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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은 서울 대표 번화가기도 하지만 오래된 건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20년 만들어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 건물인 신촌역. 새건물이 들어서기 전인 2004년 1월 찍은 사진이다.
 신촌은 서울 대표 번화가기도 하지만 오래된 건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20년 만들어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 건물인 신촌역. 새건물이 들어서기 전인 2004년 1월 찍은 사진이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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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신촌역 일대는 서울에 처음 올라온 사람도 아는 유명 도심지다. 2006년 지하철 승차 인원이 5만5천여 명. 하차 인원에다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드나드는 인구까지 더하면 하루 유동 인구는 10만명 이상이다.

주변에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가 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홍익대와 추계예술대가 있어 대학가라 할 만하다.

신촌은 하마터면 조선 수도가 될 뻔한 지역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터를 물색할 때 이곳이 새도읍터라고 해서 새터말이란 이름이 붙었다. 신촌은 '새터말'의 한자식 이름이다.

신촌의 명물인 구 신촌(기차)역은 1920년 만들어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역 건물이다(2007년 민자역사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문을 닫은 채 보존되고 있다). 1925년 만들어진 서울역보다 5년이나 빠르다. 지금껏 신촌역에서 내리면 항상 북쪽 방향인 연세대나 이화여대 방향으로만 나갔다. 남쪽 방향인 서강대나 대흥역 쪽으로 가도 대로만 다닐 뿐이었다.

대로와 뒷길이 다르다는 것에 매번 놀라게 된다. 신촌역과 인근 이대역 아래쪽으로 나오면 대흥동이다. 노고산동과 대흥동으로 나눠져 있다가 더해져 대흥동이 됐다.

대흥동과 인근 마을 일대는 독을 구어 파는 마을이라고 해서 독막 또는 독마을(甕里)이라고 불렸다. 그 뒤 일제시대 때 동막상리(東幕上里, 현재 용강동)와 독막하리로 일방적으로 나눠졌고, 독막하리는 다시 대흥정(大興町)이 됐다. 대흥동이란  이름은 여기서 비롯했다. 이 지역 역사와 전혀 무관한 이름이 동명이 된 것이다.

"재개발 되면 안 돼, 이 나이에 이 집 팔고 어딜 갈 거야"

대흥동사무소 부근.
 대흥동사무소 부근.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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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동사무소 근처에서부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대흥동은 지난해 1월 노고산동과 통합됐고, 대흥동사무소도 노고산동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동쪽으로 발길을 옮겨 골목으로 들어서자 단층 기와집 동네가 나온다. 개량하기 전 옛날식 기와집도 보인다. 몇 곳은 부서진 상태다. 몇몇 집이 철거됐다. 대규모 개발이 아니라 몇몇 집만 새로 세우는 재건축이다.

이 동네는 길이 좁고 많이 꺾여 있다. 적당한 지점엔 공터다. 평상 등 쉼터가 있는 것은 오래된 골목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댕기동자' '청룡암' 같은 이름들이 보인다. 알고 보니 점집들이다. 산 근처에 최영 장군을 모신 당집이 있었는데, 불이 안 나는 당이라고 해서 '불당제'라고 불렀다. 지금은 화재로 사라졌는데 그 때문이 아닌가 추측을 해봤다.

디딤길에 있는 신촌예배당 제1, 2교육관은 아주 소박하다. 조그만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동네 모습을 열심히 사진 찍는데 갑자기 한 어르신이 "왜 찍냐"고 묻는다. 사진을 찍어서 동네를 소개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얼굴이 환해진다. 어르신이 눈을 매섭게 뜨고 물어본 이유가 있었다.

옛 집 사진을 찍어서 구청에 신고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마을에 이런 곳이 많으니 이런 상황을 알고 빨리 재개발하라면서. 어르신은 재개발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아파트 지으면 관리비 감당을 어떻게 해요? 우리는 수입도 없는데. 노후대책이 뭐예요. 자식들 손 안벌리는 거잖아요. 평생 돈 벌어서 이렇게 집 한 채 마련해 놓고 이제 자식들 손 안 벌리려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파트 지으면 손 벌려야 돼요. 이 돈 갖곤 어디 가서 전세도 못 얻어요. 이런 동네가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문 열어 놓고 살면 옆 집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튀어나오지. 아파트는 그런 게 없잖아요. 요즘 세상이 참 뒤숭숭하더만."

어르신은 자신을 '8·15 해방둥이'라고 소개했다. 올해 63세라는 뜻. 어르신은 이 동네서 30년 이상 살았다면서 앞으로 계속 살았으면 하는 뜻을 비쳤다.

서강대 뒷산 노고산동, 고려장 설화 떠올리게 하는 곳

노고산에서 바라본 대흥동
 노고산에서 바라본 대흥동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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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중간은 대부분 다세대주택이더니 꼭대기 쪽에 가니 기와집이 다시 나타난다. 노고산 꼭대기 바로 아래 있는 피아노교실은 영화세트 같다. 산 쪽 집 옆엔 조그만 텃밭이 붙어 있다. 얼마 되지 않는 흙이지만 도시에 여유를 준다. 콘크리트만 보다가 텃밭을 보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서강대로 들어갔다. 노고산 대부분이 서강대 부지기 때문에 노고산에 오르기 위해선 서강대 쪽으로 가는 게 제일 좋다. 정문으로 들어가 노고산 입구에 이르니 김의기 열사 추모비가 보인다.

1976년 서강대 무역학과에 입학했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보고 그 해 5월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몸을 던졌다고 쓰여 있다. 봄을 맞은 산 입구엔 온갖 꽃이 피어 있고 학생들은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서강대 안 노고산 입구에 있는 김의기 열사 추모비.
 서강대 안 노고산 입구에 있는 김의기 열사 추모비.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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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에서 대로를 두 개만 건너면 이한열기념관이 나온다. 경찰 최루탄 직격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시신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쓰러진 이한열을 이종창이 안고 있는 사진은 그 때를 기억케 하는 유명한 사진이다. 노고산동이 대흥동과 통합되면서 동명이 사라졌지만, 기념과 주소는 여전히 노고산동으로 돼 있다.

1991년 5월 19일자 <한겨레>를 보면 "마포구 노고산동 신촌역 부근 치안본부 정보분실에 학생 등 50여 명이 몰려가 화염병 30여개를 던져 경비실이 불타고 건물 앞에 세워둔 차량 2대의 유리창이 깨지고 분실 건물 일부가 그을렸다"고 보도하고 있다. 치안본부 정보분실이 있었다면 그 당시 시위대의 주요 공격대상이었을 것이다.

천천히 학교 뒷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산이 가파르지 않아 힘들지 않다. 산 높이는 109m. 정상까지 오르는 데 20분이면 충분하다. 이미 산에 오른 동네 주민 몇 명이 몸을 풀고 있다. 함께 산을 오른 친구 정래에게 "정상에 올랐으니 기념사진을 찍어야지" 하면서 자세를 취했다.

높은 산 꼭대기에선 구름과 하늘이 보이지만, 낮은 산 꼭대기선 동네와 마을이 보인다. 아무래도 사람 사는 동네가 보이는 게 나는 좋다.

노고산 꼭대기 바로 아래에서.
 노고산 꼭대기 바로 아래에서.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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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老姑山)은 <대동여지도>나 <수선전도(首善全圖)>, 그리고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는 노고산(老古山)이라고 나온다. 언제부턴가 한자가 바뀐 것이다.

혹자는 한강 서쪽 끝에 있어 한미산(漢尾山)이라 불리다가 다시 할미산으로 잘못 전해진 뒤, 한자로 노고산(老古山)이 됐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도 보인다.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한미산을 노고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천시 노고산 또한 큰 밭이란 의미에서 '한메'로 불리다가 한미산-할미산-노고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흥동사무소 홈페이지를 보면  노고산이 노인과 관계가 있긴 하다. 노고산 쪽에 있는 숭문고등학교 옆 서낭당 주변 마을에 많은 노인들이 살았다. 어느날 고을원이 마을 노인을 모두 산에 갖다 버리라고 명령한다.

그 때 산신령이 나타나 마을에 큰 재앙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언덕 위 집 한 채를 알려주는데, 그 곳에 노인 한 명이 있었다. 그 노인은 고을원에게 "어찌 나랏돈을 착복하고 조강지처를 노비로 만들었냐"고 호통치고 모든 일을 원래대로 하라고 알려주었다(노인을 버리는 일).

크게 겁을 먹은 고을원이 그대로 했더니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 그 노인은 마을 사람들이 바치는 음식을 먹으며 평생을 살았고, 그 뒤부터 서낭당 뒷산을 노고산(老姑山)이라고 불렀다 한다.

노고산은 한국 근대사의 비극과 관계된 곳이기도 하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프랑스 선교사로 처음 조선 땅을 밟은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Maubant, 羅),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처형된 뒤, 신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곳이기 때문이다.

용산선 철길 지나던 마을, 지금은 복선 공사로 흔적만 남아

서강역. 과연 철거를 피할 수 있을까?
 서강역. 과연 철거를 피할 수 있을까?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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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역에서 4번 출구로 나오면 한창 공사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용산선이 지나던 자리다. 대흥동 일대엔 두 개 기차선이 지나가는데, 용산역에서 떠난 기차가 하나는 서울역-신촌역-가좌역으로 이어진다. 경의선이다.

또 하나는 용산역에서 서강역으로 지나 가좌역으로 이어진다. 용산선이다. 이 부근 용산선을 지하화한 뒤 인천국제공항철도와 경의선 전철이 지하 용산선을 달릴 예정이다. 이 일대를 거닐면 이제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용산선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흥동은 1923년 3월 용산-당인리간 왕복 용산산이 만들어지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인리 화력발전소에 쓰는 물자운반용 철도를 개통하는 중간기점인 동막역(지금의 대흥동 굴다리 부근)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동막역 부근에 우물을 새로 만들었고, 우물이 있는 동네를 새우물거리라 불렀다.

당인리발전소는 서울 유일의 화력발전소로 1924년 만들어졌다. 5호기까지 만들어졌다가, 1982년과 87년 각각 3기를 없애고, 4, 5호기는 지역난방 열병합발전소 설비로 바꿨다.

80년 넘게 운영된 화력발전소는 2012년이면 수명이 다한다. 이후 공간 활용에 대해선 지역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한전과 중부발전은 발전시설을 지하로 옮긴 뒤 지상공간을 공원 등으로 쓰자는 방안을 내놓았고, 관할 행정구청인 마포구청은 안전성 문제 때문에 아예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인리선은 1982년 6월 10일 폐선됐고, 2005년엔 경의선 복선 전철 공사로 용산선도 철거됐다.

옛날 철도 건널목이 있던 자리.
 옛날 철도 건널목이 있던 자리.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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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철길 자리를 따라서 걷는 도중 허리쯤까지 오는 돌 두 개가 길 양 옆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뜬금없이 세워진 돌을 보고 잠시 생각했다. 이게 뭘까. 근처엔 가게가 하나 있었고, 주민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뒤 기차가 지나갈 때 통행을 막는 차단막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집에서 나오는 어르신에게 물었더니 맞다고 한다. 용산-문산간 복선전철 공사가 끝나면 아마 주변 건물이나 흔적은 모두 지우겠지만 이와 같이 작은 흔적은 남겨두면 어떨까 싶다. 옮기기에 큰 물건도 아니거니와 이와 같은 흔적이 있으면 이 곳에 과거 지상을 지나는 기차가 있었다는 알리는 표시도 되기 때문이다.

공사장을 따라 걷다 보니 공사장 안에 아주 오래된 듯한 역이 보인다. 서강역이다. 용산선에 있는 역이었던 서강역은 1906년 10월 1일 영업을 시작했고, 역사는 1929년 만들었다. 그 뒤 1939년에 개축을 했으니 지금 건물이 대략 70년 정도 됐다는 뜻이다.

서울에 남은 유일한 일본식 간이역이다. 같은 시대 건물이었던 화랑대역과 신촌역은 근대문화재로 지정돼 있지만 서강역은 아직 문화재 지정이 돼 있지 않다.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뜻이다. 역 근처는 공사가 한창이다. 온갖 건설 장비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주변은 온통 철골 구조물. 서강역은 고양이 앞에 쥐처럼 위태위태하다.

철길은 사라졌지만 흔적은 '철길마을 김치삼겹살' '철길 정육점' 등 동네간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6년 5월 20일 경의선 복구 공사와 함께 철거된 시장도 철길시장(또는 철둑시장)이었다. 철길시장은 그 자리에서 약 30여년 동안 운영이 됐다.

신촌역 일대는 온갖 첨단이 물결치는 곳이다. 하지만 신촌역, 서강역 등 근대유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국 프로야구 최강팀인 양키스 구장은 1923년 만들어졌다. 양키스의 영광과 좌절이 구장엔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못하란 법이 없을 것이다. 옥석을 나누듯 모두 버리기보다 버릴 것, 담을 것을 나눠서 가면 좋겠다. 이미 버린 뒤에 수습하려고 해도 그 땐 이미 늦지 않은가.

한 줌 흙만 있으면 어디든 꽃은 핀다. 오래된 계단이 새 계단보다 좋은 이유다.
 한 줌 흙만 있으면 어디든 꽃은 핀다. 오래된 계단이 새 계단보다 좋은 이유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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