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 대기중인 대전형무소 재소자들트럭에 실려 산내로 이송된 재소자들(박도 사진집)
"광남아, 삼촌한테 가보자."
앞선 1949년 허훈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동생 허만(1927년생)을 면회하러 가면서 아내와 아들 광남(당시 8세)을 데리고 갔다. 면회 절차를 거쳐 허훈 내외는 면회장으로 갔다. 면회장으로 나온 허만은 조카에게 "큰조카 왔어?"라며 살갑게 대했다. 하지만 조카 허광남은 얼굴에 용수를 쓴 삼촌이 너무나 무섭기도 하고 어색했다. 그래서 면회장을 나와 형무소 마당으로 갔다. 마당은 토끼풀로 뒤덮여 있었고, 광남은 네잎클로버를 찾느라 정신을 뺏겼다.
1949년 11월 경찰에 연행된 허만은 1950년 3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재판 결과, 허만은 집행유예를 받아 석방돼 회덕면 읍내리 고향으로 갔다. 그가 구속되기 전 근무했던 대전철도청에서는 이미 면직된 상태였다.
허만이 집행유예로 석방된 지 3개월 만에 6.25가 터졌다. 전쟁이 나자마자 대전경찰들은 보도연맹원들을 잡아들이는 한편 소위 '좌익'들도 검거했다. 이른바 '예비검속'을 단행한 것이다. 허만은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대덕군 산내에서 불법적으로 처형됐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
한국전쟁이 나자 허봉춘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다. 셋째 허만은 산내에서 학살되고, 둘째 허용은 회덕과 신탄진에서 인민위원장 감투를 썼고, 장남 허훈은 피난길에 올랐다. 허훈은 대전철도국에 근무했는데, 부산으로 피난가려고 하다가 아버지 허봉춘의 반대로 전북 금산 진산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그곳에서 노부모와 함께 4개월을 지냈다.
그해 가을 허훈은 전북 금산에서 대전철도국 직원관사로 돌아왔다. 당시 대전시 삼성동 101번지에 있었던 직원관사는 방 1개, 부엌 겸 거실로 이루어졌다. 요즘으로 치자면 원룸이었다. 그곳에서 허훈은 아내, 그리고 5남매와 한 방에서 생활했다. 한 겨울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허훈은 한국전쟁 직후 땅을 치며 후회했다. 자신의 영향을 받아 대전철도국에 입사한 동생 허만이 자신과 함께 있었더라면 죽음을 면했을 거라는 후회였다. 허훈의 아들 허광남의 증언에 의하면, 허만은 해방 이후 철도국에 입사하면서 좌익사상에 공명해 남로당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똑똑하고, 힘도 장사였던 허만은 인물도 훤칠하고 직장도 안정되어 모두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반면 피난길에서 돌아온 허훈은 국군이 북한지역을 공격할 때, 기차에 군수물자를 싣고 평양과 원산까지 간 내력으로 후일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북한군 점령 시절 대덕군 회덕면 여맹위원장을 역임한 허용의 아내 이생화는 부역 혐의로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석방된 그녀에게 어느날 대전경찰서 사찰과 형사가 찾아 왔다. "여기서는 살기 힘드니 미국으로 이민 가라." 그렇게 해서 이생화는 남편이 부재한 땅 대한민국을 떠났다. 어린 자식은 올케에게 맡겨 놓았다. 아들과 생이별을 한 것이다.
"더 이상 삼촌 같은 피해자가 없기를"
▲증언하는 허광남
박만순
대전형무소에서 용수를 쓴 삼촌을 본 허광남(77세, 충북 청주시 내수읍 은곡리)은 대전 삼성초등학교를 나와 대전중학교, 대전상고를 졸업했다. 그는 1962년 공군 하사관에 지원해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허광남이 하사관 교육 3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 보안대에서 호출이 왔다. 보안대 장교의 첫마디는 청천벽력이었다. "이 새끼 빨갱이 집안이네. 퇴교해!" 허광남은 고모 허순에게 SOS를 보냈다. 고모의 지인이 공군 감찰실에 있어서 신원조회는 무마되었다. 하지만 동료들보다 진급이 항상 늦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허광남은 팔십을 앞둔 나이에도 삼촌이 자신에게 주었던 애정을 기억한다. 때문에 삼촌의 명예회복을 위해 부단히 애썼다. 결국 삼촌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2010년 상반기에 진실규명이 결정됐다. 2019년 현재 청주시 내수초등학교에서 아동지킴이를 하고 있는 백발의 허광남은 "역사에서 더 이상 삼촌 같은 피해자가 없기를 바란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