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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신한 여성의 형상을 한 나무 '산토신.' 참배객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왼손으로는 남자성기 모양의 나뭇조각을, 오른손으로는 산토신의 배를 만지며 소원을 빈다. 신사의 신 가운데 돌과 나무가 많은 데서 드러나듯, 신도는 강한 자연숭배의 전통을 지닌다.
ⓒ 강인규
1990년대 말, 일본인 친구의 초대를 받아 도쿄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묵은 일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가 비슷하다고 믿던 내게 이 일주일은 충격의 시간이었다. 가정의 공간구성과 배치·가족과 친구 관계·정치적 태도·종교관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달랐다. 동경을 떠날 때쯤에는 두 나라가 완전히 같은 것은 먹는 쌀의 종류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기 전 쌀과 야채에 감사 기도하는 사람들

▲ 민간신앙 '신토'는 일본인들의 삶 속에 깊이 배어있다. 한 일본 여성이 신사에서 기도하고 있다.
ⓒ 강인규
놀라운 경험은 첫날 저녁식탁에서 시작되었다. 가족들이 밥을 받아든 채 "이타다키마스(戴きます, 잘 먹겠습니다)"라는 정식화된 인사말을 읊는 것이었다.

식사를 준비한 이에게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고마움을 표하고 '맛있게 드세요'라는 답례를 받는 것은 동서양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의범절의 한 형식일 터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 인사에는 독특한 측면이 있었다. 특정 대상을 향해 감사를 표하는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 친구는 혼자 밥을 먹을 때도 같은 인사를 한다고 말해주었다. 평범한 인사와 달리 오직 한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이 인사말은 기도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겸손히 (음식을) 받겠다'는 말의 내용 또한 그러했다. 친구는 그 인사말이 이 음식이 도착하기까지 거친 모든 손길들은 물론 음식을 위해 희생된 존재들, 예컨대 쌀·야채·생선 등에도 감사를 표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일본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던 서양의 선교사들은 포교의 가장 큰 장애물로 언어를 꼽았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고, 점 한두 개로 소리와 의미가 바뀌는 문자 체계는 그들에게 난공불락의 요새로 보였다. 어떤 이들은 일본어가 선교를 막기 위해 고안된 '악마의 언어'라며 절망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고 포교대상이 선교사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된 현재도 기독교가 일본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여전히 미미하다.

기독교 전파의 가장 큰 장애는 소통수단보다는 오히려 경쟁상대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일본에는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토속신이 존재했다.

일본, 신들로 가득 찬 나라

▲ 신사의 시작을 알리는 문 '도리이.' 밧줄과 종이로 신사의 영역을 표시한다. 사진은 아사쿠사의 도리이.
ⓒ 강인규
▲ 일본의 신도는 불교와 천주교 등의 외래종교까지 포섭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 사진은 성모상을 상기시키는 아기 안은 불상을 모신 신사로, 수태를 원하는 부부들이 즐겨 찾는다.
ⓒ 강인규
그렇다고 일본인이 다른 종교들에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경건한 예배당에서 결혼식 올리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 젊은 부부는 그 교회에서 예배가 열리는 주말이면 신사에 가서 손뼉을 치며 다른 신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훗날 이들이 아기를 안은 불상 앞에서 수태를 기원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일본 종교인들의 '불경'을 탓할 필요는 없다. 이들은 어느 신에 대해서도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다만 늘 하던 대로 종교를 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일본 전통신앙인 신도('신토', 神道)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특정한 입교식도 경전도 집단적인 예배형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열린 형식과 개별성은 신도의 광범위한 확산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반면 민간신앙의 편안한 형식에 익숙해진 일본인들은 정형화된 교리와 예배의식을 갖춘 다른 종교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도리어 불교와 천주교 같은 외래종교들이 신도를 개종시키기보다 신도 안으로 포섭되는 방식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이는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며,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수험생 부모가 엿을 붙여놓고 신에게 합격을 기원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의 기독교 역시 토착종교와 결합하는 형식으로 수용되었다.

현재 기독교 문화의 일부가 된 '부활절 토끼(Easter Bunny)'와 계란이 기독교와는 관계없는 '이교도'의 다산 기원풍습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신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종교의 혼합형식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에는 현재 12만 개의 크고 작은 신사가 있으며, 여기에서 숭배 대상이 되는 신은 무려 800만 가지에 이른다. 일본인들은 이 신들에게 건강을 기원하고, 학문과 사업의 성공을 빌고,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자연이나 조상을 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많지만, 유력 정치인이나 유명 학자들이 신이 되기도 한다.

사실상 거의 모든 대상이 신의 이름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스쿠니 신사에 묻힌 전사자들이 신이 될 수 있던 데에는 이런 문화적 배경이 존재한다.

올 여름, 비 오는 날 아사쿠사의 풍경

▲ 관음사에서 내려다본 아사쿠사 신사의 전경.
ⓒ 강인규
10년 만에 다시 도쿄에 도착했다. 7월 14일부터 28일까지 동안 진행되는 2007피스&그린보트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일본이 태풍권에 들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그 때문인지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자 창밖으로 거세게 부딪히는 빗줄기가 보였다. 날씨가 나쁘기는 했으나, 도쿄의 주요 명소를 간단히 둘러볼 수 있었다. 반갑게도 아사쿠사 역시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도쿄의 아사쿠사는 일본인들의 독특한 종교관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관음사(센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 곳에 오기 위해서는 고즈넉한 산길 대신 작은 가게가 밀집해 있는 번잡한 상가를 지나야 한다. 그러나 법당 안에 들어서서도 한국의 사찰에서 느낄 수 있는 적막함을 느끼기는 어렵다.

절의 한쪽에서는 갖가지 기념품들을 팔고 있고, 불상이 자리 잡은 반대편은 100엔짜리 동전을 넣고 양철통을 흔드는 사람들로 붐빈다. 점을 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양철통 안에서 막대를 뽑은 후 그 곳에 적힌 숫자대로 작은 서랍을 열어 종이에 적힌 점괘를 꺼낸다. 찬찬히 내용을 살펴서 좋은 점괘는 집으로 가져가지만, 액운이 적힌 경우는 곱게 접어 사원 내에 설치되어 있는 봉 위에 묶어놓는다. 부처에게 불운을 잘 다스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 신사를 방문한 일본인들이 운세를 알아보기 위해 점괘가 든 막대상자를 흔들고 있다.
ⓒ 강인규
▲ 액운 점괘를 받은 이들은 운세가 적힌 종이를 신사 안에 매달아 놓고 신의 자비를 빈다.
ⓒ 강인규
사람들이 열심히 점을 치고 있는 동안, 그 옆에서는 사람들이 경건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고 있다. 사람들 앞에는 커다란 헌금수거장치가 놓여있다. 건물 밖에는 샘터에서 작은 국자로 물을 떠 손을 씻는 사람들이 보인다. 사람들은 보통 기도를 시작하기 전, 물로 손과 입을 씻는다. 신을 만나기 앞서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것이다.

대개 신사의 기도장소에는 종이 설치되어 있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도착한 후 종을 울린 후 두 번 박수를 친다. 신에게 내가 왔노라고 알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손을 모아 소원을 빈 후, 다시 박수를 한 번 치는 것으로 기도를 마무리한다.

입구 앞에 놓인 향로는 연기를 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 연기가 약하거나 병든 신체를 낫게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한 노부인은 허리 쪽으로 연기를 몰아오고, 더벅머리의 학생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으로 머리를 대고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관광객들이 발길이 뜸했던 이 날도 신도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그만큼의 사람들이 다시 채워지면서 불교 사찰과 상업문화의 활기, 그리고 강한 주술적 요소가 만난 독특한 풍경은 계속 이어졌다.

이들에게 종교는 가판대에서 300엔짜리 비둘기빵을 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일상으로 보였다.

▲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관음사의 방문객들. 기도하는 이들 앞에는 대형 헌금상자가 놓여있다.
ⓒ 강인규
▲ 참배객들이 우산을 받아든 채 연기를 쬐고 있다. 향로의 연기가 아프거나 약한 곳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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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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