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뮤직 박스> 포스터.

영화 <뮤직 박스> 포스터. ⓒ 캐롤코 픽쳐스

얼마 전 박근혜 후보가 과거사 사과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진정성' 시비에 휩싸였습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시리즈를 쓰며 "박정희는 세종대왕 보다 위대하다"고 칭송했던 조갑제는 "아버지와 조국에 침을 뱉은 박근혜의 반역사적인 사과이며, 표를 얻기 위한 정치쇼로 '진정성'이 없다"고 맹비난했습니다.

추석 전에 과거사 문제를 털어내면 이후 한결 가벼운 행보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잔뜩 기대를 했건만 예상 못한 '진정성'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입니다. 억울할 수도 있겠으나 보름 만에 자신의 역사관을 부인하고, 교과서 보듯 건조하게 프롬프터를 읽어가며 사과하고, 사과한 지 불과 반나절 만에 부산에서 '말춤'을 추어댔으니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만했습니다.

그에 앞서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박 후보가 국민대통합 행보에 한창 공을 들일 당시 트위터에 "나라를 구하는 일은 자기를 버리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며칠 뒤에는 "부녀간의 인륜보다 정의가 우선한다는 감명 깊은 영화 한 편을 봤다"며 영화 감상평을 다시 트위터로 날렸습니다.

대체 그는 어떤 영화를 봤던 것일까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역사적 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딸을 통해 진실이 항상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결코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통해 핏줄과 진실 그리고 정의의 상관관계를 성찰하는 영화 <뮤직 박스>(1990년 개봉)입니다.

 '아버지의 진실'을 밀봉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 단란했던 할아버지와 손자와 딸의 행복한 한 때는 하지만 상자가 열리면서 서서히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진실'을 밀봉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전 단란했던 할아버지와 손자와 딸의 행복한 한 때는 하지만 상자가 열리면서 서서히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 캐롤코 픽쳐스


영화는 성공한 변호사 앤 탤버트(제시카 랭)가 파티에서 친정아버지 마이크 라즐로(아민 뮬러스탈)와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안락함이 배어 있고, 연신 행복한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그런 어느 날 2차 대전 당시의 기밀문서가 공개되고 라즐로는 전범으로 고발됩니다. 혐의 내용은 헝가리 특수경찰 '애로우 크로스'의 요원으로 나치에 협력해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입니다.

검찰 측의 기소대로 라즐로가 미국으로 이민 오면서 본명인 미쉬카와 과거 전력을 숨기고 이민 서류를 허위로 기재했다면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헝가리로 추방당하게 됩니다. 라즐로는 그 문제의 전범이 자신과 동명이인이며, 모든 것이 빨갱이들의 모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곤 딸 앤이 변호를 맡도록 요구합니다. 헌신적으로 자식들을 키워 온 아버지의 무죄를 확신하는 딸은 변호에 나섭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진실 사이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재판 당일. 법정 밖에서는 전범 라즐로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증인심문이 시작되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지만 검사의 연이은 파상공세와 증인들의 처참한 증언으로 앤은 수세에 몰립니다. 미쉬카가 눈 주위에 흉터가 있는 남자와 함께 여자를 죽인 후 곁에 있는 아이까지 살해하고, 보석을 강탈하러 왔다 일가족을 학살했으며, 열여섯 소녀를 윤간하는 등 고문과 살인을 일삼았다는 증언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앤도 전열을 갖추고 반격에 나섭니다. 증인 중 한 사람의 아들이 헝가리 공산당 간부임을 폭로하고, 망명한 전직 KGB 요원으로부터 전범 서류를 위조해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다는 증언 등을 이끌어냅니다.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앤과 검사, 판사는 부다페스트에 있다는 전직 '애로우 크로스' 요원의 증언을 듣기 위해 헝가리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앤은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건네받은 자료를 이용해 그가 상습 밀고자라고 폭로하고, 판사는 사건을 무혐의 처리해 버립니다.

 검사 잭이 이민국 직원 상대로 마이크가 동명이인이 아니라 헝가리 특수경찰 출신 미쉬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인심문을 하고 있다.

검사 잭이 이민국 직원 상대로 마이크가 동명이인이 아니라 헝가리 특수경찰 출신 미쉬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인심문을 하고 있다. ⓒ 캐롤코 픽쳐스


앤은 귀국하기 전 아버지의 각별한 친구였던 티보 졸탄의 누이동생 집을 방문합니다. 그는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수표를 보내줬던 사람으로 얼마 전 시카고에서 뺑소니사고로 죽었습니다. 그의 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서던 앤은 우연히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경악합니다. 사진 속 그는 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던 눈 주위에 길게 칼자국 흉터가 난 바로 그 남자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 온 앤은 승소 기사로 도배한 언론들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습니다. 하지만 앤은 주위의 축하를 뒤로하고 죽은 남자의 누이가 부탁한 뮤직 박스를 찾기 위해 전당포로 향합니다. 낡은 뮤직 박스를 열자 태엽이 풀리면서 음악과 함께 인형이 돌아가더니 흑백사진이 한 장, 두 장 드러납니다. 검은 제복의 '애로우 크로스' 복장을 한 남자들이 무참하게 살해한 시체더미를 배경으로 자랑스럽게 찍은 사진들이. 아버지와 죽은 남자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됐다고 여긴 순간, '아버지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앞서 영화는 재판을 앞두고 아버지와 딸이 포옹을 할 때, 아버지의 얼굴을 반쪽만 밝게 비추며 클로즈업합니다. 마치 진실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 시키듯이. 그러나 진실은 감추고 가린다고 해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박제될 수는 없는 법. 영화 제목이기도 한 '뮤직 박스'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법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증언하는 증인에게 "내가 아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한 남자다. 난 짐승이 아니다"라고 결백을 외치며 혼절했던 아버지. 그러나 그 아버지는 땅에 총검을 꽂고 빨갱이들에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복창하면서 팔굽혀펴기를 하도록 명령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다 힘에 부치면 총검이 배를 관통해 죽도록 한 '괴물'이었던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검찰 측 증인과 증언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뭉개지거나 전직 '애로우 크로스' 요원 관련 자료를 앤에게 넘겨 무혐의 처리토록 한 것이나 뺑소니로 죽은 남자의 사고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에 대해 군 정보장교 출신인 앤의 옛 시아버지는 나치 친위대나 애로우 크로스 출신들은 CIA의 반소·반공산주의 전선의 첨병들이라고 귀띔을 합니다. 결국 진실을 감추고 호도하고 왜곡했던 배후에는 권력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사진을 앞에 놓고 번민하는 앤을 통해 영화는 진실이란 무엇이며, 그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되묻습니다.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버지가 '도살자 미쉬카'였음을 확인하면서 앤은 핏줄과 진실 사이에서 극도로 갈등합니다. 아버지의 딸로서 진실을 덮을 것인가, 정의를 수호하는 변호사로서 진실을 밝힐 것인가.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사랑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은 딸이지만, 그 누구도 역사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엄격한 잣대를 선택합니다.

더 나은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창출된다

자축 파티가 열리는 날 아버지의 집 응접실에서 마주 선 부녀. 앤은 마이크를 향해 "왜 그랬어요? 아버지는 짐승이에요"라며 울부짖습니다. 눈썹하나 까딱 않던 마이크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헝가리에서 공산당에게 세뇌 당했니?"라고. 어이상실한 앤이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느냐"고 절규하자 그는 "내게는 여기도 거기도 친구들이 있다"며 단호하게 자릅니다. 제 아무리 핏줄이라도 판도라의 상자에 접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4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5·16과 유신,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논란이 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던 도중 박 후보가 잠시 눈을 감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지난 24일 오전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5·16과 유신,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 남소연


그에 비한다면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사과는 판도라의 상자의 문고리를 잡은 셈입니다. '절대성역 박정희'로 모셔 왔던 아버지를 대상으로 진실 찾기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하여, 일부에서 지적하는 지지율 끌어올리기는 아니리라 믿습니다. 혹여 사실이라면 너무 치졸하니까요. 남은 문제는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진정성 시비를 불식시키는 일. 기자회견이 끝나고 "앞으로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듯이, 역사 바로세우기와 관련해 전향적인 후속조치를 취해 가면 됩니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인혁당과 장준하, 정수장학회를 비롯해 유신시대에 저질렀던 모든 악행의 뿌리가 됐던 유신헌법과 국가보안법과 관련 국민적 합의를 통해 법적 제도적 조치를 취하면 됩니다. 새누리당이 28일 장준하 타살의혹 국감 증인채택조차도 거부한 것을 보면 박 후보가 회견 당시 제안한 국민대통합위원회는 '대선용 과거사위원회'가 될 공산이 매우 크니까요.

그럴 때, 박 후보의 말 대로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는' 불효는 저지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때, 아버지의 딸로 남지 않고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될 의지를 확고히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유가족의 상처는 물론 갈등과 증오의 시대도 치유되고 대통합의 정치는 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왠지 가슴 한 켠이 답답해지는 건 왜일까요?

박 후보가 과거사 사과 말미에서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고 말한 대목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과거와 현재는 싸우는 상대가 아니며, 더욱이 과거는 미래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진실이고,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한다면,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계속 기억하고 복원해야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 역사학자 E. H.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진실'을 고발한 후 앤이 아들과 함께 서로를 보듬고 있다.

'아버지의 진실'을 고발한 후 앤이 아들과 함께 서로를 보듬고 있다. ⓒ 캐롤코 픽쳐스


카의 이 말은 영화에서 고스란히 복원됩니다. 앤은 '불편한 진실'을 선택하고 행동하기에 이릅니다. 피로 물들었던 다뉴브강부터 전당포까지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역사의 궤적을 정리한 후 진실을 밝히는 사진과 함께 검사에게 동봉해 보냅니다. 이튿날 아버지 마이크가 전범이라는 뉴스가 대서특필된 신문을 집어 들고 집으로 들어선 앤은 학교에서 돌아 온 아들과 의자에 앉아 서로를 한껏 보듬어 안습니다.

이윽고 지금껏 아버지와 딸에게 머물렀던 카메라는 이제 어머니와 아들로 이동합니다. 그것은 역사적 진실과 정의는 결코 그냥 묻어두고 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이며, 미래 세대인 아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네 아들에게 나에 대해 말할 수 있겠냐"고 되레 호통 치던 아버지에 대한 대답인 셈입니다.

박 후보가 마지막으로 강조했던 '증오에서 관용으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사랑했던 아버지, 존경했던 아버지, 아버지 박정희의 '뮤직 박스'를 열면 되는 것입니다.

뮤직 박스 박근혜 과거사 사과 인혁당 장준하 정수장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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