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더-마인호프 포스터 2008년 68운동 40주년을 기점으로 유럽전역에 개봉된 화제의 영화 바더-마인호프 컴플렉스

▲ 영화 바더-마인호프 포스터 2008년 68운동 40주년을 기점으로 유럽전역에 개봉된 화제의 영화 바더-마인호프 컴플렉스 ⓒ 제작사


시사회 등을 통해 극장가에서 상연중인 바더 마인호프(2008)의 원제는 <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Der Baader-Meinhof Komplex)다. 2008년 68운동 40주년을 맞아 유럽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2009 아카데미 외국영화상후보에 올랐으며, 올 여름 한국 극장가를 달굴 예정이다. 이 영화는 독일역사상 최대 제작비가 투여됐다.

적군파(RAF, Rote Armee Fraktion)를 결성한 실존인물들인 안드레아 바아더와 울리케 마인호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써 '롤라렌트'의 모리츠 블라입트로이(안드레아 바아더), '타인의 삶'에서 열연한 마르티나 게덱(울리케 마인호프), 나치영화 '몰락'에서 히틀러역을 맡은 브루노 간츠가 출연하는 등 화려한 배역진을 자랑한다.

이 영화의 원제 바더-마인 콤플렉스와 68운동

영화 '바더-마인호프'를 볼 때 떠오르는 두 가지 이슈는 '바더-마인호프 콤플렉스'(Der Baader-Meinhof Komplex)와 독일 68운동의 아이콘 루디 두치케(1940~1979)라는 구동독출신 사회주의 운동가다. 이는 68운동의 직접적 원인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당시 독일역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68운동의 배경이 다름아닌 경제위기"라는 점에서 사뭇 다른 시각을 드러낼 수 있다. 1959년 당시 서독 재무장관이었던 루드비쉬 에어하트에 의해 진행된 미독간 금융 통화스와프가 실패로 끝나자 바로 1966년 독일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때문에 한동안 경제 불황과 대량실업이 발생해 사회불만이 정점에 달한 시기가 바로 68운동의 또 다른 배경인 것이다.

먼저 바더-마인호프 콤플렉스는 한국에서 좌파이데올로기를 지칭할 때 쓰는 '레드컴플렉스'와는 전혀 다른 색채의 단어다. 여기서 바더-마인호프 그룹은 독일 사회주의혁명테러단체 적군파(RAF)이며, 현재 한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훨씬 자유로운 나라에서 발생한 최초의 무장테러조직체다.

특히 이들의 무장투쟁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백화점 폭파사건, 은행강도, 유럽 우파정치인 암살요격 및 美CIA요원 사살사건, 이스라엘 관공서 폭파사건 및 모사드요원 암살, 11대의 항공기 피랍, 베이루트 미대사관 폭파사건 등 미국과 함께 묶인 자유진영에서 제법 공포스런 존재였다.

독일 적군파 일원은 불과 몇 년 전까지 수배중이었으며, 주모자 일부만 모사드와 CIA에 의해 유럽에서 체포됐을 뿐이다. 다시 말해 지금도 겨우 민주화된 체제에서 경제위기와 함께 유사한 현상이 또 다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독일 68운동의 상징이었던 루디 두치케 1967년 12월 6일 쾰른 학생회관에서 10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동참호소를 하고있는 독일사회주의대학생연맹(Ideologe des Sozialistischen Deutschen Studentenbunde (SDS) 대표 루디 두치케, 그는 68운동의 상징이자 유럽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 독일 68운동의 상징이었던 루디 두치케 1967년 12월 6일 쾰른 학생회관에서 10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동참호소를 하고있는 독일사회주의대학생연맹(Ideologe des Sozialistischen Deutschen Studentenbunde (SDS) 대표 루디 두치케, 그는 68운동의 상징이자 유럽민주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루디 두치케와 68운동

두 번째 68운동사를 다루는데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 1940~1979)를 빼고는 원인설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독일 68운동의 상징적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68운동(이른바 1968년 5월혁명)의 원인으로 두 가지가 존재하는 데, 먼저 1967년 6월 2일 베노 오네소그 총살사건이다. 당시 미국의 꼭두각시인 이란의 팔레비 국왕 부부의 방독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베를린과 전국 대도시에서 발생했고, 그중 베노 오네소그라는 대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면서 사태가 확산됐다.

이어 사회주의대학생연맹(SDS)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가였던 루디 두치케가 1968년 4월11일 베를린 시내에서 경찰관에 의해 피격당한 사건으로 '5월 혁명'(68운동)이 발발했다.

루디 두치케 피격사건은 로자 룩셈부르크 숙청사건과 유사하다?

지난 1919년 독일노동자연맹이 주축이 된 리입 크네시트 정당의 리더이자 여성 사회주의운동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이유도 당시 왕정보수정당과 합작을 원하던 사민당 당내 변절자들의 보수화 때문이다.

당시 로자는 사민당의 수정주의노선을 변절로 비난하고 동시에 러시아 혁명을 통해 집권한 스탈린과 레닌의 공산주의를 전체주의의 연장선으로 비판하는 등 반전체주의,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해왔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보수, 진보 등 두 이념을 매개체로 권력집착만을 꾀한 제도정당의 정치적 표적이 된 셈이다.

루디 두치케 또한 구동독에서 태어나 유년기부터 루터교 공동체에 가담하고 '인민군 입대거부'를 통해 자기의사를 표현하는 등 구동독 정보국 스타지(STASI)의 요주인물로 감시 받아왔다. 그는 이어 반자본, 반미, 반독재, 반전주의를 표방하며 1968년 3월 체코 프라하로 건너가 동지들과 반군부, 반공산주의운동인 '프라하의 봄'을 주도했다.

유럽 '68운동'을 볼 때 마다 혼란스러운 점은 "어떻게 해서 서독에서 결성된 독일사회주의대학생연맹(SDS)이 반미와 반자본, 독재를 넘어 공산주의마저 비판적으로 바라봤는가?"다. 다름아닌 군부를 앞세운 전체주의에 향한 반발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8년 체코에서 발생한 '프라하의 봄'이다. 이념상으로는 도저히 갈라 설 수 없는 루디 두치케라는 사회주의자가 공산국가까지 넘어가 군부철수를 요구하고 현지 대학생들과 시위를 주도 한 점이다. 그는 이로 인해 한 달 뒤 피격됐으며 최근 그 암살배후가 구동독 정보국 스타지로 밝혀졌다.

유럽식 민주주의와 한국식 민주주의의 차이를 설명한 바더-마인호프

적군파 일원이었던 울리케 마인호프 1964년에 촬영된 시사잡지사 기자였던 울리케 마인호프의 낡은 사진

▲ 적군파 일원이었던 울리케 마인호프 1964년에 촬영된 시사잡지사 기자였던 울리케 마인호프의 낡은 사진

비록 바더-마인호프가 결성한 적군파가 1968년 발생한 5월 혁명(68운동)이후 급진화와 과격화를 주도했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당시 기민-사민 연립연정(1차 신호등연정)으로 결성된 서독정부와 미국과의 긴밀협조를 끌어냈고, 구동독과 동구권 지원책인 동방정책을 추진하는데 촉매제로 작용됐다.

바꿔 말해 민주주의가 제도권을 넘어 극단적 대립으로 치달았을 때, 한국 시민들은 평화시위를 주도했고, 유럽은 무장투쟁을 통한 극한 대립을 경험한 후에야 민주주의와 정치중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유럽의 민주주의는 현재 한국 민주주의와 극명한 차이가 존재했다.

독일 68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모티브

한국과 독일 민주화운동사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야할 부분이 바로 이념대립이다. 즉 이념적 좌와 우로 나눠 이분법적 접근방식으로 민주화운동을 다루면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다름아닌 다양성이 결여된 역사인식이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의회민주주의를 동의하지만 전체주의는 동의한 적이 없다. 앞서 기득권세력에 의해 피살된 로자 룩셈부르크와 루디 두치케의 행적이 이를 증명한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체주의와 사회 및 경제독점을 원하는 일부 세력들의 농간에 국민전체가 농락당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1925년에 촬영된 아돌프 히틀러 총통 바이마르 제2공화정 힌덴부르크 정권에 이어 1925년 총리로 임명된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

▲ 1925년에 촬영된 아돌프 히틀러 총통 바이마르 제2공화정 힌덴부르크 정권에 이어 1925년 총리로 임명된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


독일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1920년대 바이마르 제1 공화국의 사회민주주의체제에서 힌덴부르크의 제2 공화정으로 넘어가면서 보수화 및 계층갈등을 표출한 급격한 자본주의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가 소속된 리입크네시트 노동자당이 숙청되면서 나치당의 합작노선이 깨지고 얼마안가 바이마르 공화정이 탄생된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뒤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zialismus)라는 모토 아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발생한 극우파시즘이 보수세력(힌덴부르크 공화국)을 짓밟고 민족주의 독재를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어 1960년대 반전운동의 효시인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소련 양진영의 냉전과 군사지형 다툼이 주된 원인이었고, 자주독립을 원했던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은 1%도 안되는 중국계 부유층과 미국, 프랑스의 자국민 착취가 극에 달한 시점에서 북베트남에서 전선확대를 꾀했다는 점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즉 당시 베트남전은 미국이 참전할 이유가 없는 엄연한 '독립운동'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지난 반 세기동안 미국,일본과 같은 강대국들의 입김아래 진행됐으며, 현재도 그 대가가 국민의 피로 얼룩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기득권 유지에 반발하거나 정상적인 민주화를 요구할 때마다 5.18 민주항쟁, 6.10민주항쟁에 이어 '2008 촛불집회'처럼 공권탄압 아래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한국의 좌파운동은 유럽과 비교하자면 존재조차도 미미하며, 기초를 다지기 전에 죄다 괴멸됐다. 결과적으로 한국에는 좌파세력이 없다. 또 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김대중 노무현과 국민, 참여정부는 보수언론매체가 지적하는 '좌파정부'가 아니라, 정상적인 보수우파 정권이다. 단지 이것을 색깔론으로 몰아 정치고립을 획책했던 보수세력은 과거 친일, 친군부세력으로 분류되는 매국노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보는 좌익이란 그들의 기득권에 반기를 들면 바로 덧씌우는 "이분법적 색깔론"에 불과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과 독일의 민주화운동사에 있어 좌우대립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영화 바더-마인호프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것은 지난 2008년 촛불집회를 겪은 한국사회에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장과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많은 의문과 난제들을 제시 했다.

독일은 루디 두치케 피격사건으로 인해 온건좌파 세력이 극좌 세력으로 돌변해 엄청난 파국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곱 씹어봐야 할 부분이 많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아직 이론적 민주화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보다 더 많은 변화와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반문해 본다.

덧붙이는 글 바더마인호프라는 영화를 보며 한국과 독일의 민주화역사가 다르다는 걸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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