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앗, 독립애니메이션 배급


과거엔 촉망받는 연기자였지만 탈모 증세에 배까지 튀어나온 40대 오준구(이승행). 꿈을 잃고 가족을 위해 대학 시간강사로 힘겹게 버티던 그에게 어느 날 정교수 자리와 드라마 캐스팅이란 두 가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온다. 갈림길에서 망설이던 오준구는 아들이 남의 자동차를 망가뜨리는 사고를 저질러 합의금이 필요하자 어쩔 수 없이 정교수를 선택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자리를 물려주겠노라 약속한 노 교수가 성범죄에 연루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갈 처지에 놓인다. 오준구는 성희롱을 고발하려는 여학생을 막으려 동분서주한다. 지난 1월 25일 개봉한 영화 <반도에 살어리랏다>의 이야기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애들이나 보는 거라고 치부하는 어른들의 시각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은 섣부른 선입견에 불과하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문학, 미술, 음악, 영화처럼 인간의 삶과 욕망을 담고 있으며 고유의 표현법으로 다른 매체들과 차별을 형성한다. 단지 어린 연령대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 많을 따름이다. 성인을 위한 작품들도 엄연히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성인용 애니메이션, 성인들에게 더 와닿는 이야기

ⓒ 씨앗, 독립애니메이션 배급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과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이 협소한 국내 현실에서 성인용 작품들은 가물에 콩 나듯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 <블루 시걸>(1994)과 <누들누드>(1998)로 대표되던 성인용 애니메이션 시장은 현재 두 가지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 문제를 애니메이션에 담아내는 연상호 감독이 대표적이다. 그는 '스튜디오 다다쇼'를 통해 <창> <돼지의 왕> <사이비> <서울역>을 내놓았다. 연상호가 프로듀서를 맡고 홍덕표 감독이 연출한 <발광하는 현대사> <졸업반>도 스튜디오 다다쇼에서 태어났다.

또 하나는 <누들누드>처럼 섹스 판타지를 자극하는 18금 애니메이션이다. 극장이 아닌, 부가 판권시장을 겨냥한 <러브슬레이트> <에스워치> 같은 영화들이 여기에 들어간다.

평범한 40대 가장을 주인공으로 삼은 애니메이션 영화 <반도에 살어리랏다>도 성인용 애니메이션으로 볼 수 있다. 등급은 '15세 관람가'를 받았지만, 영화 속엔 잃어버린 꿈, 갑을 수직 관계, 강자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약육강식, 정교수 자리를 주고받는 은밀한 뒷거래, 성추행을 은폐하려는 부조리한 모습 등 오늘날 대한민국을 사는 성인들에게 와닿는 소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제작사가 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연출을 맡은 이용선 감독은 "오준구 뿐만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캐릭터들도 여러 가지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도록 블랙코미디를 섞었다"고 작품을 설명했다. 감독의 말 그대로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오준구의 딜레마와 주위 인물들의 욕망과 선택을 우스꽝스러운 소동극으로 그린다. 그러나 현실적이어서 '웃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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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내 박미경(이슬)의 목소리엔 교육의 불평등과 부동산 문제가 녹아있다. 아들 오현준(최채인)은 그 나이에 어울릴 법한 순진무구한 발상을 보여준다. 반대로 꿈을 포기하고 공무원이나 교사로 안정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중학생인 딸 오현서(강예솔)에겐 오늘날 대한민국 20대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 외에 노교수와 그에게 이용당하는 여제자 등 영화 속 인물들에겐 현실감과 명암이 깊이 새겨져 있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대목, 나아갈 것인가 타협할 것인가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이용선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단편 <얼론>(2010) <기억하려 하다>(2011)와 중편 <거대한 태양이 다가온다>(2014) <화장실콩쿨>(2015)로 작품 세계를 다져왔던 이용선 감독은 장편에서 갈고 닦은 내공을 아낌없이 발휘한다. <얼론> <기억하려하다> <거대한 태양이 다가온다>까지 희미한 서사와 수채화풍 그림체를 사용하며 실험적인 색채를 냈으나 <화장실콩쿨>부턴 화풍은 간결해지고 서사는 선명해졌다. 블랙코미디의 요소도 추가되었다.

작품의 외형은 바뀌었을지언정 주제는 변함이 없다. 그는 줄곧 관계를 주목한다. <얼론>에서는 "사람은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말을 내뱉고 <기억하려하다>에서는 "지금은 그 작가 아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란 대사가 들린다. <거대한 태양이 다가온다>의 주인공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라며 관계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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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콩쿨>의 주인공인 기러기 아빠를 확장한 느낌을 주는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대한민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관계를 유쾌한 톤으로 묘사한다. 영화 속에 실사와 그림으로 춤을 넣으며 실험 정신도 여전히 살려간다.

<반도에 살어리랏다>란 제목은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대목에서 가져왔다. 이용선 감독은 "작품이 '헬조선' 정서를 담고 있어 '헬조선'을 쓰려다가 반감을 고려해 대체할 만한 단어를 찾다가 '반도'란 단어를 생각했고 작품 후기에 추가된 한풀이 춤 컨셉을 살리고자 <청산별곡>의 문구인 '살어리랏다'를 붙였다"고 부연 설명했다.

2018년 대한민국을 비추는 <반도에 살어리랏다>도 <청산별곡>의 '청산과 바다에 머물 것인가, 예정지로 상징되는 공간으로 갈 것인가'란 해석과 맞닿는다. <반도에 살어리랏다>는 <청산별곡> 속의 갈등에 2018년 대한민국을 투영시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라고 묻는 셈이다.

오준구와 아들 오현준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관객을 위로하고 내일을 긍정하는 감독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쨌든 우린 '살어리 살어리랏다 반도에 살어리랏다'처럼 말이다. 우리네 삶은 서로 주고받으며 계속되리란 희망과 함께.

반도에 살어리랏다 이용선 이승행 오가빈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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