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름보다 소금에 통째 절인 이름으로 더 유명한 생선이 있습니다. 굴비, 조기입니다. 재야 민속학자 주강현 박사는 <조기에 관한 명상>에서 우리나라 신화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조기를 통해 황해에 얽힌 역사와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풀어냈습니다. 흑산도를 거쳐 칠산 바다로 올라오는 조기의 길을 따라 예전에 풍성하게 잡혔던 조기들이 지금은 왜 씨가 말랐는지를 이 책에서 끈질기게 조망합니다.

한때 떼 지어 몰려다니며 놀던 조기는 마치 조선 반도에서 뿌리가 뽑힌 조선족이 식민과 냉전이라는 강고한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편제된 것과 유사합니다. 변방의 잡초로 취급받으면서도 중화 문화의 블랙홀에 맞서는 조선족은 맵찬 성질의 조기만큼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기와 조선족은 황해의 거센 조류를 헤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토해 놓을 수 있는 바다와 육지를 향해 '물질'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의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절망과 광기로 폭발하다 죽어가는 수컷들이 있습니다. 천민자본주의의 빛과 어둠 속을 부유하며 한 줄기 희망을 캐내려는 한 사내의 이야기, 영화 <황해>입니다.

폭력의 미학으로 고발하는 한국사회의 자화상

영화는 '택시운전사', '살인자', '조선족', '황해' 등 모두 4가지 챕터로 전개됩니다. 각각의 챕터는 조선족 구남(하정우)과 정학(김윤식)을 날줄로, 조폭 출신의 운수회사 사장 태원(조성하)을 씨줄로 '폭력의 누아르'를 펼쳐 놓습니다. 도끼와 회칼과 족발의 도륙 속에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솟구치며 뇌수가 터지는 아비규환의 핏빛이 스크린을 붉게 물들입니다.

 구남과 아내의 깨어진 결혼사진은 <황해>의 결말을 예고하는 한편 조선족의 희망과 절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구남과 아내의 깨어진 결혼사진은 <황해>의 결말을 예고하는 한편 조선족의 희망과 절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팝콘필름


그러나 <황해>의 폭력은 핏빛 잔혹사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남의 '아내 찾기'로 상징되듯 희망을 향한 절망의 폭력이며, 행복을 향한 광기의 폭력입니다. 불온한 이중성을 똬리처럼 틀고 있는 그 폭력은 황해를 건너기 전 이미 '디아스포라(이산)'가 되어 버린 구남과 면가를 부숴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주류 자본주의로 편입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태원마저 부숴버리면서 영화는 장르적 범주를 넘어섭니다.

최근작 <심장이 뛴다> 역시 스릴러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영화는 딸을 살리기 위한 연희(김윤진)의 모정과 뒤늦게 회개한 날건달 휘도(박해일)의 효를 전면에 걸고 관객을 안심시킵니다. 그리곤 이내 해피엔딩으로 도닥입니다. 제 아무리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고 선악의 구분이 모호해도 모정이라는 이름은 이 모든 것들을 일거에 교통정리할 정도로 강력하며 신성시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황해>는 한국 자본주의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조선족을 전면에 걸고 불편한 진실로 관객들과 충돌합니다. 영화는 구남과 그의 아내로 대변되는 조선족의 시난고난한 현실을 비켜나지 않습니다. 조선족을 불법과 살인자 패거리로 치부하는 위험한 수위를 넘나들면서도 영화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을 폭력의 미학으로 고발하는 데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두 영화는 결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관통합니다. 구남과 휘도가 변두리로 내몰린 부평초들의 삶을 대신하고, 태원과 연희가 한국사회의 천민성과 위선을 상징하는 '서울특별시 강남'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낮에는 대학교수이면서 밤에는 룸살롱을 7개나 운영하는 <황해>의 승현과 딸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남의 심장을 탐하는 연희를 통해 천민자본주의와 기독교의 민낯을 들춰냅니다.

산 사람의 목숨과 심장을 요구하는 강남

영화는 거친 날것들의 스산스런 삶을 구남의 오프닝 내레이션에서 예고합니다. '어렸을 적 개 한 마리가 개병(광견병)이 들어 살아 있는 모두 아가리로 물어 죽였다. 얼마 후 다시 돌아와 죽어 뒷산에 묻어 주었는데, 동네사람들에게 파헤쳐져 먹혔다.' 이 내레이션은 오직 아내를 찾기 위해 폭력에 휩쓸리다 결국 비쩍 마른 '황구' 꼴로 수장당하는 구남을 아우르기에 제격입니다.

 정학이 연결해 준 밀입국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오는 구남의 공포에 짓눌린 시선은 그의 앞날을 예고하고, 구남은 다시는 황해를 건너지 못한다.

정학이 연결해 준 밀입국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오는 구남의 공포에 짓눌린 시선은 그의 앞날을 예고하고, 구남은 다시는 황해를 건너지 못한다. ⓒ 팝콘필름


구남의 한자음이 '拘男'이라고 한다면, 정학의 공식 직업이 개장수인 것과 상통합니다. 이렇게 영화에서 조선족은 개로 묘사됩니다. 이런 개 같은 사내들이 황해를 건너는 순간 시종일관 쫓고 쫓기며 서로를 물어뜯고 죽이는 개싸움 같은 형극은 결국 오프닝 내레이션의 연장 즉, 조선족들의 처절한 생존을 위한 사투의 재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구남의 사투가 '강남'에서 비롯된 데 있습니다. 승현을 고리로 그의 재산을 노린 아내가 내연남 은행원과 작당해 살인을 의뢰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태원 또한 자신의 동업자인 승현과 놀아난 당돌한 정부에 격분해 또 다른 살인을 지시합니다. 결국 구남이나 이어 황해를 건너오는 정학의 욕망은 애초부터 그들의 것이 아님을 영화는 밝힙니다.   

이것은 태원과 승현 역시 결국 강남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 아래서 개 같이 벌어 정승같이 살려던 또 다른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이들은 구남과 같은 비루한 황구가 아니라, 천민자본에서 주류 자본주의로 편입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반려동물이라는 점입니다.

<황해>의 이런 천민성은 <심장이 뛴다>에서도 천천히 배어 나옵니다. 딸의 심장이식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연희가 선이라면, 재혼한 어머니가 장기를 팔아 마련한 목돈을 하루아침에 말아먹는 휘도는 악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중반부까지 선과 악을 도식적으로 대치시킨 채, 심장을 지키고 심장을 빼앗는 추격신을 거치면서 선과 악의 실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독실한 기독교신자 연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팽개칩니다.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을 받고 강남의 잘나가는 영어학원 원장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던 연희는 대신 '산 사람의 심장'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3000만 원 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심장이냐, 1억을 호가하는 휘도 어머니의 심장이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감독의 말마따나 영어교육과 교회로 상징되는 강남은 그렇게 산 사람의 심장마저도 서슴없이 사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국경없는 마을과 국경있는 마을

영화는 구남의 시선을 따라 한국사회의 두 얼굴을 대치 시킵니다. 아내는 1평 남짓한 원곡동 '국경없는 마을'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 흔적을 찾아 또 다른 벌집촌인 가리봉동 중국인거리로 이어지고 영화는 구남의 시선을 따라 회색빛 도시의 뒷골목에서 찌들대로 찌든 조선족들의 삶의 굴곡과 역경을 '핏빛 폭력'으로 조명합니다. 

 딸의 심장이식을 위해 다른 이의 심장을 탐하던 연희가 휘도의 멱살을 잡고 그의 어머니의 심장을 요구하고 있다.

딸의 심장이식을 위해 다른 이의 심장을 탐하던 연희가 휘도의 멱살을 잡고 그의 어머니의 심장을 요구하고 있다. ⓒ 오죤필름


이러한 구남의 시선은 <심장>에서 휘도의 시선으로 대체됩니다. 후줄그레한 '츄리닝' 차림으로 어머니의 심장을 지키려는 휘도나 강남의 부잣집으로 재가한 줄 알았던 어머니가 사실은 타워 팰리스가 보이는 쪽방촌에서 혼자 살고, 그 어머니의 기둥서방 행세하며 뼛골까지 등쳐먹던 늙은 건달이 어머니의 심장을 거래한 대가로 1억을 챙기는 현실을 목격하면서 휘도는 맨몸뚱이로 자본의 폭력에 맞섭니다.   

그에 비해 '국경있는 마을' 강남은 남루한 아웃사이더들의 틈입을 일체 허용치 않습니다.  <심장>에서 연희가 장기밀매 브로커의 폭력까지 사들여 심장을 탐하면서 계급간 갈등이 고조되는 대목은 이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연희와 휘도의 대립각이나 공공연한 장기밀매에 대해 정면승부수를 띄우기에는 뒷심이 부족하고, 이내 관객의 심장은 멈춥니다.

반면 <황해>는 비록 피칠갑으로 도배할지언정 강남의 천민성의 끝자락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적시합니다. 먹이사슬의 최상부에 자리 잡은 강남은 먹잇감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데서도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선족들은 물론 자신의 동족까지 가차없이 파멸시킵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대표하는 강남의 탐욕은 그렇게 자신만의 성채를 온전히 간수해 온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색깔이 튀는 캐릭터가 눈에 띕니다. 강남의 탐욕에 콧방귀 뀌는 물욕의 화신, 정학입니다. 정학은 중국의 제국화와 부패를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구남의 모친과 딸을 볼모로 살인청부를 제안하고, 한국에 상륙해 조선족을 이끌고 태원마저 제거하는 정학은 변방에서부터 흔들리는 중국의 현재인 셈입니다. 그런 정학은 체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먹잇감으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 자본의 천민성을 상징합니다.

수컷들의 지옥도를 껴안는 여성에서 희망을 보다 

가혹한 폭력과 예정된 파멸 속에 <황해>는 <심장>과 달리 어떠한 희망과 기대의 전조도 내비치지 않습니다. 한국사회 자본의 천민성을 도륙해 더러운 내장과 뇌수까지 드러내 보이는 영화는 그만큼 관객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진실이 불편할수록 영화에 대한 기억은 무작스런 폭력과 혐오스러운 핏빛으로만 남을 개연성이 커지고, 이것이 <황해>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의 한 축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영화의 마지막 챕터 '황해'를 통해 관객들에게 화해를 요청합니다. 그것은 구남이 아내의 유골함을 들고 '살인청부를 시킨 자본'과 맞대거리를 한 뒤, 칠흑같은 황해의 심연으로 수장당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한 마리 황구마냥 질기디 질겼던 구남의 꺼져가는 생명을 황해가 본래의 색깔인 따뜻하고 편안한 누런 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황해를 건너 연변 기차역에 발을 내딛는 구남의 아내에게서 새로운 희망의 빛을 띄웁니다. 줄곧 쫓기면서도 아내와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구남의 소박한 꿈은 물론 지칠 줄 모르는 정학의 욕망과 냉혹한 태원의 폭력 등 수컷들의 지옥도까지 껴안은 채, 새로운 희망을 캐는 이는 구남의 아내입니다. <심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두며 모든 갈등을 매듭짓고 희망을 여는 휘도의 어머니처럼. 

황해 심장이 뛴다 조선족 천민자본 장기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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