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하루 괴한에 의한 불의의 습격 없이 제 명에 살고 싶은 평범한 한국 여성이다(자국민이지만 굉장히 힘든 일이다). 취미는 인터넷 커뮤니티 훑기인데 최근 어느 날도 게시판을 읽어 내리던 중 한 수험생이 올린 EBSi 수능 강의 고발 글을 읽게 됐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쓴 흔적이 역력한 글이었지만,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많은 수험생들이 보는 수능 강의 문제 예시로 여성을 살해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는 것이었다.
 
글을 보고 해당 강의를 확인하게 됐다. J 수학 강사의 '수능 특강 확률과 통계' 31강 조건부확률(1) 편이었다(강의 오픈은 지난 5월 1일). 강사는 강의 도중 자체적으로 예시를 들었다. 
 
 EBSi '수능 특강 확률과 통계' 31강 조건부확률(1) 강의 장면

EBSi '수능 특강 확률과 통계' 31강 조건부확률(1) 강의 장면 ⓒ EBSi


"우진이가 미영이(she) 집에 침입해서 강도짓을 할 확률. 윤석이가 오늘 미영이네 집에 가서 미영이를 죽이고 돈을 갈취하는 강도짓을 할 확률. 영준이가 오늘 미영이네 집에 가서 그런 나쁜 짓을 할 확률."
 

칠판 오른쪽 상단부에는 빨간 분필로 '19금 어린이나 노약자, 임산부 시청주의'라고 쓰여 있었다. 강사는 여기에 덧붙여 "이러한 살인 사건 말고는 조건부 확률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이걸로 수강 후기를 쓰지 마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부적절한 예시에 항의 및 삭제 요청 댓글

이후 수강후기 게시판에는 강사에게 실망을 표하거나 해당 부분 삭제를 요구하는 몇몇 이들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한 수강생은 "남자인 선생님은 피부로 잘 와닿지 않아서 31강에 가슴으로 와닿는 예시로 여성 살인사건을 쓰신 건가요?"라며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위협을 당하거나 살해 당합니다. 저 장면을 지워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댓글에는 "프로불편러다" "메갈이네" 등 문제제기 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 글이 달리기도 했다. 

필자는 이에 대한 EBS측의 입장을 듣고 싶었다. 지난 10일 EBS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어 해당 영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사과문 게재를 요구했다. 이후 13일과 15일, 20일 세 차례 통화하면서 "지적해 주신 부분은 삭제하고 수정해서 다시 업로드 했습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EBSi 수능교육부 한 관계자는 통화와 문자 답변에서 "J 선생님은 평소 여성을 혐오하거나 다른 종류의 편견을 가진 분이 절대 아닙니다"라며 "다만 '확률과 통계'라는 과목에서 어떤 예를 들어야 학생들의 이해가 좀 더 쉬울까라는 고민의 과정 중에 영화의 사례를 빌려 설명하신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녹화 전 사례가 적절한지 자문을 구하고 강의 중에도 학생들의 이해를 위해 영화를 인용한 것이니 오해를 하지 말아 달라고 여러 번 부탁을 하셨습니다"라며 "앞으로 좀 더 신중하게 제작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후 며칠 뒤 온 추가 답변 내용에서 관계자는 "접수된 민원 내용을 J 선생님께 전달하고 추후 이런 일이 절대로 발생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했습니다"라며 "선생님께서도 주의하겠다고 했고, 다시는 이런 문제가 발행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라고 덧붙였다. 

빠른 삭제 조치는 긍정적이지만... 찜찜함은 여전
 
 EBSi '수능 특강 확률과 통계' 31강 조건부확률(1) 강의 장면

EBSi '수능 특강 확률과 통계' 31강 조건부확률(1) 강의 장면 ⓒ EBSi

 
EBS 측이 항의를 받은 뒤 비교적 빨리 해당 영상 부분을 삭제하는 등 조치를 취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듣는 강의 예시를 범죄 사건으로 들었다는 점은 찜찜한 뒷맛을 남긴다. 더구나 지난 10월(사회탐구 강사의 박근혜 전 대통령 비하 발언)과 2010년(수능 강의 진행하던 강사가 "남자들은 군대에서 (사람) 죽이는 것을 배워온다"라고 발언) 사례가 발생했을 때 EBS측은 해당 강의 영상을 모두 삭제하고 퇴출하겠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 비하와 관련해서는 사장 명의의 사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이와 비교했을 때 이번 EBS측의 반응이 다소 아쉽기는 하다.

EBSi 강의는 대한민국 60만 수험생이 보는 교육영상으로서 대다수의 시청자가 미성년자에 속한다. 학창시절이야 말로 성별이 아닌 성적으로 정정당당하게 경쟁자들과 겨룰 수 있는 때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여성혐오 강의를 듣고 자란 학생들은 과연 어떤 사고방식을 갖게 될까?

특히 여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도 어느 날 알지도 못하는 남성에게 살해 당할 수 있다는 걱정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될까봐 걱정스럽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성의 죽음을 재미와 흥미의 소재로 희화화해선 안 된다. EBS측과 해당 강사가 이번 일을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받아들여 강의 제작에 더욱 신경을 썼으면 한다.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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