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삼성 하우젠컵 결승전이 열리던 상암 월드컵 경기장. 홈 서포터즈의 압도적인 응원에도 FC 서울은 울산 현대에게 1-2로 무릎을 꿇었다. 원정 서포터즈 석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울산의 응원단들은 제대로 흥이 났다. 그러나 막상 잔칫날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21일 컵대회 4강전, 울산 현대가 최강 전력이라 꼽히는 수원 삼성을 꺾은 이유는 그의 프리킥 때문이었다. 그는 공을 앞에 놓고 몇 발자국 거리를 재 보는 특유의 준비 동작 후에, 대표팀 골기퍼 이운재를 역방향으로 속이고 깨끗한 프리킥을 작렬시켰다.

울산은 그의 발끝으로 인해 결승행 티켓을 얻었고, 가랑비가 내리던 지난 수요일 FC서울의 컵대회 2연패를 저지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비록 결승전에 뛰지는 못했지만, 그의 4강전 극적인 결승골은 울산 선수들의 컨디션을 쾌조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울산의 골기퍼 김영광은 우승 소감에서 울산의 우승을 그에게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27일 상암구장, 적지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울산 현대를 지켜보던 필자는 제주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을 그를 떠올렸다. 이. 천. 수.

가십거리 이천수는 이제 그만

 이천수 선수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사진은 지난해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세네갈과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서 이천수 선수가 상대 선수의 태클을 피하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자유분방한 태도와 당돌한 멘트로 숱한 기삿거리를 뿌리고 다니던 그도 이제 이름 하나만으로 무게감을 가지는 선수가 되었다. 울산 현대 호랑이라는 팀만 해도 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공격에서의 파괴력이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다. 울산의 이천수는 아스날의 앙리(물론 지금은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지만), AS로마의 토티같은 존재다. 그리고 이 논리는 고스란이 한국 국가대표팀에도 적용된다.

29일 이라크전에서 이천수는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실력을 뽐냈다. 후반 26분 김두현과 교체 투입된 이천수는 교체시간을 포함해 단 22분을 뛰는 동안 게임을 완전히 자신의 페이스로 바꿔 놓았다.

교체된 지 8분이 지난 후반 34분,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온 오범석의 크로스를 수비 뒷공간으로 파고들며 정확히 머리로 받아 넣었다. 정면을 파고들던 움직임은 예리했고, 헤딩슛도 정확했다. 그리고 후반 40분 수비수의 태클을 피해 왼쪽 측면을 완전히 돌파한 후, 골기퍼와 1대1로 맞선 상황에서 오른쪽에 있던 이근호에게 노마크 찬스를 만들어 줬다.

골기퍼와 1대1 상황, 사실 각도가 없긴 했지만 예전에는 무리해서 슛도 날리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는 A매치 첫 출전을 한 이근호에게 골 맛까지 보게 해줬다.

최근 2회의 국가 대표팀 A매치 동안 이천수의 플레이는 단연 돋보였다.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이동국 등의 프리미어리거들은 부상에다 리그의 살인적인 경기 일정 때문에 제 실력을 보여주기도 어려웠고, 국내파들은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 아직도 부족한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이천수는 지난 2월 그리스와의 평가전에서 결승 프리킥 골을 넣었고, 이번 달 2일에 열렸던 네덜란드 전에도 비록 골은 넣지 못했지만 측면에서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여 준 바 있다. 그리고 29일 이라크전에서는 1골 1도움, 22분이라는 시간 동안에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 줬다. 그동안 그는 누구보다도 더 정신없이 그라운드를 뛰어 다녔고, 그의 심각한 표정에서는 이제 연륜이 느껴졌다.

다양한 공격능력과 리더십 돋보여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젊은 이천수(81년생)에게 연륜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좀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그는 언론과의 관계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자유로운 행동과 발언을 하는 그에게 언론은 항상 관심을 보였고, 동시에 선수에게는 과도한 관심과 비평이 스트레스가 되었다. 수많은 별명도 붙여졌다. 필자도 이천수에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것은 축구 외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이제는 무언가 다른 모습이 느껴진다. 카메라 앞에서 말 수도 줄었고, 요즘은 축구 말고 특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언론 입장에서는 이슈메이커가 하나 줄어들었지만, 한국 축구나 본인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그가 경기 외적인 것 보다 경기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도 이천수가 한국 축구의 한 기둥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천수는 이제 단지 한두 경기를 잘하는 선수라거나, 스캔들이나 기삿거리를 몰고 다니는 연예인급 선수도 아니다. 그 전에 그는 한국축구의 큰 획을 긋고 있는 선수로 평가받아야 한다.

실력면에 있어서 스페인 무대에서의 실패 이후 긴 침체에 빠졌던 이천수는 완전히 살아났다. 그라운드(Pitch) 안에서의 두 가지 면만 봐도, 이제 그를 한국 축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기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나. 그의 다양한 공격 능력이다. 이천수는 이제 한국축구의 스쿼드 구성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공격 옵션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스위스 전이나, 29일 이라크 전처럼 중앙 미드필더로 뛰면서 좌우를 흔들 수도 있고, 본래의 위치인 날개를 맡아서 상대의 측면을 날카롭게 파고들 수 있는 수준의 선수다. 그만큼 전술 이해도가 높다는 말이다. 물론, 웨이트를 통한 체력 향상과 1대 1 상황에서의 좀 더 정교한 플레이가 요구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 그의 리더십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 그는 프리킥 동점골을 작렬하고 부상으로 독일월드컵에서 뛰지 못했던 이동국을 위한 골뒤풀이를 했다. 동료의 부상을 아쉬워하는 애틋한 마음을 전달했다. 그리고 29일, 골을 넣은 후 그는 지난 네덜란드 전 때 부상으로 재활에 힘쓰고 있는 조재진에게 달려가 포옹했다. 어려움에 있는 동료를 챙기는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라크전에서 3번째 골을 넣은 이근호가 왜 어시스트를 해 준 이천수에게 달려가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골의 80% 이상은 이천수가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천수가 미리 셀레브레이션(골 세레모니)을 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상황만 놓고 보자면 3번째 골 상황의 이천수를 보면서, 숱한 어시스트를 해 주고 혼자 먼저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호나우도가 떠올랐다.

지난 시즌에는 호나우도의 슛이 골기퍼의 손을 맞고 나오자 박지성이 골을 넣었는데 호나우도가 자신이 넣은 것처럼 포효를 해 카메라가 정작 골을 넣은 박지성 보다 호나우도를 먼저 비춰준 적도 있었다. 호나우도는 이런 개인적인 성격 때문에 초반에 시기와 야유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 출중한 실력으로 모든 비판을 잠재운 수준에 이르렀다.

이천수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언론과의 마찰이나 돌출행동으로 여러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지만, 이제 적어도 한국에서 만큼은 이천수를 호나우도 정도 대우를 해줘도 될 것 같다. 그는 분명 녹색 그라운드 위에서 만큼은 확실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진출, 곧 때는 온다

이제 그는 선수 생활의 거의 마지막이 될 유럽 진출의 꿈을 꾸고 있다. 위건 포츠머스 풀럼, 심지어 첼시와의 접촉 이야기까지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그 어느 구단과도 확실한 약속을 하지는 못했다. 여기저기서 그의 유럽 진출에 의문을 제기하고 걱정스런 눈빛을 보내고 있다. 본인 자신도 상당한 부담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당당히 한국 축구의 한 축이 된 이천수. 그가 몇 번의 실패를 딛고, 유럽에서 새 날개를 활짝 펴길 바란다. 체력도 보완하고 개인기도 가다듬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선수가 되기를 바란다. 그가 지금처럼 축구에만 집중한다면, 그렇게 축구 실력만으로 우리의 마음을 계속 사로잡아만 준다면, 더 이상 그의 사적인 생활이나 돌출 발언에 대한 언급없이 그가 빅리그에서 뛰는 날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계속 응원할 사람은 가득하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실력을 가다듬으면서 인내한다면 반드시 빅리그 진출의 기회는 다시 온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이라크 전에서 그가 들었던 서귀포의 함성과 비할 수 없는 큰 응원을 받을 것이다. 유럽대륙과 이곳에서 동시에. 실력으로 정점에 올라있는 그에게 이제는 비판이 아닌 진심이 담긴 응원을 보낸다.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도록 말이다.

"폭풍우 속을 걸을 때 고개를 높이 들라. 그리고 어둠을 두려워 마라. 폭풍우 끝에는 황금빛 하늘과 종달새의 아름다운 노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나아가자, 바람을 헤치고. 나아가자, 빗속을 뜛고. 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 - 리버풀 서포터즈 더 콥 (the kop) 응원가, '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you'll never walk alone)' 중에

이천수 축구 울산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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