 채워 긴장만이 사위를 감쌀지도 모른다. 연극인 김지수는 애초에 그 사실을 알아챈 사람. 편견의 경계를 지우고자 연출 감각뿐 아니라 유머까지 고루 장착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지수 씨의 농담이 생각났다. 단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수 씨는 요즘 나이가 들어 작은 글씨들을 읽을 수가 없다며 '나 이제 눈이 잘 안 보여. 중복 장애야.' 하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김슬기‧김지수)
소아마비로 얻은 척추 장애. 청년 김지수는 몇 년에 걸쳐 수술을 받는 대신, 수술비로 1인 가구의 인생을 출발했다. 그는 2003년부터 극단 생활을 했다. 다양한 자립생활센터가 생겨나던 시절, 장애인 주도로 만들어진 센터에서 장애인들이 오히려 주변부로 밀려나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 고민은 배우가 행복한 극단을 만들고 싶은 소망으로 이어졌고, 김지수는 2007년 장애인 극단 '애인'을 창립했다.
연극이란 감정을 쌓아 올려 배우가 자신과 조우하고 관객과 감응하는 것. 그 인고의 세월을 같이 버틸 동료를 찾고자 김지수는 국토종단 여행길에 올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연극하는 삶'을 제안했다. 그렇게 배우 백우람 등 의기투합한 동료들이 모인 극단 애인은 이제 18년 차에 접어드는 베테랑 연극인의 집합소다. <고도를 기다리며>,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 등으로 극찬을 받았다.
연극인 김지수는 말한다. 장애가 있든 없든 우리가 같이 살아가려면 "유연해야 되고 어수선할 수밖에 없으니, 그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 엉성한 질서가 있기 마련"임을 알아야 한다고. 실제로 장애 배우들로 이뤄진 연극 무대를 처음 본 관객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은 비장애 배우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탓에 눈앞에 선 배우의 몸짓에 일순간 혼란을 느낀다.
관객은 이내 관습적으로 봐온 비장애인의 연기와 몸짓,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덜어내고 극에 집중한다. 눈앞에 선 배우의 몸짓에 정신을 쏟는다. 이때 관객과 배우의 독특한 응시가 이뤄지고, 어수선한 연결이 시작된다. 연극인 김지수가 말했던 '질서'란 익숙히 봐왔던 연극의 자리에 새로운 색채를 얹히고, 움직임을 뭉개고 합하여 새로 생겨난 리듬을 나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희생자, 천재 등 천편일률적인 장애 캐릭터 너머의 배우를 바라보는 연습 말이다.
종종 팬심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찰나 생겨난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통해 몰랐던 연극의 지평을 탐색하다가 황철호 배우의 영상을 보고 그에게 '입덕'했다(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유튜브 영상 "연극이뭐라GO: 황철호 배우 편"이 발단이었다. 매우 우아한 악센트가 압권인데, 그의 배우 인생을 계속 찾아보는 중이다!).
뇌병변장애를 가진 배우가 무대 위에 등장하는 장면에 관해 "배우가 비틀비틀 걸어온다"라고 여전히 화면에 잘못 해설되는 경우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동시에 자기 장애를 종종 무대 위에서 '애용'하는 배우들도 있음도 알려준다. 얼굴에 난 점, 비뚤어진 허리와 곡선으로 꺾인 목, 옴폭 패인 미간 등 배우의 신체는 연극을 위한 배경이자 이미지가 되어 준다. 하여 배우의 장애는 어떤 장면에선 시너지를 일으키는 도구가 되고, 보편적인 신체 기관 중 하나로 극 위에서 구현되고 흐르는 조각이 되는 건 아닐까 감히 예감해 본다.
한국 최초의 장애인 극단이 탄생한 2002년.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났다. 넷플릭스를 비롯해 TV 연속극에서는 여전히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역할을 맡는 추세다. 영국에선 이미 다양한 소수자들로 이뤄진 드라마를 제작하는 '360° 다양성 헌장'이라는 규칙 아래, 장르와 영역을 불문하고 극이 방영된다. 서로 다른 장애 유형을 연기하는 해외 연극도 생겨나고 있다. 여전히 비장애인 배우들이 판치는 국내 드라마와 연극판에서, 다양한 장애 당사자들이 자기만의 호흡으로 존재를 보이는 장면이 빈번해져야 할 때다.
한세월을 지탱해 준 다리. 휠체어를 타고도 생활이 되고 예술을 논할 수 있을 때 두 개의 멋진 동그라미는 언덕을 오를 것이다. 그때는 나의 자전거도 덩달아 호쾌하게 달릴 수 있겠다. 봄의 언덕을 나란히 누릴 수 있겠다. 최소한의 생활 윤리를 지킬 때 일인 분의 삶이 예술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출근길에 되새겨야겠다. 아차, 휴대폰에 코 박는 건 그만. 몇 초만이라도 주변을 살피는 연습, 이제 시작이다.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
김슬기, 김지수 (지은이), 가망서사(2022)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 다양한 몸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위하여
백정연 (지은이), 유유(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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