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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설이 바로 코앞이다. 설… 설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던 그런 철없던 때가 내게도 있었는데 이젠 그저 '아, 설이구나'하고 이렇듯 무덤덤해지니 굳이 세월 탓이라 한다면 억지일까.

나는 아직 차례를 모시지 않는 맏며느리이다. 그러하니 바리바리 장볼 일도 없다. 그저 식구들 먹을거리만 준비하면 된다. 그런데도 해마다 명절이 다가오면 난 여기저기 대목장을 기웃거린다. 대목장이라 하면 명절 전에 벌어지는 평상시보다 큰 장을 말한다.

대목장을 볼만큼 거하게 음식을 차릴 일도 없거늘 굳이 이유를 따져본다면 대목장엔 돈들이지 않고도 마음껏 사올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건 바로 넉넉한 인심과 정이다.

엄마 떨어져 살던 철부지는 10여 리 시골길도 마다않고 큰어머니 손에 끌려 장 구경에 따라나서곤 했다. 하얀 천막이 하늘을 대신한 그때 5일장은 정말 별천지였다. 행여나 놓쳐 버릴까 큰엄마 치마 꽁무니를 부여잡기 바빴던 고사리 손이 뻥튀기 아저씨의 '뻥이요'소리에 어느새 얼른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큰엄마가 장봐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난 찌그러진 깡통에 담겨진 소복한 옥수수 옆에 쪼그려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뻥이요' 소리와 함께 시커먼 철망 밖으로 마구 튕겨 나오던 강냉이를 주워 먹는 것만으로도 점심요기가 되었다.

저녁 거름. 신문지에 둘둘 말린 갖가지 생선과 알록달록한 유과, 군데군데 깨를 흩뿌린 약과, 다리 하나만 씹어도 한나절은 걸릴 것 같던 내 머리통만한 문어, 그리고 포에 쇠고기까지 큰엄마에겐 보따리 보따리 동여맨 제수거리가 한 짐이었다. 머리에 이고 양손으로 든 것만으로도 큰엄마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만 어린 나까지 치마꼬리를 잡고 질질 끌려가고 있었으니….

그러나 난 좋았다. 하얀 가루가 묻어나는 긴 엿가락이 입에서 살살 녹고 있었으니 질질 끌려가면서도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큰엄마와 어린 조카의 대목장 나들이. 절절한 그리움으로 젖어드는 추억을 꺼내 보고파 대목장 여행에 나섰다.

김포시 통진읍에 위치하고 있는 마송엔 3일과 8일에 오일장이 열린다. 지난 23일 마송장을 찾았다. 대목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한산했다. 일반 오일장하고 다를 바 없었다. 하긴 막바지 28일장이 한 번 더 남아 있기에 그럴 수도 있겠거니 짐작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구구절절 늘어놓는 상인들의 하소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 김정혜
"아저씨! 생선 많이 파셨어요? 그런데 대목장 치고는 너무 한산하네요. 아직 한 번 더 남아 있어서 그런가요?"
"대목장요? 그런 소리 마세요. 오히려 평상시 오일장보다 못해요. 도대체 사람들이 나와야 생선을 팔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예요. 이러다 우리 조상님 차례상엔 생선만 잔뜩 올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 김정혜
이런 하소연은 비단 생선가게 아저씨뿐만이 아니었다. 과일가게 아줌마도 야채가게 아줌마도 또 옷 집 아줌마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평상시 오일장보다 못하다는 대목장. 그들은 당연히 속이 상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로 봐선 그들의 속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 김정혜
"장사 안 된다고 구구절절 읊어봐야 무슨 소용이야. 내년에는 좀 나아지겠지. 그나마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맙지. 그래서 돈은 못 벌어도 복은 많이 벌 심산으로 손님들에게 그저 인심만 푹푹 쓰고 있지. 각박한 세상, 인심이라도 나눠야 할 거 아니야."

ⓒ 김정혜
야채가게 아줌마는 고사리를 한주먹은 더 얹어 주셨고 생선가게 아저씨는 한바구니 떠놓은 동태포에 다시 포를 떠 몇 점 더 얹어 주셨다. 부모님들 드릴 양으로 홍시를 사는 내게 과일가게 아줌마는 쫄깃쫄깃한 곶감 몇 개를 맛이나 보라며 애써 손에 쥐어 주셨다.

ⓒ 김정혜
동서와 올케 몫으로 들기름 몇 병을 사야 했다. 전을 펼치고 계신 할머니는 장사보단 수다에 더 관심이 있는 듯했다. 연탄화덕 위에 네모난 깡통을 엎어놓고 그 위에 딱딱한 시루떡 몇 조각이 구워지고 있었다. 친구인 듯한 두 분 할머니는 이야기에 정신이 없었다. 오가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순 없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소리로 봐 깡통위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시루떡만큼이나 고소한 듯했다.

"할머니! 들기름 몇 병 주세요. 그리고 이 호박오가리도요."
"그려. 많이 든 놈으로 가져가. 호박오가리도 한주먹 더 넣어가고…."

ⓒ 김정혜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잡화상 아저씨의 난전엔 정말 없는 거 빼고 다 있었다. 바늘에 골무에 수세미에 요즘 고무줄 넣는 팬티가 어디 있다고 팬티에 넣으라는 까만 고무줄까지…. 그중 '윳 천원'이란 종이가 눈에 띄었다.

"아저씨! 이 윷놀이 세트 정말 천원이예요?'
"그려. 거저 주면 아쉽고 천원만 내놓고 가져가."

아저씨 목소리는 길 건너에서 들렸다. 커다란 드럼통 안에는 연탄화덕이 있었고 그 위에 얹어진 석쇠 위엔 돼지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었다.

"오일장 장바닥에서 먹는 막걸리와 돼지고기 맛은 둘이 먹다 하나가 기절해도 모를 거야."

드럼통을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아저씨들의 우스갯소리에서 또 그들의 사람 좋은 너털웃음에서 사람 사는 푸근한 정을 느꼈다. 그러나 아주 잠깐. 그들의 주름진 눈가를 스치는 쓸쓸함을 발견하고 말았다면 사람 사는 정이 뭔지 모르는 내 어리석음을 탓해야 할까….

ⓒ 김정혜
문득. 의아한 것이 있었다. 대목장이라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것이 '뻥이요'하는 순간 하얀 연기 피워 올리며 온 사방에 강냉이 튀어 오르는 뻥튀기 장면이건만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 장바닥을 헤매 뻥튀기 아저씨를 찾아냈건만 줄지어 늘어선 찌그러진 깡통과 깡통 옆에 쪼그려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이제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미 만들어진 강정들이 파란 봉지 안에 담겨 대목장 손님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 김정혜
대목장. 손님보다 물건이 더 많은 듯했다. 너무 한산해 쓸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목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씩씩했다. 하지만 그들의 씩씩함이 그리 온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라고 한산한 대목장이 왜 속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그나마도 찾아드는 손님들을 위안 삼고 있었다.

ⓒ 김정혜
ⓒ 김정혜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설. 그 설을 기다리는 대목장과 대목장 사람들.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나의 소중한 추억들이다. 마송장으로의 추억여행은 잠시 비친 겨울햇살만큼이나 따스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과일가게 아줌마가 쥐어주신 곶감 한 개를 입속에 넣었다. 쫀득쫀득한 것이 아주 달짝지근했다. 이번 설은 대목장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처럼 더불어 행복한 설이 되었으면 싶다. 쫀득쫀득하고 달짝지근한 곶감 같은 설을 우리 모두가 맞이할 수 있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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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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