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6 11:21최종 업데이트 23.09.1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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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대교 남단, 7호선 전철이 지나가고 있다. 청담대교는 위로는 차로가, 아래로는 철로가 지나가는 복합교량이다. 성낙선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다보면, 가끔 외국인들이 한강을 신기한 듯이 바라다보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들 입에서 연거푸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튀어나온다. 스마트폰을 들어 전철 차창 너머로 물 흐르듯 지나가는 한강 풍경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찍는 사람도 있다. 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강변 풍경마저 아름답단다.

우리 눈엔 그저 삭막하게만 보이는 그 풍경이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차창에 바짝 붙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눈엔 한강을 유심히 바라다보는 그런 외국인들의 모습이 더 신기하다.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한국을 처음 찾는 외국인들에겐 전철 안에서 내다보는 한강이 무척이나 색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런 모습을 보면, 새삼 그들 외국인들처럼 '태어나서 한강을 한 번도 안 본' 눈이 갖고 싶어진다. 한강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온 내 눈에도 한강이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는데, 한강을 한 번도 안 본 그 눈에는 한강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일까? 그 눈으로 다시 한번 한강을 바라보고 싶다.
 
반포대교 남단에서 바라본 무지개분수.성낙선
 
반포대교 다리 밑, 잠수교 위에서 바라본 무지개분수.성낙선

외국인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한강

자전거를 타고 처음 한강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 한강에 가 닿기 전에 먼저 중랑천을 만났는데, 그곳에서 바라다본 풍경만으로도 나는 이미 살짝 들뜬 상태였다. 중랑천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한국에 여행을 와서 처음으로 한강을 보게 된 외국인들의 심정이 아마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중랑천을 따라 내려가 드디어 한강을 마주하게 됐을 땐, 눈 앞에 펼쳐진 시원한 개방감에 가슴이 다 벅찰 지경이었다. 그때 내가 본 한강은 다리 위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곁눈으로 내려다보던 풍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왜 지금까지 이런 광경을 놓치고 살아온 거지, 후회가 됐다.
 
양화대교 북단 다리 밑.성낙선
 
그 뒤로 한강에 매료됐다. 갈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발견했다. 한강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한강에서 보냈다. 한강에서 김포로 구리로, 그리고 춘천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다 가 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점점 무뎌졌다. 이제 자전거를 타고 처음 한강을 마주하게 됐을 때 느꼈던 감동은 거의 다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때로는 심드렁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이쯤 되면 사실 지겨워질 만도 하다. 하지만 내가 한강 여행을 그만둘 날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

한강 풍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풍부하고 다채롭다. 기존의 풍경도 시간을 달리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때때로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여기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 내는 한국인들의 기질을 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전에는 그다지 눈여겨보지 못했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발견할 때도 있다.
 
광진교 남단 다리 밑.성낙선
 
광진교 남단 다리 밑.성낙선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색다른 풍경들

그런 풍경들 중에 요즘 내가 빠져 있는 건 '다리 밑'이다. 다리 밑에 뭐 볼 게 있냐고 말할 수도 있다. 다리 밑은 사람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공간에 불과하다. 다리 밑에 가면, 운동기구들이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을 흔히 본다. 다리 밑을 찾는 사람들은 산책 겸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다리 밑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 눈엔 잿빛 시멘트 구조물이 삭막해 보일 수도 있고, 그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신경에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다리 밑에서 접하게 되는 건 그게 전부가 아니다. 다리 밑에도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거기서 우리는 교각과 상판이 만들어 내는 또 다른 형태의 조형미술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 거대하고 육중한 선과 면이 모여 만들어내는 입체감이 매우 독특하다.
 
잠실대교 남단 다리 밑 야경.성낙선

비슷하게 생긴 다리라고 다 같은 다리가 아니다. 다리 밑에서 보면, 그 다리마다 다른 기하학적 문양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공룡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교각들이 소실점을 향해 연속적으로 달아나는 것 같은 광경을 보고 있으면 장쾌함마저 느껴진다. 인간이 만든 인공구조물 중에, 다리 밑 교각만큼 예술적 감흥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것도 드물다.

밤에 보는 풍경은 또 다르다. 다리 밑으로 조명이 켜질 때는 엉뚱하게도 이 풍경을 어떻게 다리 위로 옮길 수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런 풍경이 다리 밑에만 있을까? 내가 아는 한강은 풍경의 보고다. 그동안 내가 미처 보지 못한 풍경이 어딘가에 또 있다. 그러니 '한강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새로울 게 뭐 있어' 같은 말은 하지 말자.
 
강변북로를 떠받치고 있는 Y자 교각. 왼쪽에 원효대교가 보인다.성낙선

살다 보면, 일상적으로 '한 번도 안 본 눈'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한강에는 여전히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숨어 있다. 그때 우리에게도 아직 '한 번도 안 본 눈'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즘은 외국인들 중에도 한강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 한강의 다리 밑에선 또 어떤 풍경을 보았을지 궁금하다.

한강에는 모두 32개의 다리가 있다. 올해 완공 예정인 '고덕-구리간 다리'까지 포함하면 모두 33개다. 상당히 많은 수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다리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살다 보면, 위만 보고 아래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다리 밑에서 다시 한번 곱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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