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전태환
박만순
지에무씨(GMC) 트럭 적재함 귀퉁이에는 총을 든 경찰들이 눈을 번득였다. 머리를 바닥으로 향한 보도연맹원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양쪽 끝을 팽팽히 잡아당긴 고무줄처럼 트럭에 실려 있는 보도연맹원들에게는 긴장감이 더했다. 산내를 향해 질주하던 트럭이 모퉁이를 돌며 속도를 늦추었을 때였다. 한 사내가 순식간에 트럭에서 뛰어 내렸다. 사방에 있던 경찰들의 다급한 목소리와 총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저 새끼 잡아!" "탕탕탕" 하지만 트럭에서 뛰어 내린 이는 다람쥐처럼 잽쌌다. 죽기 살기로 도망가는 이를 경찰들이 당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또한 경찰들은 트럭에 태워진 나머지 보도연맹원들을 골령골로 끌고 가야하는 임무가 있었기에 도망간 이를 더 이상 뒤쫓지는 않았다. 트럭에서 용감하게 뛰어내려 도망친 이는 평소에 전태환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는 후일 전태환의 아내에게 남편의 마지막 상황을 전해 주었다.
집안의 대들보 전태환이 죽었다는 소문은 본가인 충남 부여군 임천면 만사리에도 순식간에 전해졌다. 대전 원동 아들네 집으로 달려온 어머니는 그날부터 점집 순례를 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야,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도 없고, 설령 죽었다면 언제 죽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점집 몇 군데를 돌았을 때 한 곳에서 죽은 날짜까지 확신을 갖고 이야기 했다. "(음력) 5월 27일여!" 그 소리를 듣자 전태환의 어머니는 졸도를 했다. 깨어난 후부터는 곡을 했다. 이후부터 어머니는 음력 5월 26일을 아들 제삿날로 삼았다.
시어머니가 점집을 순례하는 동안 며느리는 골령골을 미친 듯이 다녔다. 골령골에서 수천 명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혼자서 수십 일 동안 남편을 찾으러 다닌 것이다. 세 살짜리 큰 아이는 집에 홀로 남겨 놓았다. 그때 만삭이었던 그녀는 새벽에 달걀을 삶아 놓고 집을 나선 뒤 하루 종일 시신 사이를 오갔다. 삶은 계란으로 수십 일을 버틴 세살배기 전순옥은 영양실조에 걸렸다. 딸이 죽을까봐 덜컥 겁이 난 김진태는 친정집에 아이를 맡겨놓았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삶
"이 X아 당장 나가."
"어머니 왜 그러세요?"
"시끄럽다. 남편 잡아 먹은 X이 뭔 말이 많아. 당장 나가!"
나이 스물에 시집 와 딸 둘을 낳은 김진태(1929년생)가 쫓겨나는 순간이었다. 남편 전태환이 죽을 당시 뱃속에 있던 둘째는 낳고 보니 딸이었다. 아버지 얼굴을 구경도 못해 본 전선옥은 1950년 9월 25일 태어났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독기를 품은 눈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다. 둘째 선옥이를 업고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 모자원에 몸을 의탁했다. 둘째 선옥은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내다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부여로 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갔는데, 삼륙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사망했다.

▲전순옥(오른쪽)-전선옥 자매
박만순
전선옥은 다시 부여로 와 대전상회 경리로 취업했지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의 구박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한 게 그녀의 한이었는데, 할머니는 아버지의 부재를 어머니와 자신의 탓으로만 돌렸다.
큰딸 전순옥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6.25 때 학살당하고, 어머니는 쫓겨나고, 동생 역시 생이별을 해야 했다. 개구리 먹고 살아난 전순옥은 대전에서 농촌지도소 사환을 시작으로 농촌진흥원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서울로 올라가서는 고속버스 안내양도 했다. 당시 고속버스 안내양은 요즘으로 치면 스튜어디스에 버금가는 인기 직종이었다. 대전으로 내려와서는 삼진고속버스에서 신입 안내양 교육을 맡았다.
전태환의 어린 동생 전영락은 형의 각별한 보살핌으로 국민대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때문에 대전광역시 동구 부구청장까지 지낸 전영락은 형에 대한 진실규명에 애썼다.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 형의 진실규명을 요청해 2010년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사건'이 진실규명 결정되었다. 그렇게 형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졌다.
'진실규명결정문'을 받은 날 전씨 집안은 울음바다였다. 큰딸 전순옥(72세,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한 설움에 아무 말도 못했다.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전선옥(70세,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매탄동)은 당시를 회상하며 눈물만 흘렸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말을 아끼면서도 할머니에게는 애증의 마음을 드러냈다.
"할머니는 술만 잡수면 길거리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당신 자식 이름을 부르며 펑펑 울었어요."
금쪽같은 아들의 죽음은 어떠한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게다가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과 책임이 정확히 무엇인지 끝내 알 수도 없었다. 보고 싶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 눈을 감은 전태환의 어머니도 전쟁과 국가폭력의 피해자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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