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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유러피언드림 세 번째 이야기는 바로 볼로냐 경제모델의 비밀이다. 인구 40만이 채 안 되는 이탈리아 북동부 중소도시 볼로냐. 1970년대 경제위기와 불황 속에 한때 빈민의 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던 곳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삭막하고 치열한 경쟁 대신 협동과 연대의 정신이 오늘날 볼로냐를 이끌었다. 일부 소수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경제에도 볼로냐가 던지는 시사점은 많다. 경제전문가와 협동조합 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볼로냐 취재팀은 농업을 비롯해 소비자, 건설 등 각 분야 협동조합과 기업 등을 방문한다. 또 사회경제의 권위자인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볼로냐 대학) 등 주요 전문가들의 심층 인터뷰도 진행할 예정이다. [편집자말]
'빨간도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도시 전체에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세 르네상스양식의 건물들을 가지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그리고, 19세기이후 좌파 정치 성향을 보이면서, 자본주의 보다 여전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빨간도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도시 전체에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세 르네상스양식의 건물들을 가지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그리고, 19세기이후 좌파 정치 성향을 보이면서, 자본주의 보다 여전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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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정리 : 김종철, 이승훈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

지난 7월 말, 삼복더위가 맹위를 떨칠 때 <오마이뉴스> 유러피안 드림 세 번째 취재팀은 떠났다. 다소 생소한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볼로냐였다. 인구 40만이 채 되지 않은 중소도시인 이곳을 주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치열한 경쟁 속에 볼로냐가 살아가는 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줬다. 무엇보다 그들은 연대와 협동을 통해 세계 어느 도시보다, 어느 기업보다 최고의 경쟁력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특히 지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를 겪으면서도, 유럽 최고수준의 1인당 국민소득(4만 불)과 낮은 실업률 등을 보이면서 경제학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9명 당 기업 하나 꼴로 중소기업의 천국이면서, 주민들 대다수가 협동조합에 가입돼 있는 조합원들이다. 이들 협동조합은 각종 먹을거리부터 생활필수품 등을 직접 생산, 판매하기도 한다. 또 자신들이 살 집을 직접 짓기도 하고, 대형 공공건물이나 도로 등 건설 사업도 도맡아 하고 있다. 노숙자와 실직자 등도 협동조합을 꾸려 사회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취재에 동행했던 정태인 경제평론가는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면서 "자본보다 노동과 사람이 행복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점을 현장에서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그동안 미국식 기업문화에 너무 치우쳐 있다 보니, 자본이 노동을 통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면서 "노동이 자본을 통제하고 개개인이 모두 권리를 공유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을 '에밀리아 모델'이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원각 아이쿱 생협연구소 사무국장도 "이번 경제위기에도 에밀리아에 있는 협동조합은 파산 사례가 거의 없었다"면서 "이 때문에 재정위기로 이탈리아 정부 자체는 흔들리고 있지만, 볼로냐 등에선 위기를 느낄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은 외부로부터 자금을 빌리는 규모가 작고, 내부 조합원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그만큼 작을 수밖에 없다. 또 그만큼 노동자의 고용 역시 일반 사기업보다 안정돼 있다.

물론 볼로냐가 속해있는 에밀리아 로마냐 주(州) 역시 전혀 경제위기 여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08년까지만 해도 3% 수준이었던 실업률이 2009년에는 6% 수준에서 올 상반기에는 7%까지 올라섰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주변에서 보듯이 대량 해고나 파산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이 속해있는 기업이 파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일부 수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일부 문을 닫는 경우가 있지만, 일자리 나누기와 재교육 등으로 실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지난 8월 30일 오랜만에 취재팀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회의실에서 만난 이들은 일 주일여 동안 볼로냐의 조용한 혁명을 보고, 느껴온 것들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볼로냐를 축으로 한 에밀리아 모델이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지, 앞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등의 고민거리도 들어봤다.

다음은 이날 좌담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소박한 도시 볼로냐

김종철(특별취재팀 팀장) : 이탈리아 볼로냐는 처음 가봤는데, 첫 인상은 어땠나.

정태인 경제평론가
 정태인 경제평론가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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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평론가) : 소박했다. 1인당 소득이 4만 달러인데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차들이 모두 소형차일 정도로 사치가 없어 보였다. 볼로냐라는 도시를 정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경쟁이 아니라 연대와 협동이라는 키워드였다.

이를 통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소셜이코노미(사회적 경제)의 현장을 보게된 점이 뜻 깊었다. 그동안 책과 논문을 통해서 봤던 것 그 이상이었다. 시민들 개개인도 연대의 정신이 삶에 뿌리박혀 있고 기업들도 상대를 죽여서 생존하는 전략이 아니라 협동을 통해 함께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정원각(아이쿱 사무국장) : 볼로냐시의 인구가 37만 명인데 제 고향 진주가 35만 명이다. 볼로냐도 진주도 모두 1000년이 넘는 도시로 역사도 비슷하다. 그런데 진주는 과거 건물들이 남아 있는 게 없다. 무조건 과거를 지우고 새 건물, 고층 건물 짓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볼로냐는 중세시대 건물들도 잘 보존돼 있다. 그 과거를 지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시민 개개인의 노력이 인상 깊었다.

김종철 : 볼로냐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빨간 도시'라고 하던데, 실제 가서 보니까 정말 도시 전체가 붉었다. 좌파들의 도시다웠다.(웃음)

정태인 : (웃으면서) 길거리 곳곳에 재떨이가 있어서 좋았다. 저 같은 '골초'들에게 참 인간적인 도시였다.

김종철 : 좀 전에 볼로냐의 연대와 협동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것이 실제로 운영되는 틀거리로 협동조합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았다. 우선 '에밀리아 모델'이 학계에서 쓰는 이름인데 '볼로냐 모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정태인 : 에밀리아 로마냐 주(州)의 핵심이 볼로냐 시(市) 이어서 그렇지만, 정확히는 '에밀리아 모델'이라고 하는 게 맞다. 브르스코라는 학자가 1982년에 처음 쓴 용어다. 에밀리아 주의 각 지역마다 특별한 산업이 있지만 연대와 협동이라는 방식과 전략은 이 지역의 공통 분모다. 이탈리아 전체가 협동조합이 강하지만 에밀리아는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당이 계속 집권하면서 협동조합이 더 힘을 받았다. 내부 유보금에 대한 법인세 면세, 이윤의 3%로 발전기금을 조성하도록 하는 등의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협동조합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정원각 : 국가 차원에서 협동조합을 지원하게 된 계기는 협동조합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저항했던 활동이 사회적으로 인정 받으면서다. 헌법에도 협동조합 지원 관련 조항이 들어갔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800년대부터 별다른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길드 전통을 가진 장인들이 생산자 협동조합을 시작한 전통이 있다.

"사람이, 그리고 노동이 행복해야 경쟁에서 이길수 있다"

정태인 :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영국에서도 밀가루에 시멘트를 섞어 파는 사건이 벌어지자 소비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비자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70년대와 90년대 두 번에 걸쳐 지방에 중앙정부의 권한을 대폭 이양하게 되면서 협동조합이 더 활성화 됐다.

김종철 : 이번에 보니까, 볼로냐의 협동조합은 또 하나의 기업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에서 일반 사기업과 경쟁하면서도, 돈보다 먼저 사람이 앞서고 자본보다 노동을 우선시한다. 이런 기업이 과연 지속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태인 : 우리는 자본이 노동을 통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미국식 기업 문화에 너무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은 경영자가 하고 남은 돈은 주주가 갖는 방식이다. 그런데 노동이 자본을 통제하고 개개인이 모두 권리를 공유하는 게 가능하고 또 그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에밀리아 모델이다. 자본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노동이, 사람이 행복해야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 이렇게도 기업을 조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협동조합은 비즈니스 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원각 아이쿱 생협연구소 사무국장
 정원각 아이쿱 생협연구소 사무국장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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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각 : (고개를 끄덕이며) 협동조합은 엔터프라이즈다. 수익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출자한 사람의 통제를 받는다. 일반 기업과 협동조합을 놓고 볼 때 주요 의사결정에서 '1원1표냐', '1인1표냐'는 근본적인 차이다. 생산 수단을 소수 자본이 독점하고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방식을 협동조합은 사업을 통해서 끊는다. 협동조합 방식이 퍼져나갈 때마다 자본주의 근원적인 부분에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김종철 :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기업문화가 너무 미국식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여전히 일반 대중 입장에서 보면 협동조합 방식이 생소하다. 우리도 농협이 있는데 이는 국가주도의 협동조합이다. 정권 바뀔 때마다 부패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개혁도 쉽지 않다.

정태인 : (곧 이어서) 농업협동조합인데 농민이 아닌 조합원이 더 많다. 농협은 협동조합이라기 보다는 다른 은행들과 다를 바 없는 금융기관일 뿐이다. 몸집은 큰데 제대로 된 견제 구조가 마련되지 않으면서 매번 부패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다.

"시민들 자율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협동조합은 성공하기 어렵다"

정원각 : 밑으로부터의 자율성을 가지고 만든 협동조합이 아니라 국가주도로 만든 협동조합은 국가조합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제3 세계에서 만들어진 협동조합이 대부분 이런 성격이다. 시민사회의 자율적인 조직, 시민들에게 뿌리내리는 대중성이 없다면 성공하기 힘들다.

김종철 : 이번 취재 과정에서 많은 곳과 사람을 만나면서, 상호 신뢰와 연대라는 것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모습을 봤던 점이 남아있는데... 이 같은 사회적 문화가 있어 협동조합이 뿌리를 내리고 경쟁력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정태인 : (웃으면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면 누가 앞에서 지갑이나 동전을 떨어뜨려도 허리를 굽혀 줍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거 줍는 동안 뒷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소매치기 당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볼로냐는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원각 : 마피아의 영향이 미쳤던 이탈리아 남부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정태인 : 경제학적으로 보면 신뢰가 없을 때 계약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작동하지 않으면 서로 속이는 것을 막기 위해 계약서에 들어갈 내용이 많아지는 것이다. 또 계약을 위반했을 때 사법기관이 번번히 개입해야 하므로 사회적으로 비용이 굉장히 커진다. 이게 미국식이다. 사회적인 규율이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이는 보통 사람들의 행복과는 반비례한다. 신뢰가 많은 경우 불필요한 제도와 계약을 생략하게 해서 거래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

김종철 : 그러고 보니, 요즘은 우리 생활에서 조그마한 일에도 문서로 꼭 계약서를 받아 놓으라는 말들이 많아진 것 같다.

정태인 : 협동조합의 원리 중 하나인 상호성은 서로 돕는다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군가 규범을 위반했을 때 서로가 응징한다는 측면도 포함돼 있다. 영국에서는 차가 갓길로 다니면 누군가가 그 차 앞을 막아선다. 사회 전체가 자기 일처럼 서로 개입하는 모니터가 이루어지면 굉장히 효율적일 수 있다. 이게 에밀리아의 문화이고 전통이라는 것이다.

남유럽발 경제위기의 '범퍼' 역할을 한 협동조합, 그들의 위기 대처법

볼로냐는 '빨간도시'로도 불린다. 도시 전체에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진은 볼로냐 중심부 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각종 건물들.
 볼로냐는 '빨간도시'로도 불린다. 도시 전체에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진은 볼로냐 중심부 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각종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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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각 :
이 지역의 신뢰라는 게 남부의 혈연과 지연을 토대로 하는 관계와는 또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명박 정권 초기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는데 이런 식은 폐쇄적 신뢰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을 어떻게 만들고 그런 경험을 통해 쌓인 신뢰가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우리 사회에서도 많이 논의 됐으면 좋겠다.

김종철 : 사회적 경제의 권위자인 볼로냐 대학의 자마니 교수와의 인터뷰도 인상이 깊었다. 그 중에서도 남유럽의 재정위기 관련해서 언급되는 나라들인 피그스(PIIGS,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는 빠져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이탈리아에는 위기가 없다는 것인데, 실제 우리가 느낀 현장에서는 온도차가 있었던 것 같았다.

정태인 : 자마니 교수는 재정위기가 새로운 위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에밀리아는 수출 비중이 높고 생산품 중 고급 제품이 많아 타격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기업들이 대규모로 도산하는 것 같은 상황은 없을 것이다. 자마니 교수가 '범퍼 이코노미'란 말을 썼다. 협동조합이 완충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보통 협동조합이 위기에 직면하면 구조조정보다는 임금을 변화 시켜 적응하는데, 이번에 현장에서 보니까 워크 쉐어링(일자리 나누기)에도 적극 나서고 있더라. 또 내부 유보금 통해 보험의 역할도 한다. 자본주의 기업은 투자를 줄이거나 감원을 하는데 협동조합은 내부 기금을 가지고 어려울 때 투자를 하는 역발상도 가능하다. 

정원각 : 이번 경제위기로 에밀리아 협동조합은 파산사례가 거의 없었다. 외부차입이 적고 자금을 빌리더라도 내부 조합원들을 통해 하거나 협동조합간 거래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부채비율이 상당히 낮다. 이 때문에 외부의 위기로부터의 충격이 비교적 작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가 자체는 재정적으로 흔들리고 있지만, 이들 지역의 대표적인 협동조합 연합체인 몬드라곤과 레가는 국가 전체의 위기와 관계 없이 탄탄하게 꾸려가고 있었다.

김종철 : 우리나라 기업들의 경우 그런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다. 이 정부 들어 워크 쉐어링 등 방안이 나오기도 했지만 실효가 없다. 대기업들의 내부 유보금은 쌓여가지만 투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원각 : 협동조합 방식은 비용을 떠넘겨 위기를 극복하는 게 아니다. 수익을 나누는 만큼 리스크도 같이 책임지는 방식이다.

중소기업과 협동조합의 천국, 에밀리아 로마냐

김종철 : 볼로냐도 협동조합 등의 파산이나 도산 등은 거의 없었지만, 이번 경제위기로 많은 중소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도 봤다. 실제로 2008년 3% 수준이었던 실업률도 6~7% 수준까지 올랐다. 중앙정부의 재정적인 지원도 크게 줄면서 복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었는데...

정태인 : 좀전에도 말했듯이 에밀리아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절반 이상이 수출되고 있다.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다. 게다가 이들은 거의 중소기업으로 이뤄져 있다. 물론 이들 중소기업 안에 협동조합이 다수 있었다. 이 때문에 에밀리아 지역이 이탈리아 전체 실업률보다 상대적으로 크게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김종철 : 이번에 만난 에밀리아 로마냐 주의 경제장관도 '9명 당 하나의 기업이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중소기업의 천국인데...

정태인 : 그거야 말로 이 지역의 특성이다. 어른들과 아이들 빼고 나면 평균 대여섯명이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옛 공산당에는 사장과 노동자가 동시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이 가장 강하지만, 동시에 이들 노동자들은 기업가 정신에도 익숙하다. 경제위기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가 고용안정, 노사정 대타협, 사회적 합의 등이 거론되지만, 에밀리아에서는 그같은 합의가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김종철 오마이뉴스 기자
 김종철 오마이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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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우리가 볼로냐에서 취재를 하는 동안, 국내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상생'이 화두가 됐었다.

정태인 : (고개를 절레 흔들며) 정권이 무서우니까 대기업들이 말을 좀 들을지 모르겠지. 우리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이 망하면 중국에서 납품 받으면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에밀리아에서는 '상생'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곳에선 작은 기업들이 서로 뭉쳐서 협동조합을 만들고,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경쟁력을 키워 나간다. 왜냐면 혼자서는 프로젝트를 따내고, 기술 발전을 이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있다. 우리나라에선 아파트 분양가 거품 문제가 심각했다. 이같은 대기업 건설회사들의 횡포를 막으려면 소비자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직접 아파트를 지으면 된다. 볼로냐의 주택소비자협동조합에서 지은 집은 기술력도 떨어지지 않고 원자재도 좋은 것을 쓰면서 신뢰를 쌓았다. 그러면 굳이 분양원가 공개 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 각종 사회서비스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국가가 모든 것을 하기보다 민영화할 때 협동조합을 통해 하는 방법을 고민해 볼 필요도 있다.

정원각 : 볼로냐의 시청 신청사는 건설협동조합에서 지었다. 스페인 몬두라곤의 경우도 건설협동조합이 구겐하임 미술관과 쌍둥이 빌딩을 지었다. 중소 건설기업들 스스로 연대하면서, 네트워크를 통해 기술을 쌓으면서 건설 시장에서도 이들 협동조합이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김종철 : 테스토니를 취재했을 때 그곳 전문경영인이 기업 활동의 목적을 '매출 확대가 아니라 이탈리아 정신의 확산'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반 사기업에도 이런 정신이 깔려있다는 게 인상 깊었다.

정태인 : 협동조합 존재로 인해 주식회사의 사업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분명 둘 사이에 상호성이 있을 텐데 이것도 살펴볼 만한 주제다. 기업이 레퓨테이션(평판)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기업이 비리를 많이 저질러도 경제를 먹여살린다는 인식 때문에 용납하고 넘어가자는 주의다. 기업의 레퓨테이션이 상품을 고르는 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역할이 강한 곳은 협동조합의 사업 방식이 다른 기업의 반 사회적 행위를 막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에밀리아 모델을 우리나라에도 이식할 수 있을까

김종철 : 지난 글로벌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자본주의 대안으로 협동조합 모델, 연대와 협동의 경제, 사회적 경제를 말하기도 한다(자마니 교수).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에서도 이식이 가능할까.

정태인 :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은 시장경제 안에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 모델을 가지고도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고 내부 구성원들이 행복하다? 그러면 이 모델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확산되고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적 신뢰와 연대 문화가 약하다. 따라서 당장 에밀리아 모델을 이식하기는 어렵다. 다만 작은 것부터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 국면에서 아이쿱 등 생활협동조합이 확장된 사례가 있다.

정원각 :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협동조합은 사업적으로 대안을 제시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아이쿱 생협이 한우에 대해서 광우병 검사를 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해 대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참여한다.

김종철 : 여러 측면에서 당장 에밀리아 모델을 우리에게 적용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 방향이 맞다면, 지금이라도 준비를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정태인 : 제도적 보완이 선결 과제다. 협동조합 일반법을 만들 필요가 있다. 현재는 없는 상태다. 또 이미 활동하고 있는 협동조합이 잘 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정부가 발주할 때 우선권을 주는 방법도 검토해 봐야 한다. 지자체의 역할도 중요하다. 간병 등 사회서비스 분야에 대해서 협동조합에 우선권을 줄 수도 있다.

정원각 : 사회적 관심과 인력의 확충도 필요하다. 인력풀이 취약하고 기업의 형태가 주식회사가 거의 대부분이다. 협동조합을 이해하는 경영자도 없고 경제전문가도 없다. 

정태인 : 어렵겠지만 농협을 개혁하는 것도 방법이다.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금융기관으로 만든다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또 중소기업중앙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에밀리아의 중소기업과 우리를 비교하면 천당과 지옥이다. 에밀리아의 중소기업은 부족한 게 있으면 기댈 곳이 많다. 기술적 지원은 중소기업네트워크협의회(CNA)에서, 법이나 제도를 바꾸기 위한 로비는 레가가 맡고 있다. 우리 중소기업중앙회도 CNA와 같은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김종철 : 우리나라 중소기업중앙회는 재계 단체 중 하나에 불과한 것 같다. 협동조합의 개념이 전혀 없다. 앞으로 좀더 연구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정태인 : 이번에 가서 직접 보고 더 많이 알게 되니까 오히려 질문이 더 늘어났다. <오마이뉴스>가 계속 관심을 가지고 후속 취재를 더 해야할 것 같다(웃음). 특히 레가가 이윤의 3%를 발전기금으로 거둬서 투자를 하는데 사실 북부에서 더 많은 기금이 생기지만 남부에 더 많이 투자했다. 30년 이상 그런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남부의 협동조합이 크게 늘어났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협동조합의 성장도 좋은 연구 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원각 : 이탈리아 남부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남부는 마피아를 중심으로한 혈연이나 지연이 강하다. 우리도 오래된 도시들은 대부분 각 고등학교 동문, 또 문중 등 학연 혈연이 미치는 영향이 강력하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어떻게 협동조합이 성장하고 지역이 변화했는지를 보면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에 참여했던 정태인 경제평론가와 정원각 아이쿱 생협연구소 사무국장, 오마이뉴스 김종철, 이승훈 기자가 현지에서 취재한 소감을 나누고 있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에 참여했던 정태인 경제평론가와 정원각 아이쿱 생협연구소 사무국장, 오마이뉴스 김종철, 이승훈 기자가 현지에서 취재한 소감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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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 이탈리아편> 특별취재팀: 현지 취재 : 김종철 기자(팀장) 이승훈 기자, 편집 자문 : 정태인 경제평론가, 신성식 경영대표(아이쿱 생협), 정원각 사무국장(아이쿱 생협연구소)


태그:#유러피언드림, #볼로냐, #에밀리아 로마냐, #정태인, #정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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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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