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군의 전개와 변신
박종현
이들의 확군 과정은 3지대 경우만 봐도 쉽게 이해할 할 수 있다. 3지대는 1945년 11월 주덕해(훗날 옌볜조선족자치주 주석)가 이끌던 조선의용군과 이상조(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위)가 이끌던 조선인 부대가 합쳐진 것이었다. 3지대는 하얼빈 지역의 국민당 지방부대 토벌전에 참가했다. 이들의 첫 전투는 1946년 2월의 무란현 전투. 3지대는 빠른 속도로 연대 규모로 성장했다.
1948년 5월 무단장(牧丹江)의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1개 연대, 그리고 조선의용군 7지대와 합쳐 3개 연대가 편제되는 독립11사단이 됐다. 이들은 화전현의 도시방어와 치안유지를 맡았고 인근 지역에서 몰려든 조선인 청년들을 흡수했다. 독립11사는 1948년 11월 중국 인민해방군 164사단이 됐다.
1지대와 5지대 역시 3지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성장했다. 남만주의 1지대는 독립4사단을 거쳐 166사단이 됐다. 동만주로 향한 5지대는 옌볜의 조선청년들을 흡수하면서 독립15사단을 거쳐 156사단이 됐다. 1945년 11월 선양에 집결했을 때 1천 명 수준이었던 조선의용군은 그 다음해에는 1만 명 규모로, 1949년에는 5만여 병력으로 확군했다. 실로 엄청난 성장이었다.
만주조선인부대는 중국혁명에 참가해 간부를 양성하면서 조국혁명을 위한 역량을 키우겠다는 전략이었지만 상층 간부와 일반 사병의 정서는 좀 달랐다. 중국 공산당이나 조선의용군 상층부는 이념적 동지와의 국제연대를 대단히 중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이란 일본제국주의에 충성했던 앞잡이거나 밀정들이었다. 심지어 '아편 삐끼'들이라는 부정적인 인상도 있었다. 안중근과 같이 양쪽에서 존경받는 투사가 있기는 했으나 일상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의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도 민족갈등이 있었다. 옌볜에서 벌어진 토지개혁과 청산운동의 경우 중국인 간부들이 현지의 조선인 간부들을 차별적으로 숙청하기도 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으로 편제를 바꾼 다음에 만주조선인군대의 정책임자는 항상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부책임자에만 보임하는 것도 그랬다.
이런 기류 속에 국공내전의 만주지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조선인 대원들 사이에선 '이제는 조국으로 돌아가자'는 정서가 생겨났다. 만주의 승리 후에 베이징과 톈진까지 진공한 다음에는 '이제 할 만큼 다 했다'는 기류가 강해졌다. 창강을 넘어서자 이런 기류는 더욱 팽배했다. 중국 공산당 지휘부 역시 조선인 부대는 귀국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1949년 이들의 귀국을 요청했고 한국전쟁 전에 보병 10개 연대가 입북한 것이다.
그들은 왜 한국전쟁 전면에 나섰을까
1949년 7월 중국 인민해방군 166사단은 북한으로 들어가 즉시 인민군 6사단으로 개편됐다. 164사단도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됐다. 1950년 봄 156사단이 입북해 인민군 12사단이 됐고, 중국 4야전군의 조선인들을 집결시켜 편성한 부대는 정저우에 집결해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통해 입북해 인민군 4사단의 18연대가 됐다.
이들은 입북하자마자 즉시 북한 국적을 취득했고 중국 공산당 당원은 조선노동당의 당원으로 심사 없이 전환됐다. 심지어 군복도 한꺼번에 인민군 복장으로 일제히 갈아입었다.
이 시기의 귀국은 일제의 패망 직후의 귀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38선을 분단으로 인식은 했지만 아직 전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8년 남북의 정부가 따로 세워지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기정사실화했고 1949년부터는 국토완정이란 구호 아래 전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이승만은 북침을 감행하고 성공시킬 역량을 갖추지 못했지만 구호로는 '북진통일'을 줄기차게 외쳤다. 목소리는 컸으나 속은 부실했다. 김일성은 대외적인 공간에서는 화평(和平)을 외치면서도 내밀하게는 전면전을 준비해가던 하던 국면이었다. 만주조선인부대의 귀국준비도 달랐다. 귀국 직전의 군사교육은 돌격이나 폭파 등이 중점이었다. 그들의 귀국은 곧 전쟁이었다.

▲조선의용대 후자좡촌 전투기념비
윤태옥
조선의용군 지휘부는 왜 전면전에 동의하고 주력으로 나섰을까.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해 중국과 소련을 설득해서 감행했다. 그러나 조선의용군만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망국기에 자신들을 지원해준 동맹국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가했다. 거기서 그들은 성공체험을 했다. 내전에서 이기면 그것이 혁명의 성공이라는 것.
혁명이라는 수사 아래 내전은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사병들은 또 얼마나 죽어나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성공했다. 성공체험으로 인해 혁명은 전쟁이고 전쟁은 혁명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그들에게 더 강해진 것은 아닐까. 그것이 김일성의 전면전을 확고하게 받쳐준 것이 아닐까. 조선의 독립운동은 직접 성공하지 못했으나 중국 국공내전에서 승리했다. 실패 뒤의 성공이 다시 동족상잔이란 극단의 실패까지 몰고 간 게 아닐까.
다시 타이항산을 떠올린다. 산과 산은 멀리서 보면 첩첩이라 한 덩어리 같지만, 가까이 보면 계곡으로 나뉘고 능선 따라 이어지기가 복잡하게 얽힌다. 38선의 만주조선인부대 10개 연대는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과 정치적으로도 인맥으로도 직접 이어진다. 그와 동시에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 미소의 분할점령, 중국의 국공내전이라는 연접한 계곡들로 나뉘기도 한다. 하나인 듯 둘이고 둘인 듯 하나다.
앞뒤로 이어진 연봉들에 익숙한 이름들이 겹친다. 김원봉, 최창익, 무정, 방호산, 이상조, 주덕해, 김일성... 한국전쟁은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역사마저도. 독립운동의 여러 갈래는 분단이란 강요된 상황과 통일이라는 당위를 두고 서로 충돌하거나 연합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한국전쟁 역사를 읽어가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대 윤세주의 묘
윤태옥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릉원 조선의용대 진광화의 묘
윤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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