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문문흥
박만순
그날 이후 문문흥은 도망간 동생 때문에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툭하면 진잠지서에 연행되어 구타당했다. 지서마당으로 끌려가서 경찰 여럿한테 집단뭇매를 당하는, 그야말로 '동네북' 신세였다. 1950년 봄 어느 날 또 끌려간 문문흥은 경찰들의 군홧발에 차여 지서 근처에 있던 동구나무까지 굴러갔다.
1950년 초 충남 대덕군에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면서 좌익과는 전혀 관련이 없던 문문흥이 1차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동생 대신 형이 가입된 것이다. 몸을 피했던 문육봉도 1950년 초 대덕군 기성면 흑석리에서 경찰에게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눈썹 밑에 흉이 있어 찾기 쉬울겨"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문흥은 마을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었다. 젊은이 7명이 '밤고개'를 넘어 지서로 향하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이들은 진잠지서에서 덕고개를 넘어 유성경찰서로 이송되었고, 다시 대전형무소를 경유해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문육봉도 비슷한 시기에 산내에서 학살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문흥, 문육봉 형제가 산내 학살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날 '밤고개'를 넘은 이들은 문문흥과 이용재, 이성기의 아버지와 숙부, 김복술, 이○○, 송○○이었다. 문문흥의 아버지 문공삼은 아들이 산내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산내를 휘젓고 다녔지만 아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문문흥과 같이 끌려갔던 이용재(당시 27세)의 집도 난리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이용재의 조카 이순재(82세, 대전광역시 유성구 상대동)는 당시 할아버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용재는 눈썹 밑에 흉이 있어 찾기 쉬울껴."
그렇게 자신했던 그지만 산내 학살현장에 도착하니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수천 구의 시신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찾는다는 것은 당최 불가능했다.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 이용재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일주일 넘게 식음을 전폐했다.
이용재의 갓난아기는 아버지가 끌려간 지 2년도 안 되어 당시 횡행하던 전염병으로 세상과 작별해야 했다. 아기가 죽자 이용재의 아내는 집을 떠났고 남은 식구들의 마음의 상처는 더욱 커졌다.
"경찰이 오면 말 좀 잘해주시오"

▲문옥성가수원역 근무시 문옥성(뒷줄 맨 좌측)
박만순
아버지 문문흥이 산내에서 학살된 후 문옥성은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다. 중학교 진학은 애초에 기대할 수도 없었던 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머슴처럼 일을 했다. 동네 아저씨들과 함께 매일 품앗이로 일했다.
경기도 파주에서 군 생활을 한 그는 제대 후 철도청에 취직했다. 1968년이었다. 충남 대덕군에 소재하고 있던 가수원역과 연기군 전의역, 충북 옥천역에서 여객 업무를 담당했다. 문옥성이 철도청에 취직할 때의 이야기다.
"진잠리에 주막이 있었는데요. 어머니가 주막 주인에게 '경찰이 오면 말 좀 잘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문옥성의 어머니가 아들의 철도청 취직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 마을 유지였던 주막주인에게 사정을 했던 것이다. 국가폭력에 의해 한국전쟁 때 학살된 이들의 유족이 경찰들의 신원조회로 2차 피해를 입었던 시대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장에 근무하면서 승진 때마다 신원조회로 여러 차례 불이익을 받았다.
추모시에 눈물 흘려
이승만이 달아 준 살인 허가장 이마에 달고
한 손에는 일본도요 또 한 손엔 미군총을 들고
동족 학살 저지르는 광견들 피의 축제
아비들은 제물 되어 백만 인이 죽었으니
저 간악한 혓바닥은
전쟁고아 만들어 내는 산실청이었소
(중략)
가시덤불 우거진 골령골 골짜기마다 헤매는
저 흰 머리 날리는 고아들을 보라 (하략)
산내 희생 유족이자 시인인 전숙자가 지난 여름 산내에서 열린 '대전산내 합동추모제'에서 낭독한 <학살 육십 년>이란 시다. 추모제에서 전숙자의 낭독을 들은 문옥성(82세, 대전광역시 유성구 계산동)의 눈에는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팔십이 넘은 나이지만, 그녀의 시를 들을 때마다 6.25 당시의 상황이 연상됐다.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어이없는 죽음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현재 노인회 활동에 열심이다. 대한노인회 유성구지회 부회장이자 진잠동 분회장이기도 하다. 진잠동에만 경로당이 35개이다 보니 정신없이 바쁘다. 그런 와중에도 산내유족회에서 위령제나 큰 행사가 열리면 꼬박 참석한다. 아버지와 숙부의 억울한 죽음이 잊히지 않아서다.
문옥성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마을에서 죽었던 이들은 명예회복되지 못했다. 그들도 명예회복의 길이 빨리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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