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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의 실크로드를 이야기할 때 그 길은 중국의 시안(장안)에서부터 터키의 이스탄불까지를 가리킨다. 시안에서 서쪽에는 광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고 이 사막을 북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이 천산 남로, 남쪽으로 돌아서 가는 길이 서역 남로에 해당한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과는 관계 없이 천산산맥의 북쪽을 질러 가는 길이 천산 북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길을 택하든 육상의 실크로드 길은 중간에 사마르칸트를 거치게 된다. 시안에서 이스탄불에 이르는 긴 길의 가운데에 위치한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실크로드를 동과 서로 나눌 수 있다.

사마르칸트라는 도시의 역사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이기 전에 기원후 10세기까지 번성했던 육상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역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가 치러야 했던 대가도 컸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다리우스에게 정복되어서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기원전 300년경에 다시 알렉산더에게 정복되기도 했다.

이후 기원후 7세기에 경전을 구하기 위해서 인도로 가던 도중에 이곳을 방문한 당나라의 승려 현장 삼장은 사마르칸트를 가리켜서 '외국 각지에서 들어온 값진 상품이 이곳에 모여 있다. 땅이 비옥해서 농작물이 많이 난다. 숲에는 나무가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풍부하다'고 <대당서역기>에서 묘사하고 있다.

당시에는 사마르칸트와 시안을 잇는 동쪽의 실크로드를 통해서 많은 상품들이 거래되었다. 사마르칸트의 상인들은 양털과 비취와 보석을 시안으로 가지고 가서 팔았고 중국에서 고급 비단을 사서 사마르칸트로 돌아와서 팔았다.

▲ 사마르칸드의 성원. 기도하는 무슬림들.
ⓒ 김준희
사마르칸트에서 시안으로 가는 길은 약 5000km다. 낙타와 말에 짐을 싣고 가는 여정은 족히 수개월이 걸렸을 것이다. 이 도중에는 세계에서 제일 험한 산맥인 파미르 고원과 천산산맥이 있고, 세계에서 제일 삭막한 사막인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까다로웠던 것은 국경수비대와 부유한 상인을 노리는 도적이었을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북쪽으로 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대상의 낙타행렬은 많은 경우 수백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그 대상의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풍족했던 도시도 칭기즈칸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당시에 번성했다는 나무가 울창한 숲은 지금 찾아 볼 수 없고, 칭기즈칸의 원정 이전에 있었다던 문명의 흔적은 오직 박물관 안과 발굴이 되지 않은 언덕에 묻혀 있을 뿐이다.

중앙아시아를 여행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는 사마르칸트가 있었다. 고대에 번성한 강국(康國), 칭기즈칸에 의해서 파괴된 도시를 티무르가 재건한 제국의 수도 그리고 그 이전에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수많은 대상들이 거쳐 간 '중앙아시아의 로마'. 여행자에게 이만큼 영감을 주는 도시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르칸트에 와서 실크로드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티무르 제국 이전의 유적에 관심이 있다면 아프라시압 언덕으로 가거나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가야만 한다. 그래서 나도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언덕으로 향했다. 사마르칸트의 중심가인 레기스탄 거리를 지나고 타슈켄트 거리를 지나서 걷다 보면 아프라시압 박물관과 그 뒤로 아프라시압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이 나온다.

타슈켄트 거리를 지나서 포장도로를 걷다보니 아프라시압 박물관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운데는 그 유명한 아프라시압 벽화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고, 그 왼쪽으로 전시실이 있었다. 사마르칸트의 건축물들이 티무르 제국 시대의 것들이라면, 이 박물관의 전시물들은 그 이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 아프라시압 박물관 가는 길
ⓒ 김준희
처음으로 나오는 전시실에는 이곳에서 발굴 작업을 했던 당시의 사진들이 주로 있었다. 다음 전시실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1-4세기의 아프라시압 역사는 기록된 것이 없어서 오직 고고학에만 의존해야 한다. 이 전시실에는 많은 유물들이 있었다. 알렉산더 시대의 유물부터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도기와 잔, 작은 항아리와 작은 석상들이 있었다.

그 옆에는 그림과 문양이 있는 동전과 엽전을 연상시키는 구멍이 있는 동전,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큰 항아리도 있다. 물론 이 항아리는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서 붙여놓은 것이다. 그 위의 벽에는 이 항아리를 발굴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다. 이 많은 조각들을 모아서 어떻게 이 큰 항아리로 복원했을까. 아마도 그 작업은 천조각의 퍼즐그림 맞추기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이외에도 9-12세기에 사용했다는 화려하게 채색된 세라믹 그릇들이 많이 있었다.

전시실을 빙 돌아서 나오자 이곳을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프레스코 프레스코"하고 말을 하며 벽화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 벽화가 프레스코 벽화인 모양이다. 이 벽화는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발굴된, 흔히 아프라시압 벽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7세기에 만들어졌다는 높이 2m가 넘는 커다란 이 벽화는 정면과 좌우측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측의 벽화는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활과 창으로 호랑이같이 생긴 동물을 잡는 그림이고, 좌측으로는 코끼리에 올라 탄 신부와 말을 탄 시녀들, 그 뒤를 따르는 행렬들의 모습이다.

정면으로는 왕이 가운데에 앉아 있고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그 앞에 조공을 위해 서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 각국의 사절들은 중국인, 투르크인, 파미르의 유목민 그리고 고구려인도 있다고 한다. 이 벽화가 만들어진 것은 7세기. 당시는 육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활발했던 때다. 그 시기에 고구려의 사신이 공물을 들고 사마르칸트를 방문했던 것일까.

이 벽화는 당시 사마르칸트의 문화 역량을 잘 나타내주는 벽화라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낡고 색이 바래 군데군데 떨어진 모습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 아프라시압 언덕
ⓒ 김준희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그 뒤쪽으로 올라오니 이곳이 그 아프라시압 언덕이다. 아프라시압 언덕은 칭기즈칸이 파괴하기 전에 이 도시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그냥 황량한 곳인 이 언덕에서 1958년 한 목동이 우연히 동전과 유물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발굴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까지 프랑스 고고학 팀이 발굴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발굴이 중단되었는지 아니면 발굴이 끝난 건지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하긴 듬성듬성 풀이 있을 뿐인 이 황량한 언덕에서, 따가운 햇볕과 달려드는 날파리들을 무릅쓰고 발굴작업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넓은 언덕을 돌아다니다 보니 발굴이 중단된 듯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벽돌 같은 것으로 만든 성벽의 흔적이 보였다. 언덕 가운데 자리한 그 흔적은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최근에 발굴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만들어 놓은 것을 얼마 전에 부숴버린 것 같은 모습이다.

▲ 사마르칸드의 전경
ⓒ 김준희
이 언덕의 한쪽 끝에서는 사마르칸트의 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 비비하님 성원이 보이고, 그 앞으로 바자르와 대로가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본 사마르칸트의 하늘은 파랗다. 그 파란 하늘 아래로 비비하님 성원의 에메랄드 빛 돔이 겹쳐진다. 아미르 티무르가 살았던 시절에도 하늘은 지금처럼 푸른 빛이었으리라. 티무르는 아마도 푸른 하늘 빛에 매료되어서 모든 건축물의 돔을 푸른 색으로 만들게 했을 것이다.

▲ 푸른 하늘과 푸른 돔. 구르 에미르.
ⓒ 김준희
아프라시압 언덕을 내려오면서 나는 실크로드를, 그리고 당시의 사마르칸트를 생각했다.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육상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했던 때는 기원후 7-8세기였다. 중국 문화가 화려했던 왕조인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수많은 외국인들이 모여들었던 '세계 제일의 국제 도시'였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한 사마르칸트도 많은 대상들이 오고가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큰 대도시였다. 당시에 육상 실크로드가 번성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국제색이 풍부했던 당나라의 문화와 정책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8세기 중반, 실크로드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당의 중앙아시아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랍세력은 연합군을 형성해서 동쪽으로 진군해오고 있었고, 이에 맞서기 위해서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인 고선지 장군도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아랍 연합군과 당나라 군대가 맞붙은 이 전투 이후로 당나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전면 철수하면서 실크로드의 양상도 바뀌어 갔다. 육상로보다는 해상 교역로가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당나라는 내부 반란에 시달리며 세력이 약해져갔다.

사마르칸트도 변화했다. 수많은 종교들이 공존했던 예전과는 달리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몇 세기 후에는 칭기즈칸의 원정대가 도시를 파괴하고 말았다. 실크로드의 흥망과 함께 사마르칸트의 모습도 변해갔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 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배낭여행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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