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외침 안An>
가연
한국 생활 26년 차에 접어드는 1957년생 응웬 응옥 깜은 이주민의 목소리를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외침 안An>에 담았다. 이 책은 그가 나고 자란 베트남에서부터 사랑을 좇아 도착한 한국에 이르기까지 학생으로서, 통번역가로서, 반려인로서, 상담가로서, 인권 운동가로서 분투한 세계 시민의 '업(業)+에세이'다. 책 초반, 저자는 '안(安)'이라는 한국어와 베트남 단어 '안(An)'이 똑같이 편안하다는 뜻을 가졌다고 일러 준다.
책은 8부로 이뤄져 있다. 1부 '나의 살던 고향은'부터 8부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발걸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일대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당찬 어린 시절, 베트남에 건설 일을 하러 온 반려자와 만난 청년 시절, 한국으로 이주해 며느리이자 어머니로 분투한 세월, 짓밟히는 노동자를 위해 통역을 하고 공동체를 결성한 날들을 한국어로 썼다. 이웃의 내력을 알게 하는 배려에 한 자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이야기 앞부분, 베트남의 사상교육에 회의적이었던 지난날을 회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상 깊다. "미국을 이긴 과거에 집착하고 가난한 현실과 막막한 미래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학생들에게 단 한번도 교육하거나 토론하는 적이 없는 (베트남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다"라고 쓰기 과제를 제출한 그는 학교 선생님에게 불려가 '그러지 말 것'을 종용당했다고. 불의에 맞서는 그의 심성은 고국에서부터 내재된 올곧은 성질과 닿아 있다.
한글과 한국에 익숙해지라는 강압 가운데서
사실 고용허가제의 허점을 고발하거나 이주민의 생각을 인터뷰로 살뜰히 기록한 내국인 이주활동가가 쓴 책은 많다. 각기 다른 이주민의 생활을 소개하는 책도 소중하지만, 온전히 이주민 당사자의 목소리로 이뤄진 책은 보기 드물었다. 그래서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외침 안An>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다(뻐라짓 뽀무 외 34명이 쓴 <여기는 차가운 기계의 도시란다>의 출간 역시 그러했다).
특히 그가 한국에서 겪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폭력'을 언급한 대목은 주위에 단 한 명의 이주민이 친구나 동료로 살고 있다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국뽕'에 조금이라도 취한 적 있다면 이 문장들을 읽고 조금 뜨끔할지도 모른다.
"베트남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자신들의 전통음식을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전통 음식을 먹지 않는 외국인에게 싫은 기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은 김치, 고추장, 된장이 최고의 음식이라고 권유하면서 먹으라고 권유하고, 그 음식을 먹지 않는 외국인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외침 An>(응웬 응옥 깜) 중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는 외국인을 환대하는 문화가 국내에 자리잡힌 지 꽤 된 듯하다. '국뽕'에 취한 일부 내국민들 바람과 달리, 대다수 이주민들은 새로이 이주한 곳에서 자녀들에게 때때로 모국어로 자장가를 불러주고 모국어로 된 동화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바인깐(쌀국수)처럼 어린 시절부터 먹었던 고향 음식이 그립고, 한글을 빨리 익히라는 시댁의 강요에 자신의 정체성을 부러 숨기면서도 어느 날은 벼랑에 몰린 듯 숨이 가빠진다.
정부가 발행하는 이주민 주제 간행물만 보더라도 한국문화에 '자연스레' 녹아든 결혼이주여성의 생활상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허다하다. 한복을 입고 있거나 한국 요리를 배우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같은 내국민들의 욕망을 시원하게 고한다. 더불어 "내 아이들로부터 '엄마 사랑해(메어이, 꼰 트엉 멜람)"이라는 말을 모국어(베트남어)로 들어보고 싶다는 자신의 오랜 바람도 허심탄회하게 고백한다.
책 끄트머리에 실린 저자의 또 다른 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국어로 쓰는 '나의 서울살이' 공모전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저자의 글 '언제 우리 아이들이 나의 말을 할 수 있을까?'를 놓치지 않기를.
가족 중 누군가를 이주민으로 둔 자녀라면, 부모가 털어놓지 못한 가슴속 이야기를 저자의 수기를 통해 맛보기하듯 만날 수 있다. 결혼이주민은 양육자로 불리기 전에 엄연히 나고 자란 곳, 자기만의 뿌리를 지닌 '환대받아야 할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노동자의 여권과 통장까지 관리하는 상사
책에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근무지 변경이 어려운 고용허가제는 노동자의 피와 뼈를 갉아 먹는다. 저자가 대표로 있는 이주민센터 '동행'에 상담을 청하는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이 사업장 이동을 불허하는 고용주 탓에 곤혹을 치른다.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바꾸려면 사업주의 동의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어려운 경우, 성폭력 혹은 폭행을 당했다는 사유를 들어 진정서를 내거나 혐의를 입증해야만 일자리를 옮길 수 있다.
국내 이주노동계 중에서 착취가 심하기로 악명을 떨치는 곳은 바다 위. 어업에 종사하는 이주민 노동자의 여권과 월급 통장을 선주가 보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저자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주민의 일자리 이동을 선주를 어르고 달랜 끝에 가까스로 허락받은 일화를 들려준다. 건조된 새우를 따로 사주면서까지 선주의 마음을 샀던 일 등, "자존심을 던져야만" 양립 가능한 고용허가제의 민낯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저자가 곧바로 상담에 응해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을 바꿔 달라며 무시로 일관하는 선주민('먼저 살던 사람'을 뜻하는 말)의 태도, F2 거주비자를 취득하고 똑같이 세금을 납부했음에도 정부로부터 한국에서 낳은 자녀에 대한 보육 지원을 일체 받지 못했던 사연 등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하는 이야기들은 날카롭고도 분명하다. 소위 'K-컬처'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이주노동자를 괴롭히는 고용주 때문에 수십 번 분노가 치솟다가도 어떨 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 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는 응웬 응옥 깜은 말한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길에서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 국민경선 후보로도 나왔던 그는 국내에 사는 이주민들, 특히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정치 참여의 기회가 적다고 지적한다.
이주노동자들에겐 선거권이 없을 뿐더러(있으면 정부의 정책 기조가 180도 달라질 것이다, 득표 때문에라도), 실제로 생활권 대다수가 남편 명의로 돼 있는 이주여성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공적인 자리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저자는 "이주민이 한국에 정착해 사는 기간이 길어지고 구성도 변하면서 조기 정착을 위한 지원에서 생애주기형 지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씬짜오' 베트남 여성의 말걸기, <한겨레> 오피니언란 기고)"고 지적했다.
"다문화가정이라 그러나?"
저자의 자녀가 초등학교 시절 글씨를 못 쓰자 교사가 내뱉었다는 인격모독성 발언. 이런 발언은 이주민이 감내해야 할 당연한 '처지'가 아니라, 세계시민의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 선주민의 '무지'에서 비롯됐음을 익혀야 할 시점이다.
"보통 이주여성이라고 하면 누군가한테 도움을 받는다고만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요. 그리고 이미 충분히 돕고 있거든요. (중략) 지역사회에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요."
-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한인정) 중에서
고백컨대 '다문화'라는 말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대안어인 이주민과 선주민이라는 단어도 언젠간 낡은 단어가 되기를.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선거권에서 제외하고, 이방인 같은 존재로 틀에 가둔다면 구분 짓기를 통한 착취는 반복될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주민은 '일하다 가는 사람'이 아니라, 생의 고락을 함께 나는 사람이다. 시민이라는 책상 위에 우리가 함께 앉을 골든타임이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이주민에게 마이크를 허하라.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외침 안 An - 대한민국 다문화의 아픔과 희망을 담아낸 동행의 기록
원옥금(응웬 응옥 깜) (지은이), 가연(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