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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슈켄트에서 남서쪽으로 3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도(古都) 사마르칸드(samarkand)로 가는 기차는 일주일에 세번 금, 토, 일요일에 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기차의 일등석 가격은 1만1000숨이다(숨은 우즈벡의 공식화폐단위, 1숨은 한화 약 1원).

▲ 타슈켄트에서 남서쪽 350km에 위치한 사마르칸드
ⓒ 김준희
일등석은 6명이 한 방을 사용하는 형태다. 문 안으로 양 옆에 3개씩 의자가 마주보는 구조로 놓여 있다. 가운데는 작은 테이블이 있고 그 테이블 위에는 주전자와 컵이 있다. 아침 7시인데도 밖은 밝아져 있었다. 기차가 출발하자 잠시 후에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빵과 요구르트가 담긴 간식을 나누어주었다.

기차가 타슈켄트를 벗어나자 넓은 우즈베키스탄의 벌판이 나타났다. 풀이 듬성듬성 놓여 있는 우즈벡의 벌판에는 간혹 가다 집들이 몇 채 나타나고 풀을 뜯는 양과 염소떼들이 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낮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서쪽으로 갈수록 산은 점점 없어지고 지형은 사막에 가까워진다.

사마르칸드는 아미르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사마르칸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아미르 티무르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이곳은 아미르 티무르와 많은 연관이 있는 도시다.

▲ 사마르칸드의 거리,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우측으로 구르 에미르가 나온다.
ⓒ 김준희
물론 티무르 제국 이전에도 사마르칸드는 자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은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13세기까지 이 지역의 주요 도시로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전의 도시와 유물은 파괴되고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은 대부분 14세기 이후 티무르 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사마르칸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도시이기도 하다.

사마르칸드... 영화로웠던 아무르 티무르 제국의 과거가 깃든 곳

11시가 되자 기차는 사마르칸드 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3000숨에 사마르칸드의 중심가인 레기스탄 광장에서 내린 나는 싼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사마르칸드에는 별 4개짜리 호텔부터 수많은 호텔들이 있지만, 그런 비싼 호텔에 갈 수는 없다.

나는 사마르칸드 시내에 많이 있는, 'B&B 호텔'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싼 숙소를 찾았다. B&B는 Bed & Breakfast의 약자로, 글자 그대로 침대와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그런 숙소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민박이나 게스트 하우스는 우즈베키스탄에 없고, 외국인이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거주등록을 위해서는 정식 숙박기관에 머무는 것이 좋다.

문제는 이런 숙소의 가격도 싼 편은 아니라는 것. 우즈베키스탄에는 외국인 2중 물가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외국인은 현지인에 비해서 더 비싼 가격으로 공공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우즈벡의 국내선 비행기를 이용하려면 현지인보다 약 4배 비싼 가격으로 표를 사야 하고, 호텔에서도 약 2~3배 가량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유적지와 박물관 입장료도 차이가 있다. 유적지 입장료가 현지인들은 200숨, 300숨 가량인데 외국인들에게는 2000숨을 받는다.

1000숨이면 밥 한 그릇를 먹고도 몇 백 숨이 남는 곳에서 이 차액은 적은 돈이 아니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에는 이런 유적지들이 많이 있어서 주요한 곳만 본다고 하더라도 10군데 이상을 생각해야 한다. 이 차액이 10번 넘게 쌓인다고 생각하니까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싼 곳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B&B 호텔을 골랐다. 6일 동안 머물테니까 싸게 해달라고 해서 아침 식사 포함 하루에 20달러짜리 방을 잡았다. 그리고 씻고 정리하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우즈베키스탄 제1의 역사도시이자 관광도시인 사마르칸드에 온 것이다. 벌써부터 푸른 둥근 돔을 볼 생각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2중 물가제도... 외국인은 비싼 공공요금 물어야

▲ 레기스탄 거리에 있는 아미르 티무르의 동상
ⓒ 김준희
사마르칸드는 인구 약 40만이 살고 있는 도시지만, 타슈켄트에 비하면 작은 도시다. 그리고 주요한 유적들이 중심가 부근에 모여 있어서 충분히 걸어서도 시내관광을 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사마르칸드의 시내지도를 구입한 나는 벤치에 앉아서 계획을 세워보았다. 사마르칸드의 중심가는 레기스탄 거리다. 아미르 티무르의 동상이 있는 레기스탄 거리를 서쪽에서 출발해서 동쪽으로 가다보면 티무르의 무덤인 구르 에미르가 있고 레기스탄 광장이 나온다. 여기를 지나서 타슈켄트 거리로 들어서서 걷다보면 비비하님 성원과 바자르가 있고 샤흐이진다 라고 부르는 대영묘, 아프라시압 언덕으로 통하는 길이 연결된다.

간단해서 좋았다. 우선 구르 에미르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 멀리 구르 에미르가 보인다. 우측에 있는 건물은 루하밧 묘.
ⓒ 김준희
'구르'는 무덤, '에미르'는 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구르 에미르는 왕의 무덤이라는 뜻이 된다. 이곳은 아미르 티무르가 오트라르 원정에서 죽은 자신의 손자 무하마드 술탄을 위해서 지은 무덤이다. 이 무덤은 1404년에 만들어졌고 이듬해에 중국 명나라를 원정하러 가던 도중에 병으로 사망한 티무르도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

커다란 푸른 돔이 인상적인 구르 에미르의 입장료는 2100숨, 거기다가 안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700숨을 더 내야 한다. 합쳐서 2800숨. 난 2800숨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이 돈이면 양고기 볶음밥을 4그릇 먹을 수 있고, 1.5L짜리 음료수를 7병 살 수 있고, 500cc짜리 병맥주를 4병 살 수 있는 돈이다. 비싸긴 하지만 방법이 없다. 난 2800숨을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 아미르 티무르가 묻힌 곳, 구르 에미르
ⓒ 김준희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 보이는 것은 아미르 티무르의 원정로, 전성기 시절 티무르 제국의 지도였다. 사마르칸드를 수도로 했던 티무르 제국은 인도의 델리에서 북으로는 타슈켄트까지, 서쪽으로는 바그다드를 넘어서 이스탄불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전성기 시절 칭기스칸에는 못 미치지만 그에 버금가는 넓은 영토다. 하지만 칭기스칸과 아미르 티무르는 중요한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칭기스칸은 원정을 끝내고 나면 그 지역에 자신의 혈통과 통치수단에 맞는 체제를 구축해 두었다. 하지만 아미르 티무르는 그런 체제를 원정지역에 마련해놓지 않았다. 그냥 벼락같이 쳐들어가서 박살내고 노획물을 챙겨서 돌아오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몽골제국은 칭기스칸이 죽은 이후에도 유지되었지만,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 사후에 분열되고 축소되었다.

▲ 티무르의 원정로, 티무르 제국의 세력도
ⓒ 김준희
그 지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티무르 일가의 관 여러 개가 있다. 가운데에 있는 흑녹색의 관이 티무르의 관, 그 북쪽은 스승의 관, 우측과 좌측에는 각각 무하마드 술탄과 아들 샤 루흐의 관이다. 하지만 이건 위치만을 나타낸 관이고 실제 관은 같은 위치의 지하 4미터 아래에 있다고 한다.

관 주위에는 여러 명의 서양인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미르 티무르는 자신이 죽고 나서 몇 백 년 후에, 세상 사람들이 지구 반바퀴를 돌아와서 돈을 주고 자신의 무덤을 구경하게 될 거라고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 여러 개의 묘석이 구르 에미르의 내부다. 이걸 보기 위해서 2800숨을 내고 여기에 들어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단순한 유적이다. 티무르 관에는 '내가 이곳을 나갈 때 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라는 뜻의 글귀가 써 있다고 한다. 구소련의 학자들이 티무르의 묘를 연 것은 1941년 6월 22일. 재미있는 것은 티무르의 묘가 열린 바로 그 날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는 것이다.

아미르 티무르의 관이 열린 후에 구소련 학자들의 조사에 의해서 티무르는 생전에 한쪽 다리가 불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티무르에 대한 악몽을 가지고 있는 유럽인들은 그를 가리켜서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 구르 에미르 내부, 가운데 흑색 관이 티무르의 관
ⓒ 김준희
난 묘 주위의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밖이 더워서 나가기도 싫었고 돈이 아까워서라도 좀더 안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티무르 제국... 최후의 유목제국으로 역사에 묻혀

다시 칭기스칸을 생각해 보았다. 칭기스칸과 아미르 티무르는 약 200년의 차이를 두고 차례로 중앙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를 정복했다. 대 제국을 건설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비슷하다. 유목생활을 하던 세력이 유럽의 정주문명으로 치고 들어와서 파괴하고 약탈했다는 점, 서양인들이 칭기스칸과 티무르의 침략에 대해서 '고대문명을 응징하기 위해 파견된 신의 채찍'이라고 부르는 점도 동일하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아미르 티무르는 제국의 수도였던 이 사마르칸드에 자신의 무덤과 성원을 포함해서 많은 건축물을 남겼지만, 칭기스칸은 별다른 건축물을 남기지 않았다. 아미르 티무르는 타슈켄트와 사마르칸드의 동상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상징적인 인물이고, 칭기스칸은 지금의 몽골 내에서 칭기스 맥주와 지폐에 실린 얼굴로 역시 몽골인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다.

또 한 가지는 무덤이다. 칭기스칸은 그의 무덤이 바이칼 호수 알혼섬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 떠돌 뿐, 실제로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가는 법. 아미르 티무르는 죽어서 구르 에미르에 묻혔지만, 칭기스칸은 자신의 무덤도 알리지 않고 사라져 갔다.

티무르 제국 이후로, 유목민은 더 이상 정주민에 대해서 군사적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한때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몽골의 기마궁사들은 총포 앞에서 무너져 갔고, 몇 백 년 간이나 유지해 왔던 우위는 역전되어 버렸다. 티무르 제국은 최후의 유목제국이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2005년 7월부터 10월까지 몽골-러시아(바이칼)-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키르키즈스탄을 4개월간 배낭여행 했습니다. 이중에서 중앙아시아 3개국의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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