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바다 여행은 느린 삶을 다시 가르쳐주었다.
ⓒ 강인규

보름의 여행 휴가를 얻었다고 하자. 당신은 오랫동안 여행을 꿈꾸어왔다. 모처럼 찾아온 이 소중한 시간, 당신은 어떤 계획을 세우겠는가?

비행기가 순식간에 데려다주는 인적 드문 열대해안에서 푹 쉬다 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초고속열차에 몸을 실은 채 사진 속에서만 보아오던 유럽의 도시들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이다. 조금만 바쁘게 움직이면 '2주 만에 유럽 10개국을 돌았다'고 자랑하는 친구의 코를 눌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고속열차와 항공기는 여행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 첨단의 기술문명은 여행자를 시속300km에서 1000km의 속도로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그러나 속도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 여행자들은 소리보다 빨리 이동하는 여행에서조차 지루함을 느낀다.

▲ 느린 여행은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을 안겨준다. 사진은 해 진 후의 블라디보스토크항.
ⓒ 강인규

잃어버린 여행의 '과정' 되찾기

교통수단의 이동속도가 빨라지면서 여행의 의미 자체도 달라졌다. 과거에 몇 달 혹은 몇 년을 걷거나, 동물의 네 다리에 의지하거나, 운이 좋아 순풍에 몸을 싣는 경우조차 여행의 대부분은 과정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속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여행에서 과정은 생략되었고, 여행은 곧 도착을 의미하게 되었다.

옛날과 비교하면 이 과정은 순간이동에 가까울 만큼 짧아졌다. 그러나 이동시간이 단축될수록 시간에서 느끼는 지루함은 그만큼 커졌다. 어떤 이들은 이 짧은 이동시간조차 수면제나 알코올의 도움 없이 견디기 어려워한다. 얼마나 더 빨라져야 우리는 속도의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 장거리여행은 고사하고, 두세 층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러대는 우리들이니 말이다.

만일 속도를 아무리 높여도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없다면, 완전히 늦춰 보는 건 어떨까?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속도로 말이다. 기계문명이 우리를 중독시킨 비자연적 속도를 거부하고 자연의 속도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물론 만만치 않은 금단현상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극복하고 나면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과정'의 즐거움을 되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꼭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 필요는 없다. 힘든 오르막길 없이 자전거가 비탈길을 내려오는 그 짜릿한 느낌만으로 여행하는 방법이 있다. 번거롭게 밤마다 호텔을 찾을 필요도 없다. 자신의 안락한 침대에 편하게 누워서 여행할 수도 있고, 밤이면 도시 불빛에서 해방된 별 하늘을 바라볼 수도 있다. 수영을 하거나 일광욕을 하면서도 달릴 수 있고, 꿈을 꾸면서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 피스&그린보트의 여객선인 후지마루호.
ⓒ 피스&그린보트

▲ 여객선 휴게실에서 승객들이 책을 읽으며 쉬고 있다.
ⓒ 강인규

크루즈 여행의 매력, <피스&그린보트>의 더 큰 매력

항해속도 16노트. 시속으로 30킬로미터 정도니, 시내버스의 절반 속도다. 그러나 초음속 여행보다 훨씬 덜 지루하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사우나에서 피로를 풀 수도 있으며, 카페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찻잔을 기울일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갑판에 나가 부드럽게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바닷바람에 몸을 맡길 수도 있다.

▲ 선내에는 승객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취미와 오락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티셔츠에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그림을 새기고 있다.
ⓒ 강인규
이것은 어떤 크루즈 여행에서도 얻을 수 있는 기본적인 매력이다. 하지만 <피스&그린보트>의 크루즈 여행은 위의 멋진 활동조차 간단히 부차적 경험으로 바꾸어 놓는다. <피스&그린보트>에 오르는 순간 위의 경험들은 배 위에서 진행되는 각종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고려해 볼 수 있는 차선책이 되어 버린다.

선내에는 공예품 만들기부터 악기 연주, 외국어 학습, 그리고 다양한 주제의 강연과 수준 높은 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다. 맞춤형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 내용을 제안하는 것이다.

<피스&그린보트>는 일본의 피스보트와 한국의 환경재단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올해로 3년을 맞았다.

피스보트는 역사교과서 왜곡에 반대한 일본의 젊은이들이 1983년에 설립한 것으로, 배를 빌려 직접 세계 곳곳을 방문해 일본 정부가 그동안 감추어 온 역사적 사실들을 직접 듣고 경험하고 실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피스(평화)'와 '그린(녹색)'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피스&그린보트>는 세계평화와 환경보존을 프로그램의 중심철학으로 삼고 있다.

이로 인해 선내 생활과 기항지 프로그램이 일관된 테마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이것은 <피스&그린보트> 크루즈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다. 2007년 여름 <피스&그린보트>의 테마는 지구온난화였다. 선내의 여러 프로그램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강연을 듣거나, 관련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토론에 참가해 이에 관해 배울 수 있다. 배에서 내려 돌아보는 기항지 일정에도 이와 연관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 세계평화와 자연보존은 피스&그린보트의 핵심 철학이다. 사진은 일본의 하치노헤.
ⓒ 강인규

▲ 피스&그린 보트는 테마에 따라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한다.
ⓒ 강인규

덤으로 얻는 배움의 즐거움

그러나 <피스&그린보트>는 교육을 강요하지 않는다.

테마와 연관된 프로그램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내용의 교양이나 취미, 또는 오락을 위한 다양한 선내프로그램과 기항지 코스를 고를 수 있다. 한 기항지에서도 예닐곱 가지가 넘는 다양한 여정이 마련되어 있어, 휴식과 관광을 위해서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

2007년 <피스&그린보트>의 경우 일본의 하치노헤와 쿠시로, 러시아의 캄차카와 사할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흥미로운 문화적 체험,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생생한 삶을 모두 돌아볼 수 있는 일정이 준비되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평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국경 없는 만남이다. 비록 <피스&그린보트>가 운영하는 배 후지마루호가 40층 건물을 옆으로 눕혀 놓은 크기의 대형 유람선이지만 식당에서, 도서관에서, 복도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 두 주 동안 목례를 하고 나면 어느새 그들과 친구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에서 두 주간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후지마루가 선내 인터넷 서비스를 하지 않는 것에 거듭 감사하며, '무인터넷 정책'을 고수하기를 희망한다. 요즘은 비행기에서도 무료로 서비스되는 무선 인터넷이 있다. 있으면 쓰지 않을 수 없고,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이 쓰기를 요구하는 것이 인터넷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없는 두 주는 그동안 구분되지 않았던 일과 휴식의 소중한 차이를 일깨워줄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는 두 주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직 바다와 갈매기, 그리고 벗하고 싶은 좋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 피스&그린보트는 단순한 둘러보기 관광을 넘어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문화를 나누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운다. 캄차카의 코랴크 민속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러시아 어린이들.
ⓒ 강인규

▲ 사할린 동포들이 한복을 입고 방문객을 환영하고 있다. 신문방송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잊힌 역사를 직접 체험하는 것 역시 피스&그린보트의 주된 목적이다.
ⓒ 강인규

▲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여행은 과정이 생략된 도착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진은 이번 2007피스&그린보트의 출발·기항·도착지인 일본, 러시아, 한국.
ⓒ 강인규

태그:#피스&그린보트, #크루즈 여행, #캄차카, #사할린, #블라디보스토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