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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비천국 나비천국. 멕시코 중부 마라바티오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야산. 로페즈의 안내로 가게 된 곳으로 비록 유명하진 않지만 미추아칸 못지않은 나비 떼로 별천지를 이룬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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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페즈를 따라 올라간 산길이 녹록치 않다. 정상까지 차를 타고 비포장 길을 30분, 다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야했다. 결론적으로 고생한 보람이 헛되지 않았다.
▲ 귀한 것을 보기 위하여 로페즈를 따라 올라간 산길이 녹록치 않다. 정상까지 차를 타고 비포장 길을 30분, 다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더 올라가야했다. 결론적으로 고생한 보람이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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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이예요? 그렇게나 많이?"
"글쎄 그렇다니깐요! 거기다 내 사유지니 지금껏 들어와 본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예요."

허풍에 가까운 놀랄만한 사실에 동공이 확대되고 무뎌졌던 신경이 생기 있게 곤두섰다. 로페즈는 자신의 집 뒷산에 엄청난 보물이 있는 것처럼 내게 자랑하고 있었다. 기왕지사 그의 안내로 가기로 한 거 이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일만 남았다. 내 눈이 장식용이 아니라면 그의 호언대로 놀라 탄성을 지를 일만 남은 것이다.

로페즈의 집은 산간 쪽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차로 비포장을 30여분 정도 올라가야 했다. 빽빽이 우거진 수림 사이로 먼지 풀풀 내며 산길을 달리는 게 얼마만인지. 덜컹거리는 좌석에 엉덩이가 들썩이고 로페즈의 장담에 마음까지 동요한다.

멀리 보드랍게 흰 꽃을 피운 배나무들이 보이고 시골 할머니 댁처럼 포근한 집에 들어서니 날개를 채 다 펴지도 못하고 꼬꼬댁하며 땅을 성급하게 헤엄쳐가는 닭들에 마당이 소란스럽기만 하다.

멕시코 중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용설란의 즙을 짜내 만들어 마시는 술이다.
▲ 마게이(Maguey)로 만든 미스깔(Mezcal) 멕시코 중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용설란의 즙을 짜내 만들어 마시는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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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 친구 문이에요. 자전거 타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제 알렉스랑 같이 만났다가 오늘 집으로 데려왔어요."
"로페즈, 시장할 텐데 식사부터 하지. 잘 왔어요. 부엌에 수프와 치킨요리 해 놨어요, 와서 들어요."

정겨운 시골풍경에 켜켜이 녹아든 인생의 연륜으로 주름이 져진 로페즈의 부모가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준비된 치킨과 수프로 시장을 달래고 바로 뒷산에 오르기로 했다. 나만큼이나 마음이 들뜬 걸까. 몇 번을 봐 왔을 로페즈의 아버지도 손님과 함께 또 가고 싶다며 앞자리에 동승했다.

산은 겉보기에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급하게 경사진 돌길을 30여분에 걸쳐 올라갈 만큼 그 산새가 험했다. 그래서 이곳엔 로페즈와 수신탑이 설치되어 있기에 방송 관계자만 드나들고 있었다. 더욱이 로페즈가 말하는 곳은 차에서 내려 한 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지칠 만도 하다.

"난 지쳤어요. 그냥 여기서 쉴래요. 둘이 갔다 와요."

생경스러운 꽃의 모양이 그 아름다움을 지키려 꼭 독이 든 것처럼 보인다.
▲ 이름 모를 꽃 생경스러운 꽃의 모양이 그 아름다움을 지키려 꼭 독이 든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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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트레킹이지 등반이나 다름없는 길에서 일단 로페즈의 아버지가 포기했다. 바위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내쉬고 흐르는 땀을 닦는 걸 보니 속일 수 없는 나이에 체력적으로 부친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를 두고 우리끼리만 가야했다. 나 역시 뜨거운 햇살 아래 물을 포함한 아무 장비도 없이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살짝 후회가 들려고 했다.

멕시칸들의 허풍은 침소봉대가 무색할 정도로 그 화려하고 과장된 설명으로 도배되어 있는 경우가 잦아 이 산행에 대해 전혀 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고생하며 올라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로페즈는 자신의 사유지임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산길에 둘러쳐진 울타리 문을 열쇠로 열어 젖혔다.

"이야! 나비들이네?"

아름다운 인분(鱗粉)이 빽빽이 묻어 있어 아름다운 색채의 반문을 나타낸다.
▲ 화려한 색깔 아름다운 인분(鱗粉)이 빽빽이 묻어 있어 아름다운 색채의 반문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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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안부 묻는 것 외에는 침묵을 태우고 올라간 지 이십 여분쯤 됐을까. 무더위에 지치고 발걸음이 천근이 될 때쯤 드디어 나비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날개를 펄럭거리며 하늘 위를 떠다니는 봄의 전령사들.

"아직 아니에요. 벌써부터 놀라면 어떡해요? 아직 십 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해요."

수십 마리의 나비 떼에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나에게 로페즈는 남은 길을 마저 갈 것을 채근했다. 너른 공간을 우아하게 나다니는 나비들을 따라 시선을 쫓아갔다.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힌 귤색 곤충들은 완벽한 2차원의 이미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로페즈가 야심차게 준비한 나비 떼의 향연은 아직인가 보다.

정상에 가까워 올수록 저 아래로는 두 도시가 회색빛 시가지를 이루며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자전거로는 반나절을 달릴만한 거리가 산 위에 오르니 두 눈에 들어찼다. 이름 모를 꽃들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셔터를 누르고 산에 모든 것을 훑어보려는 듯 좌우상하를 호기심 가득하게 둘러보며 이윽고 로페즈가 침 튀겨가며 말했던 그 장소에 도착했다.

나무에 빽빽이 붙어있는 게 모두 나비다.
▲ 세상에! 나무에 빽빽이 붙어있는 게 모두 나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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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굉장하죠?"
"맙소사, 이런 세상에!"

순간 나는 엄청난 광경에 압도되어 잠시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혼란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이게 다 나비란 말이죠?"
"그럼요, 여기랑 미추아칸 쪽으로 나비들이 많이 가죠. 미추아칸 나비 축제 알죠? 4월 정도 되면 엄청나게 나비들이 몰려들거든요."
"도대체 이 나비들이 다 어디서 온 거예요?"
"음, 대부분 캐나다에서 날아오는 게 많아요. 여기에서 교미하면서 알을 낳기 때문에 수가 엄청나죠."

굉장했다. 허풍이 아니라 도리어 로페즈의 설명이 빈약할 정도였다. 처음엔 수십 수백 마리가 눈에 보이더니 갈수록 그 숫자가 증가해 결국엔 수백만 마리가 완전히 숲을 뒤덮은 광경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나비세상이었다.

공포영화에서나 볼 법한 소름끼치도록 엄청난 나비 떼에 기겁했다. 이 친구들이 모두 나에게 달려들면 난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몇 마리는 아예 내 몸에 달라붙었다. 아무 것도 아닌데도 움찔했다. 길 위에도 몇 천 마리가 이미 죽어있었다. 여기도 나비, 저기도 나비, 거기도 나비, 나비, 나비, 그리고 나비.

▲ 미추아칸 나비 알래스카에서 남미최남단 파타고니아까지 자전거 여행하는 데미안(Demian)의 나비영상. 멕시코 미추아칸은 4월이 되면 엄청난 나비떼들로 인해 여행자들이 몰려오는 세계적인 나비관광명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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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넷… 238만 7056마리…."

맞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세어보기 전엔 반드시 틀린다는 보장도 없어 내 멋대로 나비수를 재단하고는 그냥 조용히 감상에 젖었다. 대관절 이렇게 엄청난 광경을 두고도 나라에선 아무 말이 없는지 궁금했다. 여행지로 개발을 해도 충분할 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인데 말이다.

"뭐, 수소문 해보긴 했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고요. 여길 개발하기엔 길도 좋지 않고, 나비 하나 보자고 엄청난 돈을 길 위에 뿌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마치 괴기영화의 한 장면처럼 엄청난 나비떼가 하늘을 뒤덮는다.
▲ 가슴에 두 쌍의 날개를 펄럭거려 마치 괴기영화의 한 장면처럼 엄청난 나비떼가 하늘을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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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산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기초시설만 해도 엄청난 경비가 소요될 것은 뻔했다. 몇 년 간 꾸준히 로페즈가 손수 도로 공사를 했기에 지금은 그나마 자신의 차와 방송차들이 산 중턱까지는 무리 없이 다닌다고 한다. 그러니 이곳은 어쩌면 영원히 로페즈의 아지트로만 남을 공산이 커졌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은 나비 떼에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로페즈와 기다리던 그의 아버지는 나무 그늘에 다정히 앉아 부자간에 이 지역에서 유명한 마게이(Maguey)로 만든 미스깔(Mezcal)로 술잔을 기울였다. 옆에 타는 목마름으로 갈증해소만 머릿속을 지배했던 나는 건네받은 오렌지를 흡혈귀처럼 쪽쪽 빨아 과즙이란 과즙의 온 수분을 빨아들였다.

환상적인 나비 떼를 구경하고는 집으로 내려 와 침대 위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누가 날 깨우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졸린 눈을 비비고 왁자지껄한 소리에 밖을 보니 언제인지 모르게 알렉스와 그 친구들이 와서 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냥 모여서 귀청 떨어지도록 노래를 틀어놓고 음식과 술을 먹고 노는 것이다.

"문, 얼른 나와요. 당신이 깨어나기 전에 이거 다 먹으려고 했어요."

농담하며 식사를 권유했다. 로페즈의 집 마당에는 푸짐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숯불에 즉석에서 구운 소시지와 소고기, 그리고 치킨을 토르띠야에 싸서 치즈까지 뿌려 연달아 입 속으로 밀어 넣는 최고의 먹거리.

토르띠야에 두툼한 소고기를 얹고 그 위에 치즈를 더해 한 입 베어 물으면 그야말로 진미. 배가 불러도 자꾸 손이 간다.
▲ 흥겨운 날에는 음식도 흥겨워야 토르띠야에 두툼한 소고기를 얹고 그 위에 치즈를 더해 한 입 베어 물으면 그야말로 진미. 배가 불러도 자꾸 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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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점차 감청색으로 변하는 해질 무렵에 모닥불을 피워놓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고 모두들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해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처음 나를 보고 반갑게 초대해 준 알렉스는 그의 여자 친구를 데려와 소개시켜 주었다.

또 다른 친구는 그렇지 않아도 신나는 분위기에 흥을 더 돋우기 위해 깜짝 '불 쇼'를 선보였다. 잠에서 덜 깬 나는 정신이 없었지만 확실히 정신이 다 깼을지라도 정신이 없었을 것이라는 걸 의심치 않을 이 밤의 풍경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산 아래 도시에서 나비들이 춤을 추 듯 하나 둘 켜지던 오렌지 빛 불들이 완전히 만개했다. 또 아까 본 나비들만큼이나 숱한 하늘에 박힌 별들이 뚝뚝 쏟아지고 내 마음에 감동도 흘러넘치다 못해 주체하지 못하고 강렬하게 솟구쳐 올랐다. 이 감흥 속에서 알렉스와 로페즈는 만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세심하게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이렇게 멋진 만남을 있게 해 준 친구들과 사진 한 컷.
▲ 파티 중에 이렇게 멋진 만남을 있게 해 준 친구들과 사진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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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아미고!"

쉽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그들의 호탕한 음성은 너무 기분 좋다. 친구란 부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것. 그들이 이끌어서 보게 된 모든 것들이 마치 꿈 한 폭 그린 듯한 착각처럼 느껴졌다. 이 밤에 믿기지 않는 황홀한 꿈을 꾸는 것처럼….

"문, 분위기 이렇게 좋은데 한 잔 해야죠. 자자, 즐기자고! 정말 데킬라 한 잔 안 할 거예요?"
"하하, 알렉스, 옆에 콜라나 따라주시죠."

불꽃쇼
▲ 흥을 돋우는 알렉스 친구의 불꽃쇼 불꽃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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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자전거, #세계일주, #멕시코, #마라바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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