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법 짓는 마음>
유유출판사
그래서인지 책 초입에 언급된 저자 이보라의 별명에 눈길이 갔다. 김영란 전 대법관에 따르면 그의 별명은 '국회 귀신'. 같이 일하는 국회의원이 일에 몰두하는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라는데, 실제로 그가 입법에 참여한 법 이름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 가장 밀접한 이슈와 연관된 것들이 많다.
저자의 땀이 맺혀 만들어진 법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 선감학원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환경정책기본법 등등. 모든 챕터가 그가 참여하여 본회의를 통과해 제정된 법 혹은 제출, 발의된 법의 이름으로 명시돼 있다.
처음엔 법 이름으로 이뤄진 챕터 제목들이 낯설어서 어려운 전문서를 펼치는 느낌이었다. 이내 책장을 넘기면서 시민으로서 입법 과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당위를 알아갔다. 저자는 "사람들의 고통보다 항상 늦게 도착하는 법이 조금의 쓸모"를 더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온 '법'의 촘촘한 그물망을 펼친다. 입법의 이유가 먹고사는 사람들의 일과에서 비롯됐음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그 그물망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면 그간 국회를 둘러싼 세계에 관한 오해가 차츰 풀린다. 책상 자리에 앉아 어려운 법전을 뒤적이며 종이로만 씨름할 줄 알았던 보좌관들은 법의 언어를 생활에 긴요하게 녹이고자 발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때는 2018년, '디지털 장의사(당사자가 비용을 내면 온라인에 배포된 자료를 삭제해 주는 대행업체)'를 통해 삭제를 해도 무한대로 복제되는 탓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불법 영상물이 판을 쳤다. 당시 저자가 근무했던 의원실은 경찰청을 비롯해 여가부, 방심위, 방통위에 '디지털 성폭력 사건의 피해‧수사‧검거 현황' 자료를 요청받아 검토했다.
방심위는 웹하드 업체의 불법 데이터베이스가 잘 관리되고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상황. 하지만 완벽히 삭제됐다는 불법 영상물들이 또 다른 사이트에 버젓이 올라와 피해자들을 지난하게 괴롭혔다. 저자는 사이버 성폭력 수사 담당자로부터 수사 기법 매뉴얼을 제출받아 검토하던 중 한 IT 전문가를 통해 업계의 불법 관행을 알게 된다.
웹하드 업체와 필터링 업체의 유착 사실을 알던 전문가는 업체가 경찰의 모니터링을 우회하는 기술 수법을 쓴다는 사실을 제보한 것. 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과 저자는 집요한 모니터링을 통해 웹하드 업체가 꼼수를 쓰는 '결정적인 장면'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웹하드 실시간 모니터링을 하는 경찰의 눈을 피해, 표준시 프로그램(인터넷을 통해 컴퓨터의 시각을 대한민국 표준시에 일치시키는 프로그램. 경찰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불법 업체들의 관행을 적발함) 작동이 감지되자 범죄 업체는 '불법 의혹이 없는 화면'을 때맞춰 보여 주는 수법을 썼고, 그 찰나를 포착한 것이다.
이를 녹화한 장면은 보좌진을 거쳐 방송사 기자에게 제보됐고, 2018년 국회 경찰청 첫 국정 감사장에 그대로 상영됐다. 입법의 단초가 마련되는 순간들이다.
법은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할 책임이 있다
저자가 근무했던 의원실은 당시 국정감사에서 불법 게시물을 건당으로만 확인하는 경찰청의 사후 조치 중심의 수사를 지적한다. 정밀 수사를 요구한 끝에 경찰은 웹하드 업체와 인터넷 데이터센터를 압수 수색해 범인들을 검거한다. 이후 처벌 강화와 피해자 보호 조치를 포함한 '웹하드 카르텔 방지 5법'이 만들어진다. 국내에 웹하드 카르텔의 불법 구조를 처음 알린 사건이었다.
"국회가 국회의 언어에 갇혀 있지 않고, 피해자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뒤 집행자의 언어로 질의하니, 경찰이 단박에 피해자 입장에서 움직이는 것을 봤다." - <법 짓는 마음> 중에서
불합리한 현실이 당사자의 요구로 시정될 수 있다는 입법 노동자의 감수성이 없었다면?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법의 그물망은 더욱 느슨해졌을 것이다. 그동안 저자는 사회적 참사가 벌어진 현장 곳곳을 누벼 왔다. 강정마을을 비롯해 세월호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 산업재해 사망자들로 유족들이 오열하는 현장을 쏘다니며 '제각각 할 말이 있었을' 시민들의 얼굴을 복기해왔다.
그는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할 책임이 있는 법이, 우리의 인생과 결코 동떨어진 곳에 있지 않다고 책을 통해 힘주어 말한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죽음'을 핑계 삼아 방치를 일삼는 국가의 민낯을 매일 가까이서 보는 마음이란 어떨까. 국회에서 일하면 누군가의 죽음도, 억울함도 기계처럼 대하는 타성에 젖지 않을까. 피켓을 든 시민들 사이에서 무심한 '회색의 마음'을 가질 법도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민원을 제보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테이블에서 마주할 때마다 마음을 앞세우지 말 것을 되뇌었다고 한다. "공감은 당위고 해결은 의무"라는 목표로 누군가의 '외마디'가 '타인에게 이해되는 말'이 될 때까지 법을 통해 사회 시스템을 갖추는 일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보좌관 홍지현도 <대한민국 국회 보좌관입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국회의원 보좌진을 정치 활동이라는 틀에 국한해 바라보는 나머지 직원들이 국회의원이라는 입법기관을 작동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그 능력과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 <대한민국 국회 보좌관입니다>(홍주현)
노동자의 기본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질의서를 쓰면서도 정작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밤 12시에 일하는 사람들이 국회에 있다. 각종 선거 준비와 국정감사, 예산안 심사 등 숨 가쁜 한해살이 가운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법에 녹이고자 납작해진 마음으로 사투를 벌이는 보좌관들.
그들은 권력의 암투가 펼쳐지는 드라마 속 격정적인 캐릭터들이 아니다. 시민들의 곡절과 바람이 법으로 스미길 바라는 또 하나의 시민이 그곳에서 밥을 짓듯 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면 저자는 평범하게 이해되길 바랄 것이다. 법의 세계 또한 그리 이해될 수 있도록.
법 짓는 마음 - 당신을 지킬 권리의 언어를 만듭니다
이보라 (지은이), 유유(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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