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어머니 한희전
박만순
'달뜨기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처럼 아름다웠던 한희전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월현리 출신의 그 여자는 김봉한과 내외의 연을 맺은 뒤부터 조선 현실에 눈을 떴다. 남편이 사회과학 서적을 주면서 학습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한계>, <레닌주의의 기초>, <볼셰비키 혁명사> 등 책을 김봉한이 보내면, 그 여자는 몇 번씩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중도에 작파하면 안 되오. 끝까지 읽고, 반복해서 읽으면 이해가 갈 것이오." 한희전은 남편이 권하는 대로 했다.
또한 혁명가요도 달달 외웠다.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의 노래는 모두 외울 정도였다. 이런 열성을 인정받아, 그 여자는 해방 후 부녀총동맹에 가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봉한 식구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김봉한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고, 그의 식구들은 북한군 점령기에 충남 보령군 명라면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김봉한의 아버지 김세진은 토지분배위원장을 맡았고, 안해 한희전은 여성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김봉한의 동생 김용한은 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혁명열사 유가족에 대한 예우였지만,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특히 한희전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한국전쟁이 나기 전부터 부녀총동맹 활동을 했고, 여성지도자로서 보령지역에서 인정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토지분배위원장을 맡은 김세진은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지 않았다. '토지분배위원장'을 맡은 것이 자의도 아니었지만, 그 직책을 맡고서도 자신은 땅 한 뼘 갖지 않았다.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었을 뿐이고, 자신이 그 수혜자가 되는 것은 철저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큼 청렴결백한 선비였다.
이러한 내력으로 그가 국군수복 후에 보령경찰서에 '부역자' 혐의를 쓰고 연행되었지만 김세진은 경찰서에서 따귀 한 번 맞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이 연판장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 어르신은 주민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붉은 씨앗이로군!"
김봉한의 아버지가 군경 수복 후에 처벌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집안이 무사했던 것은 아니다. 한희전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했고, 이후에도 그 여자는 투옥과 집행유예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아우 김용한은 대한청년단원들한테 맞아 죽었다.
나머지 식구들도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김세진은 대전경찰서 대공과에 연행되었다. 또한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에도 연행되었다. 즉,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김봉한 집안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요시찰인'으로 낙인이 찍혀 연행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김세진이 5.16 군사쿠데타 후 연행되었을 때 이야기이다. 그의 손자 김성동(당시 15세)이 청양 산지기 집에 피난 갔다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면회를 가기 위해 아래 무당집에서 쌀을 얻어왔다. 할머니가 밥을 해 할아버지 면회를 갔는데,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손자는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도시락 생각이 나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열었다. 게눈 감추듯 도시락을 먹어 치운 그는 '할아버지가 경찰서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김봉한 집안의 빨갱이 낙인은 그의 아들 김성동(1947년생)에게도 이어졌다. 1965년 입산한 김성동이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 가려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좌절되었다. 그가 불가에 들어갔다가 하산한 직후인 1976년에 또 한 번의 시련이 있었다. 지효 스님이 그를 다시 고마자와 대학에 보내려 했으나 신원조회에 또 걸렸다.
김성동이 할아버지 손에 끌려 대전으로 이사한 것은 1958년 찔레꽃머리였다. 아버지가 닦달 받았을 도청 옆 법원에서 하염없어 하던 끝에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이사한 집으로 갔을 때였다. 할아버지한테 "왜 여기로 이사 왔느냐?"고 종주먹을 대던 형사를 문밖에서 배웅하는데, 삵의 눈으로 돌아보며 뱉던 말이었다. "붉은 씨앗이로군."
'붉은 씨앗', 그 말은 김성동에게 평생의 상처가 되었다. 그러기에 자기 집안 이야기를 주변에 하지 못하고 앓듯이 살아왔다.
요산문학상(樂山文學賞) 수상 후 대성통곡

▲증언자 김성동
박만순
요산 김정한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려 제정한 것이 '요산김정한문학상'이다. 김정한은 왜제강점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일통과 반독재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주로 핍박 당하는 농촌현실을 주제로 소설을 썼는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문학가라 할 수 있다. 2019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문학상이 약 400개가 있는데, 요산문학상은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다.
그런데 김성동이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6회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 2019년 10월 상을 받았다. 김성동은 1978년 소설 <만다라>로 유명작가의 반렬에 올랐지만, 이번 수상의 기쁨은 <만다라>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보다 훨씬 컸다.
▲영화 만다라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 선 김성동
박만순
이번 수상 작품 <민들레꽃반지>(솔출판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집안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영예의 요산문학상을 받은 것이 기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금기어로 존재하던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공적 공간으로 부활한 것에 대한 기쁨이다.
사실 작가 김성동이 아버지·어머니 이야기를 공론화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성동은 소설가 안재성의 2013년 <이현상 평전>에 '남로당을 위한 변명'이라는 발문을 쓰면서부터 60여 년 동안 말 못하고 살아온 자신과 식구의 삶을 이야기했다.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분단시대의 왜곡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역사와 싸움을 선언했다.
그는 이후 여러 작품에서 해방공간의 정치·사회상을 객관적으로 그리기 위해 애를 썼고, 그것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요산문학상 수상이라고 본다. 김성동은 이 상을 수상하고 나서 대성통곡했다. 그간의 아픔이 일시에 폭발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혁명가들이 70여년 만에 역사에서 부활하는 모습은 그에게는 꿈에서나 그려왔던 이상향이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념의 대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김성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한 단계 진전된 사회를 만드는데 고귀한 디딤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 김성동의 뜻에 따라 '부부'를 '내외'로, '아내'를 '안해'로, '자살'을 '자진'으로, '역할'을 '구실'로, '공부'를 '궁구'로, '합격'을 '입격'으로, '일제'를 '왜제'로, '그녀'를 '그 여자'로, '타킷'을 '과녁'으로, '가족'을 '식구'로, '통일'을 '일통'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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