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웅본색> 포스터

영화 <영웅본색> 포스터 ⓒ 조이앤시네마

 
"홍콩 누아르. 198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수사학에 덧붙여진 새로운 말. 아직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당연히 한국은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용어."
- 책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중에서.

'홍콩 누아르'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와 남성 간의 유대, 폭력적인 묘사를 강조한 홍콩 영화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한국의 저널리스트들이 처음 쓰기 시작해 TV와 라디오, 신문과 잡지, 극장과 비디오 광고 포스터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일종의 서브 장르적 분류이자 홍콩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등 아시아에 퍼진 대중문화 현상을 일컫는 '홍콩 누아르'는 서극이 제작하고 오우삼이 연출한 영화 <영웅본색>(1986)이 도화선이 되었다.

<영웅본색>(A Better Tomorrow)은 용강이 각본과 연출을 맡아 1967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 <영웅본색>(Story of a Discharged Prisoner)을 원작으로 삼았다. 해외에서 유학한 서극 감독은 1970년대 후반 홍콩으로 돌아와 다양한 작품으로 활동하던 중에 두 편의 리메이크 영화를 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한 편은 이한상 감독이 연출해 1960년 칸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에 초청받은 <천녀유혼>(1960)이고, 다른 한 편은 범죄자 형과 경찰 동생의 갈등을 그린 <영웅본색>이었다. 

바쁜 일정으로 인해 직접 연출을 할 수 없었던 서극 감독은 무협 영화 <외팔이>(1967)로 유명한 장철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한 바 있는 오우삼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긴다. 오우삼은 원작 <영웅본색>에서 플롯과 등장인물 일부를 빌려와 인도의 야시 초프라 감독의 액션 영화 <벽>(1975)과 이것을 리메이크한 홍콩 영화 <형제>(1979) 등을 참고하며 <영웅본색>의 줄거리를 완성한다. <영웅본색>은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촬영을 하면서 이야기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 뒷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자면 처음에 서극은 세 명의 여성 캐릭터의 우정을 다루는 <영웅본색>을 구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우삼이 남성 캐릭터들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반대하면서, 서극은 결국 이 주장을 포기했다.

주윤발의 '풍림각' 장면, 영화사의 명장면이 된 이유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 조이앤시네마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은 '폭력의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우삼 감독은 중국 무협 영화를 대표하는 장철 감독과 호금전 감독 외에도 프렌치 누아르의 거장 장 피에르 멜빌 감독, 폭력의 피카소로 불리는 샘 페킨파 감독 등 다양한 감독의 폭력 장면 연출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는 총격신 중에 갑자기 느린 동작으로 변하는 초고속 촬영 기법, 춤과 무협물을 연상케 하는 부드러운 액션 안무, 쌍권총을 들고 있는 캐릭터 등을 활용하면서 액션 신을 아름다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중에서도 마크(주윤발 분)가 보스 송자호(적룡 분)를 배신한 자를 처단하러 가는 '풍림각 장면'은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탄창이 떨어진 총을 버리고 화분에 숨겨둔 총을 잡는 동선, 총격전 중에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여유, 복수를 끝낸 후 성냥개비를 입에 무는 무표정한 얼굴까지 이전 액션 영화들에선 볼 수 없었던 인상적인 요소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단지 폭력이 전부일까? 오우삼은 <영웅본색>의 성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작과 연출의 요인은 물론이고 영화의 내용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영화의 느낌은 특수한 심리상태(1997년 홍콩 반환으로 인한 불안감)에 놓인 홍콩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놓인 사실들에 대해 막막함을 느껴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은 자연히 이런 세태를 완전히 바꾸어 줄 수 있는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윤발이 맡은 '마크'와 같은 인물은 모든 사람이 가슴속에 바라고 있는 영웅의 형상인 것입니다."
- 책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중에서.

 

<영웅본색>은 정의를 지키려는 주인공, 배신과 음모, 선과 악의 대립, 권선징악 등 무협 영화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다분하다. <영웅본색>의 인물들은 현대의 건물로 대체된 객잔에서 과거의 복식을 대신한 오늘날의 트렌치코트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칼이 아닌 총으로 싸운다. 남자들의 우정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복수에 나섰다가 한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고, 친구가 위험에 빠진 사실을 알고선 뱃머리를 돌려 같이 싸우러 왔다가 끝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삼국지>나 <수호전>, 또는 이것을 기반으로 삼았던 숱한 무협 영화의 주인공 그 자체다.

오우삼 감독은 "강호의 도의는 사라진 지 오래됐네. 아무도 믿을 수 없지"란 극 중 대사를 통해 홍콩 반환 결정으로 인한 불안, 팽배한 정부 불신, 도덕성이 해이한 젊은이들이 저지르는 범죄 증가 등 그즈음 홍콩 사회를 보는 근심 어린 시각을 드러낸다. 그리고 해답으로서 의리, 우정, 가족 등 '인의(仁義)'를 지키고자 기꺼이 목숨을 던지는, 비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영웅을 내놓았다. 그는 홍콩에 더 나은 내일(A Better Tomorrow)을 위해선 전통적인 가치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믿은 것이다.

홍콩의 현실과 미래를 보여주는 주인공들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 조이앤시네마

 
그렇다면 제작자 서극이 보는 <영웅본색>은 어떨까? 그는 <영웅본색>이 "홍콩에 대한 비판적 시네마"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내가 홍콩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홍콩이라는 아주 이상한 사회를 배경으로 그러한 경제 상황 속에서 살아야 하는 주인공들은 자신들이 생존할 수 있을까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순간은 항상 외롭다고 느낍니다. 일반 관객들은 그런 주인공들에게 감정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 책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중에서.

 

서극의 말처럼 <영웅본색>의 캐릭터들은 홍콩의 현실을 사는 방식과 미래를 보는 시각을 보여준다. 극 중에서 성(이자웅 분)은 불안한 도시에서 오로지 자신의 야욕을 채우고자 송자호와 마크를 배신하고, 송자걸(장국영 분)을 함정에 빠뜨리며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비열한 인물이다. 한때 범죄 조직의 보스였던 송자호는 감옥에서 출소한 후에 갱생의 의지를 놓지 않고 동생에게 새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홍콩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와 달리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 하지만 오래 못 가서 아까워"란 대사를 내뱉는 마크는 홍콩 반환을 앞두고 떠나려는 심리가 엿보인다. 그는 줄곧 과거에 누렸던 자신의 몫을 되찾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이들에겐 현재(성과 송자호), 미래(송자걸), 과거(마크)란 방점이 찍혀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심리를 옷의 색깔을 이용하여 표현한다. 대만에 간 송자호와 성은 각각 흰색과 검은색 옷을 입고 있다. 앞으로 이들의 미래가 정반대로 엇갈릴 것임을 암시하는 설정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성과 송자걸은 모두 흰색 옷을 입고 있다. 이것은 거짓된 선과 진실한 선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영화는 과거의 어둠이 물든, 완전히 흰색이 되지 못한 회색 옷을 입고 있는 송자호와 오로지 이분법적 잣대로 형을 증오하는 흰색 옷을 입고 있는 송자걸이 인과 의를 대변하는 마크를 중심으로 화해하는 장면을 빌려 홍콩의 더 나은 내일(A Better Tomorrow)을 꿈꾸고 있다.

<영웅본색> 속 장국영, <천녀유혼>까지 이어진 인연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영화 <영웅본색>의 한 장면 ⓒ 조이앤시네마

 
사실 <영웅본색>은 장국영이 출연을 결정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작품이다. 당시 오우삼 감독은 별다른 히트작이 없는 신세였고 배우 적룡은 과거의 무협 영화 스타로 당시 대중에겐 잊힌 상태였다. 배우 주윤발은 TV 드라마에선 인기 스타였지만, 흥행한 영화가 없어서 캐스팅 기피 대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홍콩 음반 시장을 휩쓸던 장국영이 합류하자, 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졌고 <영웅본색>은 비로소 제작에 들어갔다고 한다.

서극과 오우삼은 제임스 딘을 떠올리게 하는 장국영의 반항적 이미지가 역할에 어울려 출연을 제안했다고 밝힌다. 송자걸 캐릭터가 충동적이고 순진하며 주인공(<영웅본색>의 주인공은 송자호)이 아니란 이유로 소속사는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장국영은 배우로서 욕심을 내어 출연을 감행한다. 심지어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에도 주윤발이 맡은 마크 캐릭터의 분량이 점점 커지는 상황을 이해해 주었다고 한다. 비중이 줄어든 장국영에게 미안함을 느낀 서극은 그를 위해 특별한 역할을 만들어주겠노라 약속하고 이후 <천녀유혼>(1987)의 주인공 영채신으로 이어졌다.

<영웅본색>에서 해맑은 청년부터 증오로 가득한 경찰까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 장국영은 이 영화가 전환점이 되어 <천녀유혼>(1987), <영웅본색 2>(1988), <아비정전>(1990), <패왕별희>(1993), <동사서독>(1994), <금옥만당>(1995), <해피 투게더>(1997) 등에 출연하며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장국영은 홍콩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남았다. 장국영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화는 시간을 초월하여 살아 있다. 

지난 3월 27일부터 메가박스에서 열린 'R.I.P. 장국영' 기획전은 그의 대표작 <영웅본색> <영웅본색 2> <천녀유혼> <아비정전> <패왕별희>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중에서 단 한 편을 추천한다면 주저 없이 <영웅본색>을 고르겠다. <영웅본색>은 단지 잘 만든 클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홍콩의 <스타워즈>'가 되어 홍콩의 영화 산업의 판도를 바꾸었고 아시아 영화 시장까지 재편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액션의 <시민 케인>'으로 이후 전 세계 액션 영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세계 영화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걸작 중 하나가 바로 <영웅본색>이다.
오우삼 서극 적룡 장국영 주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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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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