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전투의 마지막 방어선 원창고개의 현재 모습.
윤태옥
28일이 됐다. 3일간 춘천을 사수하던 6사단은 원창고개에 춘천 최후의 방어선을 준비했다. 인민군의 포격은 원창고개에 집중되었고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고전이 계속됐다. 정오가 되면서 모래재(서울양양고속도로 조양IC 남측)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로써 춘천에서의 전투는 끝났다.
춘천전투의 핵심은 인민군 2군단을 국군 6사단이 춘천지역에서 3일 동안 막아냈다는 점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사는 한국전쟁을 초기 전투(6.25~28), 한강방어 전투(6.28~7.3), 지연 작전(7.1~31), 낙동강 방어 전투(8.1~9.23), 인천상륙작전(9.15~18), 서울탈환작전(9.16~28) 등으로 구분한다.
6사단조차 춘천에서 뚫렸으면 인민군 2사단은 가평을 거쳐 수원을 측면에서 공격했고, 그러면 수도권의 국군 전체의 퇴로가 막히면서 전세는 최악 중 최악이 되었을 것이다. 한강방어 전투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고, 미군이 신속히 참전했어도 낙동강까지의 지연작전은 한달이 아니라 1~2주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낙동강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 어느 한 곳을 돌파했더라면 부산은 '부산 철수', 곧 보트피플의 아수라장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6사단이 춘천에서 3일을 막아낸 것은 나라를 구한 전투라는 수사가 기념식장의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평가는 국내의 전사 연구에 앞서 적군에서 먼저 나왔다. 김일성은 춘천을 적시에 돌파하지 못한 것을 질책해 동북항일연군 동지였던 2군단장 김광협과, 소련군 출신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최춘국을 전쟁 중에 교체해 버렸다. 당시는 물론이고 전쟁 이후에도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우리에게 제대로 인식되진 않았다.
춘천전투에 대한 우리 측의 평가를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는 훗날 소련과의 수교 이후 소련에서 왔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가 소련의 기밀해제 문서에서 확인한 바, 북한의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가 "북한군이 춘천지역에서 3일간 발이 묶이며 전체적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 보고서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1980년대 초 '춘천대첩'이라는 찬사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2003년부터 국방부와 육군 2군단이 춘천대첩 기념행사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백선엽의 1사단은 왜 허무하게 무너졌나... 흔적 없는 반성과 성찰
춘천의 여러 전적지를 답사하면서 나는 한 가지 인색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한국전쟁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김일성의 죄업을 평가하고 단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하는 변수가 아닌 것이 현실이다. 그에 반해 성찰이란 맥락에서 내부로 향하는 첫 번째 질문은 왜 북한의 남침에 버금가는 북진통일 전쟁을 준비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과 국방장관과 총참모장 등 군의 통수권과 그 집행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앞의 글에서 언급했었다.
두 번째로는 전선의 지휘관들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바로 춘천에서 던지게 된다. 그날 그 시간, 동일한 여건에서 국군 6사단은 인민군 2군단을 3일간 막아냈는데 다른 사단들은 왜 그렇게 허무하리만큼 무너졌을까. 여러 사단 가운데서도 편제를 제대로 갖춘 완편사단이었던 1사단(백선엽) 7사단(유재흥) 수도사단(송요찬)만큼은 이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구체적으로 우리 정부는, 우리 군은 어떻게 성찰하고 반성했는지 궁금하다. 국방부가 펴낸 1천 쪽에 달하는 공간사(公刊史)를 훑어보았지만 내 독해력이 부실했는지 6사단의 초기전투와 대비시키는 패전에 대한 절실한 성찰은 없는 것 같다.
혹시라도 '저 놈 나쁜 놈'이란 프레임을 앞세워 자신에 대한 성찰은 슬그머니 덮어버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은 한국전쟁 답사여행 전반에 걸쳐서 변함없이 계속되고 글로 정리하는 지금도 그렇다. 성찰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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