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동독 선거 포스터. 앙겔라 메르켈과 닮았지만 메르켈은 아니다. 메르켈의 대표 메시지인 '우리는 해 낼 수 있다(Wir schaffen das)' 문구가 눈에 띈다.
동독 출신 여성들이 정치와 경제계에서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앙겔라 메르켈이다. 서독 출신 목사의 자식으로서 기독교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메르켈은 여느 동독 여성들처럼 독립적으로 살았다. 훌륭한 (직업) 교육의 기회 속에서 과학을 공부했고, 물리학 박사가 됐고, 연구원으로 일했다. 자신의 결정으로 결혼했고, 이혼했다.
메르켈이 처음 정치계에 발을 들였을 때 '어린 이혼 여성'인 그를 모두 얕잡아 봤지만 메르켈은 개의치 않았다. 남성들은 동료일 뿐 묵묵히 그의 길을 걸었다. 메르켈이 서독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그토록 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메르켈과 여성
앙겔라 메르켈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불리기를 거부했다. 메르켈은 2017년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는 질문에 "알리체 슈바르처(Alice Schwarzer, 독일의 대표적 여성주의자 - 편집자주)처럼 여성운동에 정말로 투쟁한 여성들이 있다"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독일의 여성운동가들은 그의 애매모호한 답변을 비판했다.
독일의 여성주의자들은 메르켈이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충분히 힘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메르켈이 동독 여성임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남성과 여성이 거의 동등한 권리를 지닌 동독에서 여성운동은 크지 않았다. 동독 여성들은 이미 해방적이었다. 독일에서 여성주의는 여성 억압적 분위기의 서독 지역에서 치열했다. 메르켈은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을 드러내기보다 주류 속의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전략을 취했다.
메르켈은 특정 그룹의 정체성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지난 2019년 <차이트>와 나눈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동독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공감대를 나타냈다. 메르켈은 "남성이라면 100일 내내 남색 정장을 입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내가 2주 동안 같은 재킷을 4번 입으면 기사가 난다"고 말했다. 메르켈이 남녀 정치인의 불평등함을 언급한 대목이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편했던 점은 하나 있었다. "연방총리는 전통적으로 부인이 옆에서 봉사할 거라는 기대가 있는데, 나와 내 남편에게는 그런 기대가 없었다"고 메르켈은 말했다. 이 대목 또한 역설적이다. 남성 총리의 부인은 영부인으로서 봉사해야 하지만, 여성 총리의 남편은 영남편으로 봉사할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다. 메르켈의 장점 중 하나는 사생활 노출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독일 사회는 이미 메르켈을 '꾸며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메르켈과 동독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Wir schaffen das!)"
2015년 난민 위기 때 시작된 슬로건으로 앙겔라 메르켈을 대표하는 메시지가 됐다. 당시 독일은 단기간에 백만 명이 넘는 난민을 받아들였다. 이어 반 난민, 반 이슬람을 외치는 극우파의 득세가 시작됐다. 혐오를 먹고 극우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이 급성장했다. 다름 아닌 구동독 지역에서다.
구동독 사람들은 섭섭했다. 통일되고 나서 안 그래도 힘들고 억울한데 동독 출신 총리가 난민만 챙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리가 소속된 기민당(CDU)이 너무 좌파가 되었다고 토로했다. 구동독에는 새로운 기민당이 필요했고, 그 자리를 AfD가 꿰찼다. 처음엔 모두가 무시했지만 어느새 구동독 지역의 주요 야당으로 성장했다. 메르켈은 AfD의 성장에 일정 부분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
메르켈은 늘 "나는 모든 독일인의 총리"라고 응했다. 하지만 2019년 <차이트> 인터뷰에서 "동독에서 절망감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면서 구동독 사람들에게 공감을 나타냈다. 지난해 구동독 지역 언론사와 합동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는 "동독인이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