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성산1동에 있는 높이 66m의 아담한 성미산. 지난 1994년 이 산 인근에 대안공동체 '성미산 마을'이 조성된 뒤로 이 동네 아이들은 성미산에서 자라다시피 했습니다. 산은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학습장이었으며, 부모들에게는 공동육아와 대안학교의 행복한 생태공동체로 제2의 고향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그런 성미산이 지난 6월 8일부터 굴착기에 작살나고 있습니다. 성미산 일대를 소유한 홍익학원이 산 남쪽을 허물어 재단 부속 홍익초교와 홍익여중, 홍익여고를 이전키로 했기 때문입니다. 대안이 없지도 않습니다. 대체 부지를 찾아 학교를 이전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홍익학원은 재단부속 학교의 학습권과 재산권만 주장합니다. 작은 산, 성미산 공사 강행은 흡사 4대강 사업을 연상케 합니다. 생태공동체는 아랑곳하지 않고 삐까번쩍한 학교 건물을 짓겠다는 것 또한 삽질논리에 다름 아니니까요.

하여, 오늘 '영화읽기'는 생태환경을 지키려는 이들의 작은 투쟁 '성미산 지키기 운동' 인증샷 영화입니다. 1992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작은 마을 힝클리에서 수질오염을 초래한 거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승리한 힝클리 주민 대 퍼시픽가스앤일렉트릭사(PG&E) 간의 대규모 환경 소송을 그린 실화 <에린 브로코비치>속으로 들어갑니다.

환경과 여성의 만남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영화는 1996년 힝클리 마을 주민들이 PG&E로부터 3억3300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배상금을 받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 분)와 주민들에게 앵글을 맞춰 힘차고 경쾌하게 그려 나갑니다. PG&E는 지난 2002년 부도가 나 캘리포니아 단전 사태를 초래하면서 국내에서 에너지산업의 민영화 찬반논쟁을 촉발시켰던 바로 그 기업입니다.   

 간신히 눌러 앉은 변호사 사무실마저 잃을 수는 없는 에린이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자 투덜거리는 큰아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며 사무실로 데리고 가고 있다.

간신히 눌러 앉은 변호사 사무실마저 잃을 수는 없는 에린이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자 투덜거리는 큰아들에게 잔소리를 해대며 사무실로 데리고 가고 있다. ⓒ 저지 필름


두 번이나 이혼한데다 수중에 달랑 16달러만 남은 에린. 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득실대는 집에서 악악 거리며 삽니다. 자식 셋을 혼자 힘으로 키우기 위해 직장을 구하다 교통사고를 당하지만 돈 한 푼 받지 못합니다. 자신을 변호한 변호사 에드 메스리(앨버트 피니 분)를 찾아가 '대신 일자리를 달라'며 배 째라 눌러 앉습니다.

하이힐을 신고 풍만한 가슴에 미니스커트를 흔들며 다니는 에린. 확성기를 찜쪄 먹은 듯 목소리도 걸걸합니다. 영화는 바로 이 아줌마가 힝클리의 식수를 '6기가 크롬' 중금속으로 오염시킨 PG&E를 상대로 4년간 줄기차게 싸워 승리한 과정을 집요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파고듭니다.

또한 영화는 한 푼이 아쉬웠던 에린이 공갈협박과 매수를 뿌리치고 진정성의 만남으로 주민들과 하나되는 과정을 가감 없이 담아냅니다. 여기에 환경운동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던 아줌마가 몸으로 부딪쳐가며 자각하고 연대하는 과정을 통해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강한 여성상의 탄생 과정을 스케치하듯 그립니다. 환경과 여성의 소통 그리고 세상의 작은 변화, <에린 브로코비치>가 이뤄낸 결실입니다.

그저 고마울 뿐인 회사가 우리를 죽게 만들었다고?

발단은 작은 우연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업무파악도 제대로 못한 에린의 눈에 한 장의 문서가 들어옵니다. 부동산 관련 소송 서류철에 뜬금없이 의료진단서가 끼어 있었던 것. 힝클리 마을로 간 에린은 진단서의 주인을 만나 PG&E가 공장 인근 주민들의 집을 사들이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크롬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수질오염에 관한 단서를 확보합니다.

 힝클리 마을 주민들의 원인 모를 병에 대해 조사를 하던 에린이 PG&E 근처 우물 속에 들어가 시료를 채취한 뒤 경비원들에게 쫓겨 달아나고 있다.

힝클리 마을 주민들의 원인 모를 병에 대해 조사를 하던 에린이 PG&E 근처 우물 속에 들어가 시료를 채취한 뒤 경비원들에게 쫓겨 달아나고 있다. ⓒ 저지 필름


일부 주민에게서 돈이나 밝히는 것들이라는 욕지기를 듣기도 하고, 똥물 튀는 젖소 목장 안에 들어가서 만나기도 합니다. 수질 검사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PG&E 천연가스 공장에 침입해서는 시궁창에서 죽은 개구리를 건져내고, 우물에 들어가 시료를 채취하다 공장 경비원들에게 들켜 줄행랑을 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사 과정을 통해 에린은 힝클리 마을 주민들이 습관적인 유산과 잦은 코피, 정체불명의 난치성 피부병, 위암 등 각종 암에 노출된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 원인은 카드뮴 등과 함께 6대 유해물질로 꼽히는 발암물질 6기가 크롬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주변 식수원을 오염시켰기 때문이죠. 그러한 사실을 영원히 은폐하기 위해 PG&E는 주민들의 집을 사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 역시 PG&E를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민들에게 의료혜택 등 각종 선심을 다 베풀었으며, 지역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감지덕지한 기업입니다. 죽을병에 걸린 것은 순전히 운이 나쁜 탓일 뿐입니다. 그리고 PG&E에서는 애송이 변호사를 에드에게 보내 모종의 거래를 제안하기에 이릅니다.

현장과 주민 속으로 들어가 진실을 캐낸 아줌마의 승리

전문 변호사들조차 승소할 확률이 없다며 손사래치던 사건을 '아줌마' 에린이 승소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고통 속에서도 딱히 의지할 곳 없는 힝클리 주민들과 가슴을 열고 만난 '따뜻한 시선'입니다. 에린의 말처럼 "같은 주민이자 엄마의 입장"에 서서 얼음장 같던 이들의 마음을 녹이며 '소통'과 '신뢰'를 켜켜이 쌓아 진실을 캐냄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린이 재판에서 승소한 뒤 힝클리 주민 소송의 발단이 된 도나 젠슨 부인을 찾아 배상금에 대해 설명하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포옹한다.

에린이 재판에서 승소한 뒤 힝클리 주민 소송의 발단이 된 도나 젠슨 부인을 찾아 배상금에 대해 설명하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뜨겁게 포옹한다. ⓒ 저지 필름


수많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주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직접 발로 뛰는 에린의 악착 같은 근성과 진실을 향한 치열한 열망과 간고한 노력은 성미산 지키기를 비롯해 4대강사업 반대로 귀결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시민사회에 시사 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준비 없이 참여 없고, 조사 없이 발언 없다는 그 진리 말입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파산 위기에 처한 에드가 파트너로 요청한 로펌에서 온 변호사가 자신을 깔보자 에린이 주민 600명의 전화번호와 인적사항, 병증을 줄줄이 입에 꿰차며 그 변호사의 콧대를 꺾어 놓는 장면은 '현장 속으로'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법원의 중재로 전략을 바꾼 로펌 변호사들이 단 한 명의 서명도 받지 못하고 빌빌거리자 에린이 닷새 만에 소송원고 634명 전체의 서명을 받아 내는 대목은 '주민 속으로'의 살아 있는 교본입니다.

반면 세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다 변호사 사무실까지 데려 오는 모습은 '일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옆집으로 이사 온 따듯한 히피 조지와의 사랑과 이별은 일과 가정이라는 오래된 선택 앞에서 흔들리고 갈등하는 여성의 모습도 드러냅니다.

하지만 에린은 '활동'을 통해 자신에 대한 존엄과 공익적 가치를 깨달아 가며 자신의 발로 세상을 향해 발돋움해 나갑니다. 그리고 에린의 이런 모습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야말로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데 한 치의 부족함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산은 물길을 막고, 물은 산을 돌아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에린과 같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한국사회에도 있습니다. 다만, 지상이 아닌 상공에서 그것도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 있다는 기막힘이 다를 뿐입니다. 바로 4대강 낙동강 공사구역인 창녕군 함안보 타워크레인과 남한강 공사구역인 여주군 이포보 교각 위에 올라간 환경운동가들입니다.

이포보 교각위에 올라간 염홍철 환경련 사무처장은 '이포 바벨탑'에서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30m 높이의 이곳에 오른 것은 국민의 소리를 들으라는 요청을 위해서입니다. 국민의 4분의 3이 반대하거나 우려하는 4대강 사업에 대한 재검토와 조정을 청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습니다. 4대강 저지에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현실은 한국 사회가 더 많은 '에린 브로코비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다름 아닙니다.

1972년 6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연합의 '인간환경선언'에서 채택된 제1항은 "인간은 그 존엄과 복지가 유지될 만한 환경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을 가지는 동시에 현재 및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환경을 보호하고 개선할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35조 역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스톡홀름 인간환경선언의 정신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채택하도록 헌법이 명문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이려고 이포보 농성장 부근에서 폭력을 조장하고 함안보에서는 대체 투입된 기중기가 타워크레인과 충돌해 농성중인 환경운동가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토해양부는 한술 더 떠 충남북이 4대강사업에 찬성했노라 왜곡 발표하고, 조중동은 발 빠르게 되받아 쓰고 있습니다.

성미산마을에서 하이얀 아카시아 꽃이 제철 그대로 피듯, 4대강이 자연 그대로 흐르는 것입니다. '산은 물길을 막고, 물은 산을 돌아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우리네 선대의 치수와 자연관입니다. 기를 쓰고 이를 역린하려는 이명박 정부에게는 영화에서 첫 재판에서 진 PG&E가 변호사들을 보내 2천만 달러로 타협하려는 상황에서 에린이 그들에게 날리는 다음의 멘트가 '딱'입니다.

"힝클리 주민들의 꿈은 애들이 풀장에서 노는 걸 보고 싶고, 피해자인 로사처럼 스무 살 나이에 자궁 절제술을 안 받아도 되길 원하며, 스탠처럼 척추 때문에 고생하지 않길 바래요. 꼴 같지도 않은 제안을 하러 오기 전에 (변호사) 워커씨 당신의 척추 가격부터 따져 봐요. 아울러 산체스양, 당신 자궁의 값어치도요. 댁들을 위해 특별한 물을 준비했으니 그거나 마셔요. 힝클리에서 가져왔으니까."

에린 브로코비치 성미산 4대강 농성 함안보 이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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