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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봄바람이었습니다. 설렘과 연락, 그리고 '한방에 훅'. 그 기시감, 그 유혹. 이웃하고 살면서도 모르는 곳. 거기 가까운 마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지난 4월 26일 양평 정배리 마을 한가운데서 봄날 하루를 꼬박 보냈습니다. 꿈속으로의 초대였던 걸까요?

여행자를 부르는 건 낯섦이죠. 다람쥐 쳇바퀴 일상, 여느 날과 꼭 같은 그 하루를 박차고 나선 것도 그 때문. 거기는 그러니까 수도권 최고의 전원산골입니다. 기자 같은 도시 촌놈들이 늘 동경하는 곳. 북한강 '무너미'를 좀 지나 아늑한 산골 마을이죠. 거기서 문화난장을 벌이는 똘똘한 주민 한 분을 만났습니다. '배꼽마당' 백영화(42)씨가 그 주인공.

'새들이 편히 사는 마을'(조안)을 지나야 합니다. 그 지저귐이 좋아 한양 길을 포기했다는 한 사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지날 때면 흐릿한 정신이 맑아집니다. 공룡 도시의 스모그와 기계음, 그리고 숨막히는 중압감이 사라지는 곳. 다산(茶山) 표지판이 스치는 데서 마주하는 여행의 즐거움입니다.

마을 한 가운데 느티나무, 그 아래 앙증맞은 사각 건물. 솥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한 마을 양평군 서종면 정배(鼎排)리의 사랑방이자 도서관인 '배꼽마당'. 유리창에 비추인 마을 모습이 정겹다.
 마을 한 가운데 느티나무, 그 아래 앙증맞은 사각 건물. 솥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한 마을 양평군 서종면 정배(鼎排)리의 사랑방이자 도서관인 '배꼽마당'. 유리창에 비추인 마을 모습이 정겹다.
ⓒ 최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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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도서관에 들어서면 마주하는 벽, 그 앞에 늘어놓은 아이들의 소원 줄. 거기 이런 꿈도 하나 적혀있으려나? "햇살 찬란하게 비추는 어느 날, 철수와 여기서 책읽으며 놀고 싶어요. 영희."
 컨테이너 도서관에 들어서면 마주하는 벽, 그 앞에 늘어놓은 아이들의 소원 줄. 거기 이런 꿈도 하나 적혀있으려나? "햇살 찬란하게 비추는 어느 날, 철수와 여기서 책읽으며 놀고 싶어요. 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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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鳥安) 마을은 그리스 신화 속 물(바다)의 요정 사이렌이 왜 반인반조(半人半鳥)였는지를 이역만리 떨어진 한반도에서 강변(?)해주는 곳입니다. 영웅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을 마감하고 '길고 긴 귀향길'을 돌아 페넬로페 품에 안기는 여정 한 가운데 자리한 게스트하우스 같기도 합니다.

오디세우스 전설 간직한 '조안' 지나

뿌연 물안개, 아련한 유혹이 밀려오는 거기. 바로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구절양장 남·북 한수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바람난'이 아니어도 늘 찾고 싶은 곳. 호반 한 가운데 느티나무 한 그루와 벤치가 고즈넉한 두물머리. 양평의 서쪽 끝, 서종면(西宗). 거기서 친구 한명과 동행합니다.

한 많은 '왕의 여인'의 애처로움이 깃들었다는 부용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고 수능리 어딘가를 지나 마침내 당도한 정배리. 마을 한 가운데 느티나무, 그 아래 작은 사각 건물. 솥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는 마을 정배(鼎排)의 사랑방이자 도서관인 '배꼽마당'에 당도했습니다.

기자가 이 마을을 찾은 건 배꼽마당의 백영화 대표를 만나려는 것입니다. 여행생활협동조합(여행생협)을 올해 말까지 설립하겠다며 띄운 추진위의 홍보누리집인 다음(포털) 카페 '여행생협'에 참여하고 싶다는 글을 남기고 "한 번 찾아오라"고 해 방문한 것입니다.

기자들의 못 된 습성 중 하나를 들자면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 사흘 전에 문자(전화)로 "놀러가도 되나요" 한마디 해놓고 "오늘은 안 되는데..."라며 황당해 머뭇거리는 상대편 심사 깡그리 무시하고 "그럼 목요일 가겠다"고 한 게 출타의 이유, '강요된 초대'였습니다.

휴대폰 문자 하나. 그리곤 넵다 달려간 배꼽마당 컨테이너박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여인. 시골마을 마당지기·총무이니 의당 남자로 예상했던 기막힌 편견을 깬 백영화씨.
 휴대폰 문자 하나. 그리곤 넵다 달려간 배꼽마당 컨테이너박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여인. 시골마을 마당지기·총무이니 의당 남자로 예상했던 기막힌 편견을 깬 백영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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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마당을 찾은지 30여 분도 안돼 아이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책을 하나 둘 꺼내 읽는가 싶더니 곧 '과학나라' 조립놀이를 한다. 한 학부모와 두세 시간을 떠들며 같이 놀았다.
 배꼽마당을 찾은지 30여 분도 안돼 아이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책을 하나 둘 꺼내 읽는가 싶더니 곧 '과학나라' 조립놀이를 한다. 한 학부모와 두세 시간을 떠들며 같이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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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에 버금간다는 중미(仲美)산 서북계곡에 자리한 곳. 한적한데다 숲 깊고 물 맑은 마을. 지금은 부자들의 별장촌으로 더 이름을 날리는 서종면 정배리에 4년 전 찾아들어 마을 공동체문화 씨앗을 뿌리고 지금껏 정성껏 가꾸고 있는 마당지기를 만난 것입니다.

조금은 낯설지만 온라인에서 본 느티나무 아래 앙증맞은 붉은색 컨테이너 문을 두드리다말고 그냥 들어서는 데 "누구 찾으시냐"며 한 여인이 나섭니다. 시골마을 마당지기이니 의당 남자로 예상했던 기막힌 편견. '백영화씨 찾는다'고 말끝을 흐리는데 야멸찬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전데요."

'강요된 초대', 번갯불에 콩 굽듯

예측이 빗나가는 순간 당황해 무심코 손을 내밀며 얼버무립니다. "여성이네요." 당황한 방문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남자인 줄 알았어요?"라고 되묻습니다. 10평도 안돼 보이는 시설 한 가운데 작은 목재를 덧대 만든 탁자 앞 의자에서 일어나며 어서 앉으라고 자리를 권합니다.

며칠간의 봄비 끝에 맞은 화창한 날씨. 사방 벽 책꽂이 사이로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정오를 갓 넘긴 한낮의 햇살. 모를 심으려고 써레질을 마치고 물을 잡아 놓은 논바닥에 반사해 들어오는 황금빛 물결. 선글라스를 벗고 투명안경으로 바꿔 쓰는 데 눈이 부셔옵니다.

자리잡고 앉아 잠깐의 어색함을 날려버리려고 여행생협 추진소식을 곁들여 방문취지를 늘어놓는데, 장년의 농사꾼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이장이라는군요. 대화를 방해해 미안하기라도 한 듯 뭔가를 받아들고 얼른 밖으로 나가는 데, 마당지기가 말을 잇습니다.

컨테이너 유리천장 너머로 보이는 느티나무 줄기. 거기 어디에 앉아도 하늘·산·논·마을을 훤히 다 굽어다 볼 수 있다.
 컨테이너 유리천장 너머로 보이는 느티나무 줄기. 거기 어디에 앉아도 하늘·산·논·마을을 훤히 다 굽어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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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사이로 정겨운 논배미들. 모를 심으려고 써레질을 마치고 물을 가둔 논바닥에 반사한 햇볕은 찬란한 황금빛 물결이 되어 배꼽마당에 다가온다.
 책장 사이로 정겨운 논배미들. 모를 심으려고 써레질을 마치고 물을 가둔 논바닥에 반사한 햇볕은 찬란한 황금빛 물결이 되어 배꼽마당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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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마운 분이에요. 저희 활동도 참 열심히 돕고요. 제가 이 곳 마당지기를 하며 마을 총무를 겸하고 있는데, 늘 협력하고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 주민 30~40%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인데 마음을 열고 공동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주셨어요."

'배꼽마당'의 유래를 물으니 거침없습니다. 언론을 상대해본 이력이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요? 경기문화재단이 주도하고 배영환 작가가 설계한 '마을공동체 도서관 프로젝트' 일환으로 생겼답니다. 시흥 맹꽁이 책방, 광주 솔바람책방, 남양주 반디책방, 수원 느리게 읽는 미술책방과 함께 5개의 문화운동 공간이라고.

"사랑방, 책방, 놀이방? 2009년 당시 경기도 안에서 50여 마을이 공모를 했는데 5개 마을이 선정됐어요. 누구나 배를 깔고 편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소통의 방으로 생겨난 것이죠. 배꼽마당도 그해 11월 말 생겼으며 시설은 경기문화재단이 설치했고 책 구입비와 문화 프로그램 경비로 6백여만 원을 지원받았습니다."

책장사이 밀려오는 '황금물결' 눈부셔

민간 공모를 통해 문화운동차원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다 보니 쥐꼬리만한 운영비라도 마련하려면 매년 이런저런 공모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시설은 경기문화재단 소유고 위탁운영을 하는 형태라 문제가 없지 않았는데, 결국 올 1월 시설 소유를 마을운영위로 넘겼다고 합니다. 운영뿐만 아니라 시설까지 공히 마을에서 시행하게 된 것.

그러다보니 인건비는 고사하고 전기세·소모품비(물·커피·차) 등 운영비까지 모두 마을에서 책임져야 하는 실정입니다. 10평이 안 돼 법적으로 도서관 등록이 불가능하다보니 관련 지원금도 받을 수 없고. 자력갱생이 불가피했던 것이죠.

배꼽마당 현관 문 속에 하나 가득 들어찬 정배리. 분교 폐교에 맞서 이주민과 원주민이 합심해 만들어낸 컨테이너 사랑방. 그 안에 앉으면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정배리 뿐이다.
 배꼽마당 현관 문 속에 하나 가득 들어찬 정배리. 분교 폐교에 맞서 이주민과 원주민이 합심해 만들어낸 컨테이너 사랑방. 그 안에 앉으면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정배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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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그친 정배리의 하늘. 거기 바람과 공기, 그리고 비를 내어 여기 온 세상의 푸른 생명을 키우나니. 아름답고 거룩하기만 하다.
 봄비가 그친 정배리의 하늘. 거기 바람과 공기, 그리고 비를 내어 여기 온 세상의 푸른 생명을 키우나니. 아름답고 거룩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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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민간 가릴 것 없이 출판·문화 기금을 지원하는 모든 공모사업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연간 그 규모가 백여만 원을 넘지 않는 도서구입비와 월 수십만 원 하는 운영비라도 있어야 시설을 운영할 수 있기에 마당지기 입장에서는 자신의 인건비도 못 챙기면서 운영비 마련에 매진해야 했습니다. CMS후원금 모금도 벌이고 있지요.

2년여 마을문화 운동을 하며 그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분교로 전락했다가 폐교 직전까지 갔던 정배학교(서종초등학교 정배분교)를 살려냈고, 그렇게 모여든 학부모들이 이젠 이 마을의 어엿한 주민으로 거듭나 원주민과 맘을 열고 소통하고 있으니... 게다가 주민들이 좋아하는 마을 총무에 배꼽마당 대표까지 됐으니 이보다 더 즐거울 데가 또 어디 있겠냐는 것.

그는 정배학교 때문에 이 마을에 왔습니다. 아이 셋을 뒀는데, 둘째가 언어장애가 있어 남양주에 살다가 이곳으로 들어와 2007년 정배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도시학교들이 보통 비장애아동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장애아동인 둘째가 소외받을 게 뻔했고, 그래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지성감천, 학교살리고 배꼽마당 열고

2009년 정배학교 학부모회 일을 맡게 됐는데 분교 문을 닫겠다는 교육당국의 방침이 떨어졌습니다. 그에 맞서 학부모와 주민들은 학교살리기운동을 시작했고, 캠페인은 성공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나? 이들은 그 과정에서 마을문화운동을 벌일 터전인 '배꼽마당'을 열었습니다.(다음 글에 이어짐)

덧붙이는 글 | 인터넷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정배리, #배곱마당, #여행, #탐방,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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